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불신과 낙오
해가 떴지만, 카이든은 마지막 불침번을 섰기 때문에 아직 꿈나라였다. 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
일찍 일어난 디에고는 오두막 주변 정찰을, 루제프 주교는 물을 정수하러 나간 참이었다.
나는 지난번에 만들어 둔 뼈바늘에 실처럼 얇은 나무줄기를 꿰어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수선했다.
실이 아니라 아주 얇은 나무줄기를 잘라 꿰맨 것이라 누더기처럼 수선이 됐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나는 드레스를 툭툭 털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난로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대나무로 스팀 조리 기구를 만들 준비를 했다.
“그건 뭐지?”
에녹이 불을 지피다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주방 식탁에 앉아 있던 아스달도 궁금했는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번엔 생선을 쪄 보려고요. 구워 먹는 건 질리잖아요. 찜 요리는 영양분이 그대로 보존되니까 몸에 좋기도 하고요.”
나는 대나무 마디 사이로 공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칼로 구멍을 뚫어 준 뒤, 대나무의 가장 아래쪽 마디에 물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대나무 윗부분에 뚜껑을 만든 뒤, 그 위에 손질한 물고기를 넣었다.
“새벽에 잡아 온 건데, 양이 얼마 없어서 금방 허기가 질 것 같아요. 사냥을 더 해 오긴 해야겠어요.”
나는 대나무를 끈으로 엮어 벽난로 위에 올리며 말했다. 이제 대나무 가장 아래 칸에 있는 물이 증기로 변하며 위 칸에 든 생선을 익혀 줄 거다.
“믿어도 되나?”
나는 혹여 대나무가 불에 타지는 않는지 살피다가 고개를 돌렸다.
주방 식탁 앞에 다리를 꼬아 앉아 거만하게 나를 보던 아스달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영애가 한 음식이 정말로 먹을 수 있는 건지 어떻게 믿어. 지금까지 영애가 한 거라곤 말뿐이 아니었나.”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건 아스달 아닌가? 그는 여전히 내가 물고기 사냥을 한다는 걸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에 나보다 먼저 발끈한 건 에녹이었다. 그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있다가 아스달을 돌아보며 경고했다.
“이봐, 말을 가려 하는 게 좋을 거야.”
“반황, 그거 지금 내게 한 말인가?”
“귀도 먹었나?”
아스달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에녹을 보며 되물었다. 사실 아스달이 시종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었다.
헤스티아는 재정적인 파워가 대단한 왕국이었고 아스달은 그중에서도 적통 중의 적통 왕세자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에녹은 ‘태생적 급’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런 극한 환경에 있으니까 바닥인 인성이 다 드러나는구먼.’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보게, 황태자”
“말하게, 왕세자.”
에녹이 비교적 여유롭고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며 아스달을 바라봤다.
두 사람 다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은 채 서로를 노려봤는데, 바닥에 앉아 있던 에녹의 눈높이가 비교적 낮았음에도 어쩐지 그가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역시 전쟁 영웅의 압도적 기백 때문인가?’
흑표범과 독수리가 기 싸움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맹수와 맹금류의 대결이라…….
“마거릿에게 함부로 구는 이를 존중할 생각은 없어.”
에녹은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플로네 영애가 황태자의 약혼자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군.”
아스달이 비스듬히 팔꿈치를 무릎에 올린 채 손등에 뺨을 기대고는 에녹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소설 <생존보다 중요한 것>에선 에녹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남주 후보가 아스달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겐 까칠했지만 유안나에게만큼은 친절했다. 작가가 아마도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남주를 그리려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라서…….’
나는 한결같은 사람이 좋다.
에녹처럼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매너가 있거나, 차라리 카이든처럼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개차반이거나.
“플로네 영애가 내가 알던 바와 달라진 건 둘째치고, 반황의 태도도 정말 놀랍군. 에녹 황태자가 플로네 영애를 싫어하는 건 헤스티아 왕국의 지나가던 여덟 살짜리 어린 애도 아는 사실인데.”
뭘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고 그러냐.
“지금 황태자가 영애를 감싸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고는 있나?”
아스달이 대뜸 에녹을 힐난했다. 그 말에 나는 좀 억울했다. 에녹이 나를 싫어했던 건 나도 알지만, 사람이 변할 수도 있지! 나를 감싸는 게 어때서!
다행히도 에녹은 눈 하나 깜빡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마거릿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니까.”
“에녹, 전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계속 그렇게 황태자를 이름으로 부를 건가? 참 건방지기 짝이 없는…….”
“내가 그러라고 했으니 자네는 그 입 좀 닥쳤으면 하는데.”
나는 아스달이 여전히 나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는 걸 보며 짜증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계속해서 불신하는 인간과 한집에서 지내는 건 너무 불쾌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스달이 아무것도 안 한다는 점이었다. 하는 일은 없으면서 자꾸 훈계를 한다.
이럴 땐 손수 인생의 쓴맛을 가르쳐 줘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스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저하, 앞으론 저희 쪽에서 한 명, 전하 쪽에서 한 명씩 사냥을 가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아스달이 그제야 불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오늘 오후 사냥은 저랑 둘이 가는 걸로 하죠.”
그는 물고기 사냥을 해 본 적이 없을 테니 제대로 골려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