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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68)화 (68/234)

나의 이런 말과 행동 모두 이곳이 왕국이었다면, 또는 란그리드 제국이었다면 할 수 없는 것들이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마물이 나타나면 지금 당장에라도 즉사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무인도였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여분의 작살을 주워 그의 손에 억지로 넘겼다. 그리고 작살을 쥔 그의 손을 제대로 고쳐 쥐어 주며 말했다.

“지금 저하께선 일행에 아무 도움이 안 되시잖아요. 그런 쓸모없는 짐 덩어리 역할은 그만하시고, 물고기 잡는 법이라도 좀 배우시라고요.”

사실 그를 골려 주려고 했던 마음이 더 컸지만, 그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려던 의도도 없진 않았다.

그의 생존 능력을 시험해보려고 했다는 말도 거짓말은 아니고.

아스달은 전력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인력이라서 한 가지라도 쓸 만한 능력을 만들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턱을 괴고 한참 동안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만 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기 어려운 얼굴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의 얼굴을 점령하고 있던 노기가 가라앉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끝내 그가 한다는 말은,

“싫다.”

가차 없는 거절이었다. 아스달은 오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고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돌연 흥미롭다는 듯이 씨익 미소까지 지었다.

“물고기는 영애가 잘 잡는다고 하지 않았나. 영애가 있는데 내가 왜 물고기 잡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군.”

“네?”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아랫사람의 속을 한두 번 뒤집어 본 솜씨가 아니다.

“대체 왜 그렇게 양심이 없어요? 저희 일행이 없으면 어쩌시려고요?”

기가 막혀서 따져 보았지만, 아스달은 동요조차 없었다. 그는 되레 의아한 얼굴로 무슨 그런 말을 하냐며 반문했다.

“무슨 걱정이야. 앞으론 영애가 계속 내 옆에 있으면 될 텐데.”

‘……?’

XX, 뭐라는 거지. 물고기 잡는 노예로 부려 먹겠단 소리인가?

“제가 왜요? 미치셨어요? 저는 저하 옆에 있기 싫은데요?”

속으로 오만 가지 욕을 다 하다가 그만 비속어가 튀어나올 뻔했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스달은 무척 뻔뻔했다.

저런 사람한테 물고기 사냥법을 알려 주겠다고 한 내가 머저리다.

“영애, 진정한 왕족이라면 사람을 쓰임에 맞게 부릴 줄 알아야 하는 거다.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단호한 말로 짜증 나는 소리를 하는 아스달은 정말로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기랄.

“예예, 이 섬에선 그러다가 죽는 거죠. 저희 중 가장 먼저 세상과 이별하시겠네요.”

“……왕족 모독이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쓸모없는 사람으로 지내시겠다는 거죠?”

“사람을 쓰임에 맞게 다루는 것도 쓸모 있…….”

“하. 입만 살았어. 말을 말자.”

“영애.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물고기 잡는 거 도와줄 거 아니면, 입 다물어요.”

“…….”

아스달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도 아스달이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물고기를 잡았다.

그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빠르게 포기했다.

저런 정신머리를 가진 놈을 가르쳐서 뭐 하겠어. 그건 아주 시간낭비다.

성가신 아스달은 무시하고 우선 물고기부터 잡아야 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나는 작살을 고쳐 쥐고 물고기 사냥을 이어갔다. 그렇게 얌전히 물고기 사냥을 했고 아스달은 바위 위에 앉아서 입으로만 잔소리를 했다.

“그대가 하는 게 없다고 한 말을 정정하겠다. 사냥 실력은 뛰어나군.”

아스달은 마치 노역을 감시하는 감시관처럼 아주 깐깐하게 굴었다.

“거기 물고기가 지나가는군. 마거릿, 거기. 그래 거기. 잡아라.”

X발, 내가 포X몬이냐.

작살을 던져 아스달이 말한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데 그만 현타가 왔다.

나는 두 번 다시 아스달과 사냥을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 발을 내가 밟았다.

“마거릿, 거기!”

“도와주지 않을 거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죠. 내 인내를 시험하는 게 아니라면 닥쳐요.”

내가 물고기를 잡다가 작살을 던지고 화를 내자 아스달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걸 때려? 말어?

섬에서 탈출하는 날을 생각한다면 아스달에게 맞서는 것도 적당히 하기는 해야 했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물고기를 한가득 잡은 나무 바구니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시간이 제법 흘러서 벌써 노을이 질 기미가 보인다.

