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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69)화 (69/234)

에녹이 혀를 차며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나를 자신에게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덕분에 아스달과 조금 멀어졌다. 어쩐지 에녹에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거릿이 자네 시녀인 줄 아나. 저런 놈이 왕세자라니, 헤스티아 왕국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는 군.”

“뭐? 이보게, 반황. 말 다 했나.”

아스달이 화가 난 어조로 에녹의 말에 반박했다. 그것도 에녹을 낮잡아 부르는 ‘반황’이라는 소리를 잘도 꺼내면서 말이다.

에녹은 고요한 얼굴로 아스달을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 미안하군. 내가 신사적이지 못한 인간에겐 예를 못 갖추는 알레르기가 있어서.”

“풉.”

멀찍이 떨어져서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던 유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스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유안나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체를 했다.

아스달은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인 것 같다’는 얼굴로 일단 내게 사과했다.

“그래. 내가 신사적이지 못하긴 했군. 왕족으로서의 체면이 있는데. 사과하지, 영애.”

흠, 꼰대 같은 직장 상사 스타일이지만 사과는 하는 거 보니 완전히 상식이 없는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벌레는 잡아 줘. 부탁한다. 영애는 할 수 있잖아.”

비교적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말, 취소.

“벌레도 못 잡아요? 그럼 마물이라도 나오면 기절하시겠네요.”

“그거랑 벌레는 다르지. 그리고 저 녀석은 단순 벌레라기엔 좀 이상해.”

“저하께서 지금 저를 만능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도 벌레는 싫어하거든요? 특히 다리 많은 것들이나 다리가 없는 것들은…… 으…….”

상상만 해도 싫다. 내가 진저리를 치자 내 어깨를 잡은 에녹의 손에도 옅게 힘이 들어갔다.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아스달 저하.”

상황을 지켜보던 유안나가 가까이 다가와 아스달을 불렀다.

“플로네 영애 그만 좀 괴롭히시고 이리 오시죠. 물고기 굽는 거 도와주신다면서요.”

“내가……?”

아스달이 황당하단 얼굴로 어깨까지 으쓱이며 반문했다.

유안나는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곱게 눈웃음을 지었는데, 어쩐지 그녀의 등 뒤로 후광이 비추는 느낌까지 들었다.

미소에 홀리는 기분이었다. 저러니까 남주들이 모두 반했던 거겠지?

“벌레는 창문 열어 두면 나가겠죠.”

유안나의 말에 결국 아스달은 벌레 잡기를 포기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거릿.”

주방 쪽으로 멀어져 가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에녹이 다시금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그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한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깊은 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앞으로 왕세자와 단둘이 사냥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걱정된다.”

“아…… 걱정 마요. 두 번 다시 그럴 일 없을 것 같아요.”

아스달과의 사냥은 내게 ‘지뢰달’이란 별칭을 남겼다.

‘끔찍했어.’

앞으로 함부로 누군가에게 사냥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지 말아야겠다.

인생 경험 시켜 주려다가 내가 인생 경험을 하게 되는 파국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지뢰달을 떠올리며 진절머리를 치고 있는데 귓가에 에녹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약속해 줘.”

움직임 없이 잔잔한 눈빛엔 어쩐지 격동적인 감정이 고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타오르는 불꽃 같다.’

에녹은 내 뺨에 자신의 손을 얹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내 이마에 그의 이마가 닿았다.

“마거릿, 약속해 줘. 불안하니까.”

한숨처럼 내뱉은 음성이 어쩐지 뜨거워서 나는 잠시 숨을 삼켰다.

나는 종종 에녹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당혹스러웠다. 정확히는 나를 향한 에녹의 관심이 조금 신기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나는 한 번도 이런 격정적인 감정을 품어 본 적이 없는데.’

사실 나는 관심과 애정을 받아 본 적도, 줘 본 적도 없다. 그래서 그게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에녹은 메마른 가지처럼, 한겨울의 눈바람처럼 차가워 보였지만 실상 그는 항상 뜨거운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어쩌면 에녹과 나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실상 메마른 가지 같은 사람은 나였으니까.

“약속할게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에녹이 싫어하는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굳이 그럴 필요 없지. 그가 싫어하는 걸 굳이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에녹과 머리를 맞대고 있던 중에 오두막 문이 열렸고 나무 땔감을 한아름 들고 들어오던 카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마거릿……!”

그가 나를 보고 신난 강아지처럼 달려오려는 때에, 거대한 굉음이 오두막 안에 울렸다.

쾅!

정확히는 2층에서 난 소리였다.

“뭐야……?”

카이든이 놀라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에녹은 곧장 내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밀어 넣고는 검을 꺼냈다.

