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삼스러운 아이 취급에 당혹스러운 얼굴로 루제프 주교를 바라봤다.
나를 향한 경멸이 한 꺼풀 벗겨진 루제프 주교는 막둥이 여동생 보듯 나를 대했다.
“건빵 왕……, 아니 왕세자 저하께서 하는 말은 신경 안 써요. 그러니 제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턱을 괴고 있던 카이든이 기특하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다들 왜 이런담.
나는 들고 있던 돌칼을 테이블에 콱 꽂았다.
“인정 따위는 필요 없고요. 또다시 성가시게 굴면 그냥 모가지를……!”
카이든이 눈치를 보더니 얌전히 돌칼을 뽑아서 다시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마거릿은 정말 과격하게 변했다니까.”
카이든의 중얼거림에 잠시 겁먹은 얼굴로 내게서 떨어져 있던 루제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뭐, 왕세자도 그래. 저렇게 성깔이 더러우니까 이혼한 거 아니겠어?”
카이든이 혀를 차며 아스달의 흉을 봤다.
완벽한 아스달에게도 약간의 흠이 있기는 했는데, 바로 ‘전 부인’이었을 거다.
“그런 말은 실례야, 카이든. 그리고 ‘이혼’이라고 말하긴 좀 애매하지 않아? 전 부인이 어떻게 됐는지 너도 알잖아.”
내 말에 카이든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나 몰라, 어떻게 됐는데?”
“……몰랐단 말이야?”
참형을 당했다. 아스달 왕세자 살해 미수 혐의로 말이다.
아스달은 으레 왕족과 귀족의 결혼이 그렇듯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올렸는데, 전 왕세자비는 사랑이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의 결혼 목적이 아스달 왕세자 시해였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녀는 아스달의 배다른 동생의 연인이었다고 한다. 아스달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와 결혼했던 거고.
“충격적인 사건이라 란그리드 제국에서도 대서특필됐죠.”
루제프가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카이든이 영문을 모르겠단 듯이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뭐야, 나만 몰라.”
동면 후엔 몇 년 동안 연구실에 박혀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다.
“모르는 게 나을 겁니다.”
루제프의 말에 나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루제프는 성직자여서 결혼을 안 했고, 카이든은 풍파를 많이 겪어서인지 비혼주의자다. 아마 로하데 후작 가문의 차남이어서 가능한 선택이겠지. 거기다 대마법사이기까지 하니까.
“왕세자 저하를 빼면 다들 결혼을 안 했네.”
“그렇지. 나나 이 따까리는 그렇다 쳐도, 황태자는 좀 불쌍하다. 내내 전쟁터에서만 썩다가 이제 좀 누려 볼 만하니까 여기 왔네?”
“그러게.”
나는 카이든의 말에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에녹은 어린 나이에 군 지휘관으로 차출당해 무려 5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거기다 승전보를 올린 뒤에 형제들을 전부 누르고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는 데 또 2년이 걸렸지.
그렇게 힘들게 황태자가 되었는데, 그 지위를 누려 볼 새도 없이 외딴섬으로 끌려왔다.
세 남자 모두 혼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저마다 여자가 없는 이유가 있네. 소설 속 남주 스펙으로는 아주 제격이지 않은가.
아무튼간에 루제프가 나를 저렇게 애 취급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이진주인 나는 스물일곱이지만, 마거릿은 스물둘이었으니까.
란그리드 제국의 결혼 적령기는 20세부터 시작이라서 마거릿 또한 한창때긴 했다.
마거릿 정도 되는 가문이라면 벌써 약혼을 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혼자인 이유는 에녹 때문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 했었다.
“영애도 아직 약혼하지 않으셨죠? 하긴, 영애가 우리 중 가장 어리지 않습니까?”
루제프가 내게 물었다. 나를 보는 눈빛에 은근한 기대까지 담겨 있어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뭘 기대하는 거지?
일단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아직 약혼도 안 하긴 했지만, 저도 나름 결혼 적령기 귀족 영애예요. 아이 취급은 사양할게요.”
내 입에서 ‘결혼 적령기’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카이든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게. 그 생각을 못 했네. 마거릿, 너 약혼 같은 거 할 거야?”
“살아 돌아가면 아마도 하게 되겠지?”
“약혼하지 마. 나랑 그냥 비혼으로 살자.”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꺼.”
카이든이 나를 보며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내게로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역시, 마거릿은 단호해. 그래서 마음에 들어.”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여서 나는 황급히 귀를 틀어막고 그에게서 물러났다.