이 섬에 갇혀 마물들을 상대하고 살아남겠다고 식량을 구하러 다니려니 나도 반쯤은 미친 게 분명했다.

아스달이 바위에서 내려오며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보람찬 사냥이었다. 생각보다 영애는 쓸 만한 것 같군.”

보람찬 사냥 같은 소리 하네.

“말씀드렸지만, 저하께 쓸 만한 사람 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그가 내가 들고 있는 물고기 바구니를 빼앗아 들며 앞서 걸어갔다.

“처음엔 건방지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다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영애가 처음이야. 마음에 들어.”

“……네?”

아스달이 나를 보며 마음에 든다는 듯이 웃음을 짓더니 등을 돌려 앞서 걸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다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 말 하면 제가 좋아해야 하나요? 이거 지금, ‘날 때린 여잔 네가 처음이야’ 뭐 그런 거예요? 그딴 관심 필요 없어요.”

앞서 걷던 아스달이 나를 돌아봤다.

“때린 적은 없어. 사람을 뭐로 보고. 난 그런 몰상식한 행동은 하지 않아. 그리고 영애더러 좋아하라고 한 소리는 아니야. 그런 건 관심 없어. 그냥 내가 영애가 마음에 든다고.”

“아, 네. 그러세요.”

아스달은 말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귀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아스달은 앞으로 내게 ‘지뢰’다. 이제 그를 ‘지뢰달’이라고 불러야겠다. 무조건 피해 다녀야지.

“물고기가 너무 같은 종만 있는 게 거슬리지만, 그래도 고생 많았다.”

오두막이 보이기 시작할 때 즈음 아스달이 내게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건넸다.

나는 참을 인(忍)을 수없이 머릿속에 덧그리며 인내심을 길렀다.

참자, 나는 마거릿이다. 귀족 영애다. 고상한 귀족 영애…….

물고기 잡는 고상한 귀족 영애, XX.

* * *

“플로네 영애, 이리 좀 와 봐.”

“이건 영애가 잘하지 않나. 도와주게.”

“플로네 영애.”

“영애?”

함께 사냥을 다녀온 그날 저녁 내내, 나는 지뢰달에게 무진장 시달렸다.

‘저 김 부장 같은 새X.’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날 찾아서 도와 달라고 하는 통에 ‘플로네 영애’라는 단어에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까다로운 아스달 저하께서 왜 저렇게 영애만 찾는 거래요?”

유안나가 신기하단 얼굴로 내게 물었다.

“저도 영문을 모르겠어요, 성녀님. 저 그만 좀 찾아 달라고 전해 주시면 안 되나요? 이러다가 제 이름 닳겠어요. 진짜로요. 제 이름 닳아요.”

왕세자라서 때릴 수도 없잖아요.

나는 뒷말을 삼키며 유안나의 손을 붙잡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하필이면 카이든도 땔감을 구하러 나간 상태라 아스달을 피할 명분도 없었다.

“플로네 영애! 대체 뭐 하고 있는 겐가.”

나를 한참 부르던 지뢰달이 기어코 2층 계단을 타고 내려오며 나를 찾았다.

“무슨 일이지? 왕세자가 마거릿을 왜 찾아.”

그리고 그때, 기적적으로 에녹이 등장했다. 먼 곳까지 정찰을 다녀온 모양인지 그가 뒤늦게 오두막으로 귀가한 것이다.

엄마에게 혼이 나던 딸내미가 귀가한 아버지를 반기듯 나는 버선발로 뛰쳐나가 에녹을 반겼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에녹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굉장히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뭐지?’

머리 쓰담쓰담까지 바란 건 아니었는데. 나는 멋쩍어서 그가 쓰다듬은 머리를 매만지다가 아스달의 부름에 등을 돌렸다.

“영애.”

언제 왔는지 코앞까지 다가온 아스달이 나와 에녹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지척에 다가오자 새삼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스달은 메인 남주 에녹 다음으로 영향력 있었던 남주였으니, 잘생긴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외모 자체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디카프리오 같은 고급스러운 외모다. 동화 속 왕자님 그 자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역시, 잘생긴 건 생존에 전혀 쓸모가 없다.

나는 귀찮음을 채 감추지 못하고 아스달에게 물었다.

“왜 부르셨는데요?”

“내 방에 수상쩍은 벌레가 나왔어. 영애는 벌레도 잘 잡을 것 같아서.”

아스달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저 남자는 그냥 나를 헤스티아 왕국의 시녀 즈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시녀들도 벌레는 안 잡잖아.

‘게다가 수상쩍은 벌레는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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