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기 넘치는 제안을 하니 에녹이 깜짝 놀라서는 다급하게 내게 달려왔다.
“마거릿, 그건 절대 안 돼.”
걱정이 한가득 담긴 얼굴로 내 손을 잡은 그가 아스달을 매섭게 노려봤다.
“에녹.”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녹이 고집스러운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여전히 나를 향한 걱정이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조명탄을 꺼내 보였다.
“너무 걱정 마요. 여차하면 쏠게요.”
에녹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더는 내 뜻에 반박을 하지 않았다.
“누가 영애와 함께 간다고 했나.”
아스달은 짐짓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말했다.
“저하께서 직접 한 약속이에요.”
왕족은 대체로 ‘약속’에 민감하다. 약속을 어기는 것만큼 불명예스러운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에 약속을 함부로 하지 않지.
역시나 아스달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싫으시면, 성녀님과 갈게요.”
“내가 가지.”
그제야 아스달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가 보호하고 아끼는 유안나가 허드렛일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생각하니까 너무 억울해. 나도 허드렛일하는 사람 아니라고. 마거릿도 귀족이야!’
아스달과 디에고가 유안나를 감싸는 건, 정말 유안나의 말대로 단순한 죄책감 때문일까?
확실히,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서 사랑으로 보듬는 정도의 가벼운 감정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불현듯 유안나와 아스달, 디에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캐고 싶어졌다.
‘조만간 알아내야지.’
나는 에녹이 함께 가겠다고 하는 걸 말리고 물고기를 잡을 작살과 물고기를 담아 올 바구니를 챙겼다.
그리고 크로스백에 열심히 무기들을 챙겨 넣었다. 조명탄과 조명 탄알, 그리고 폭탄까지.
물론 우리 고귀하신 왕자님은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는데, 왕족으로서의 매너는 남아 있는지 바구니 정도는 대신 들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아스달과 함께 계곡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서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우리가 다정하게 대화할 사이도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았다.
기억하기로 란그리드 제국에서 검술 실력만 두고 따지자면 단연 1순위는 에녹, 그다음이 디에고였다. 그리고 그런 에녹, 디에고와 검술 대련이 가능할 정도의 숨은 실력자가 바로 아스달이었다.
생존 능력은 제로일지언정 힘 쓰는 것과 검술에는 재능이 있으니 작살 던지기 정도는 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스달은 작살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가 계곡 앞에 어설프게 서서 자꾸만 어정쩡한 동작으로 작살을 내리꽂는 걸 보다 못한 나는 결국 한마디 던졌다.
“작살 던지는 방법은 아세요?”
내 물음에 아스달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스쳐 갔지만, 금방 되받아쳤다.
“못 하기는 영애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도 영애보단 내가 낫겠지. 방해만 되니까, 빠져 있게.”
아스달은 그런 황당한 말을 남기며 나를 밀어냈다. 나는 맥없이 밀려나서는 멀뚱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래.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이참에 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근처 바위에 앉아 아스달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한참동안 물 위로 작살을 내리꽂던 아스달이 기어코 발을 헛디디고는 넘어졌다.
“제기랄!”
고상한 아스달이 욕설을 뱉으며 주먹으로 수면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 반동으로 솟아오른 물줄기를 뒤집어쓰곤 더욱 처량한 몰골이 되었다.
“괜찮으세요?”
내가 놀라서 그에게 달려가니까 그가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걸 보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고 하던가. 안면 근육이 실룩거렸다. 최대한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세요.”
아스달은 제게 내밀어진 내 손을 조금 얼떨떨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도움을 거부하고 혼자 일어났다.
나는 텅텅 비어 있는 그의 바구니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마리도 못 잡으셨나 보네요.”
그가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에게 다가가 작살을 빼앗아 들었다.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뭐 하려고?”
나는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어 두고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그러고는 자세를 잡고 물 위로 비치는 물고기가 없는지 살폈다.
“이러다가 밤을 샐 것 같아서요. 굶을 수는 없잖아요.”
“그게 무슨 말…….”