“으, 으아악!”

루제프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2층에서 들려왔다.

다 함께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본 건, 아스달의 방문을 뚫고 나온 거대한 다리였다. 아스달이 말했던 벌레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 벌레가…….

‘젠장, 저건 그냥 벌레가 아니잖아요, 선생님.’

2층 복도에서 그 다리를 보고 놀라 주저앉은 루제프가 우리를 보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디에고가 전에 본 적 있다던 마물인 것 같군.”

에녹의 중얼거림에 나는 유안나 일행이 마주쳤다던 타란튤라형 마물을 떠올렸다.

“분명 작은 거미였는데……. 어쩐지 굉장히 수상쩍은 기운을 풍긴다 했어.”

언제 왔는지 우리 등 뒤에 서 있던 아스달이 기가 막히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작은 거미에게서 수상쩍은 기운이 풍긴다는 걸 눈치챈 것도 신기했다. 아무래도 그는 감이 좋은 편인가 보다.

-아무래도,

그것들이 진화를 하는 것 같다.-

나는 원작 소설 속 유안나의 독백을 떠올렸다. 소름이 끼쳤다.

다행히도 이제 막 진화했는지 거미는 맥없이 에녹의 검에 명을 달리했다.

거대한 거미의 사체를 오두막 밖으로 간신히 치우긴 했으나 아스달의 침실은 더는 사용할 수가 없게 됐다. 지독한 악취 때문에.

“끔찍하군요. 악몽이 떠올라…….”

유안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벽난로 앞에 앉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전에 있었다던 일을 떠올린 모양이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디에고가 묵묵히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마물이 나왔던 2층에서 취침을 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우리 모두가 벽난로 앞에 침구를 펼쳤다.

내 양옆엔 여전히 에녹과 카이든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에녹의 옆으로는 아스달과 디에고가 유안나를 가운데 두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가에 가깝게 자리를 잡고 누워 있는 루제프가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이로써 마물이 진화한다는 건 확실해졌네.”

카이든이 깍지 낀 손바닥에 뒷머리를 기대고 누워서 중얼거렸다.

“이 섬에서 나가야 해.”

내 중얼거림에 나를 따라 내 옆에 누운 에녹이 한숨처럼 대답했다.

“그러려면 열쇠를 주웠다는 장소에 하루빨리 다녀와야겠군.”

그래, 다녀와야지.

“이 오두막도 안전하지는 않은 것 같아.”

내 말에 얌전히 누워 있던 이들이 전부 나를 돌아봤다. 나는 찌를 듯한 시선에 당황스러워서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왜, 왜요?”

내 물음에 에녹이 뒷목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언제까지 이 오두막이 버텨 줄지 모르겠어.”

에녹의 대답에 카이든이 따라 동의했다.

하지만 유안나가 몸을 일으켜 앉고서 나를 돌아봤다. 돌아보며 반론을 제기했다.

“열쇠가 떨어진 장소에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훌륭한 베이스캠프를 잃어버리는 건 위험 부담이 있어요.”

유안나의 말에 나를 보던 이들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주목했다. 유안나는 좌중을 한번 훑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거미가 진화를 해서 그런 거지, 아직 마물 자체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녀의 말에 에녹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유안나가 싱긋 웃으며 이번엔 내게 동의를 구하는 어조로 말했다.

“열쇠가 떨어진 장소에 최대한 빨리 다녀온 다음에, 오두막을 정리하는 걸로 하죠. 어차피 섬 전체를 정찰하려면 떠나긴 해야 하니까요. 어때요, 영애?”

유안나의 물음에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이 이번엔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그러다가 목 돌아가겠어.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성녀님 말에 동의해요.”

그렇게 우리는 열쇠에 대한 비밀을 최대한 빨리 알아낸 뒤에 오두막을 떠나기로 합의하고는 다시 취침 모드에 들어갔다.

어쩐지 계획이 세워지니까 한결 안심이 됐다.

얌전히 오두막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데, 옆에서 카이든이 나를 향해 돌아누운 채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의아해서 나 역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를 빤히 보는 붉디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왜?”

내 물음에 그가 씨익 웃음을 짓는다. 상황에 맞지 않는 굉장히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예뻐서.”

그가 내게만 들릴 조용한 목소리로 낯간지러운 말을 속삭였다. 너무도 다정하고 달콤해서 순간 설렐 정도로 말이다.

“예쁘니까 자꾸 갖고 싶어지잖아. 말도 안 되게.”

말도 안 될 것까지는 뭐람. 나는 카이든이 평소와 같이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치부하고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게 헛소리가 아닐 줄은 그때는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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