또다. 또 이렇게 의도가 불분명한 다정함과 의미 없는 스킨십을 선보인다.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저기요, 두 분. 여기 저도 있다는 걸 잊으신 건 아니길 바랍니다.”
때마침 루제프가 매우 불편하단 얼굴을 하고는 우리 대화를 끊어 냈다.
“그냥 빠지면 되잖아. 눈치가 없어.”
“제가 왜 그래 드려야 합니까?”
그러자 카이든이 그를 매섭게 노려본다. 톰과 제리가 또 시작이네.
“그만하고 식사 준비나 마저 할까요?”
나는 들고 온 물고기들을 나무판자 위에 올려 손질을 시작했다. 아스달 덕분에 입맛이 사라졌지만, 뭐라도 먹어야지.
루제프와 카이든은 몇 마디 더 주고받으며 투닥거리는가 싶더니 곧 얌전히 내 옆에 앉아서 물고기 손질을 도왔다.
멀리서 디에고와 대화를 나누던 유안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귀족 영애가 그렇게 능숙하게 물고기 손질하는 건 처음 봐요. 신기하네요.”
유안나의 옆에 꼭 붙어 있던 디에고가 슬그머니 내가 손질한 물고기를 흘끔거렸다. 귀여운 동물을 손질하는 건 못 본다더니, 물고기는 괜찮은가 보다.
가만히 손바닥에 한쪽 뺨을 기대고 나를 보던 유안나가 웃으며 말했다.
“영애는 역시 시중들기 완벽한 능력을 갖춘 것 같아요.”
“닥쳐요.”
다소 과격하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동요도 없다. 늘 그렇듯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당신의 아랫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자꾸 그런 헛소리하면…….”
나는 아스달에게 보여 줬던 것처럼 물고기 손질을 하다 말고 들고 있던 돌칼을 테이블에 꽂았다.
“가만 안 있을 거예요.”
“굴복시키기 어려워 보여서 더 의욕이 생기네요. 영애는 꺾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유안나의 나사 빠진 소리에 카이든이 격하게 반응했다.
“이봐 성녀, 자꾸 그딴 소리 하면, 성녀고 뭐고 없어.”
“성녀님, 플로네 영애께 너무 함부로 하시는 것 아닙니까?”
카이든에 이어서 루제프까지 말을 거들자 유안나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봐요. 그쪽 사람들은 다 영애가 손에 쥐고 있잖아. 나는 그럼 영애만 가지면 되는 거네.”
사고방식이 정말 이상하다. 아무튼 상식적이진 않았다.
하긴, 여기 상식적인 사람이 있기는 했나?
“성녀님, 사람을 그렇게 쉽게 얻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럼요?”
“굳이 상대를 굴복시키지 않더라도 몸과 마음을 다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그렇게 모두를 힘들게 하는 방법을 택하시는 거죠?”
“방법을 몰라서요. 그게 뭔데요?”
“존중과 배려요.”
사회성이 부족한 나도 그 정도는 안다.
하지만 지금 이 섬에는 나보다도 더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들만 모아 둔 것 같으니 침묵하겠다.
내 대답에 유안나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나를 보는 그녀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존중과, 배려…….”
그녀가 내가 했던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더니 내게 되물었다.
“존중과 배려는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러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거야?”
이번엔 카이든마저 말을 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안나와 카이든은 동류가 맞는 것 같다. 루제프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한심하단 눈초리로 카이든을 훑었다.
나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나도 모르니까, 각자 알아서 공부하세요. 저 좀 그만 귀찮게 하고요.”
그때, 타이밍 좋게 오두막 안으로 에녹이 들어왔다.
그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의 손에는 새끼 오리 두 마리가 들려 있었다.
카이든이 오리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고 루제프가 눈에 띄게 반색하며 나와 함께 에녹에게 달려갔다.
“세상에, 오리라니.”
그리고 나보다도 더 빠르게 에녹에게 달려간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유안나였다.
조금 전까지 심각하게 존중과 배려에 대해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오리를 보자마자 새카맣게 잊은 모양이다.
뭐, 그간 제대로 된 식사도 못 해 왔을 테니 그녀의 격한 반응은 이해했다.
그녀가 에녹의 손에 들린 오리를 보고 양손을 번쩍 들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꼭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의 손에 들린 치킨을 보고 기뻐하는 딸처럼.
물론 나는 경험해 본 적 없는 평화였지만, 지금 이 모습이 딱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결국 우리는 토라진 건빵 왕자를 빼놓고 다 함께 식사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