나는 작살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수면 위로 어른거리는 물고기가 보였을 때 곧장 작살을 꽂아 내렸다.
섬에 와서 내내 작살로 물고기만 잡았더니 이제는 단련이 돼서 쉽게 작살 사냥이 가능했다. 계곡물에서 작살을 뽑자 팔뚝만 한 물고기가 작살 끝에 꽂혀 퍼덕이고 있었다.
“이런 거 몇 마리만 더 잡아가면 한 끼 정도는 해결할 수 있겠네요.”
나는 능숙하게 나무칼로 물고기의 피를 빼 바구니에 넣었다. 그러다 멍한 얼굴로 나를 보던 아스달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러세요?”
그가 화들짝 놀란 듯 정신을 차리고는 뒤로 물러났다. 아스달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구니 안의 물고기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금 바구니에 담긴 물고기들을 흘끗 내려다봤다.
“음. 혹시 플로네 공작이 어업을 했었나?”
“……대답해야 해요?”
황당해서 되묻자 아스달이 민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본인도 헛소리를 했다는 걸 인지한 모양이다.
“왜 굳이 영애가 나와 함께 사냥을 하겠다고 한 건지 궁금한데.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내가 영애를 불신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그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반황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영애를 감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우쭐해하지는 말게.”
그가 아주 느긋한 어조로 내 속을 긁었다. 천연덕스럽게 웃음까지 짓는 게 마치 이 관계에서 우위는 자신이라는 걸 어필하는 듯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봤다.
“애초에 에녹에게 기대서 우쭐한 적 없거든요. 그 반대라면 모를까. 저하께선 사람이 다 우스워 보이죠? ”
“나와 반황의 관계에 대해서 영애는 몰라.”
“글쎄요. 때로는 겉으로 보이는 게 다일 때도 있는 법이죠.”
“나를 여기 데려온 이유가 영애가 변했다는 걸 어필하기 위함인가? 그런 거라면 소용없다고 말하고 싶군. 조금 바뀌었다고 해서 영애에 대한 내 판단이 변할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작살로 물고기 한 마리를 더 잡아 건져 올리며 웃었다.
“제가 변했다는 걸 저하께 어필해서 뭐 해요. 그런 건 관계에 대한 개선 의지가 있어야 하는 거죠.”
아스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막 잡은 물고기 또한 간단히 손질한 뒤, 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똑똑히 알아 두세요. 전 저하와의 관계를 개선할 생각이 없어요.”
“……뭐? 그럼 이유가 뭐야. 나를 여기 데리고 온 진짜 이유.”
“기회를 드린 건데.”
나는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손을 계곡물에 박박 문질러 씻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스달이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나를 노려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계속 말해 보란 뜻이다.
“저를 죽이기 딱 좋은 기회잖아요.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씌우기도 좋죠.”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그가 기가 차다는 듯이 내게 되물었다. 물론 진심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가 저하와 함께 사냥을 나온 게, 정말로 저하께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저하께 시험당하기 위해서?”
아스달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속내를 구태여 숨기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문했다.
“아닌가?”
“글쎄요, 그 반대로 제가 저하를 시험하기 위해 데려온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나요? 저하의 생존능력 좀 시험 해보려고 했어요. 목숨이 달린 극한 상황에서 쓸모가 없는 사람은 필요 없잖아요.”
나는 일부로 그의 속을 긁을만한 냉정한 말을 고르고 골라 말했다.
내 말에 허를 찔린 듯이 아스달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건방지기 짝이 없군, 감히.”
그가 화가 치민 얼굴로 읊조렸다. 상당한 노기였지만, 나는 주춤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에녹과 카이든, 루제프를 거쳐 오면서 단련이 되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를 경멸하며 숨 막힐 정도로 위압감을 뽐내던 것은 오히려 에녹이었다.
“여기가 헤스티아 왕국이었다면, 제 이런 얕은 수에 놀아나지 않으셨겠죠.”
나는 아스달을 비웃듯이 말했다.
“그런데 저하, 여긴 왕국이 아니잖아요. 이젠 좀 인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