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62)화 (62/234)

뭐야, 진짜로 날 유혹이라도 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 그는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아 상당히 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요.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 잊은 건 아니죠? 성녀님이 갖고 있는 열쇠요. 정보를 캐내거나, 열쇠를 빼앗거나. 둘 중 하나는 하고 가야죠.”

에녹이 김빠진단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몸을 바로 세우고는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생존밖에 모르는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노을이 지기 전에 얼른 사냥을 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고는 부러 태연한 척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의 에녹을 보며 말했다.

“바로 앞이 계곡인데, 물고기나 잡으러 가시죠?”

에녹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돌렸다.

오두막과 멀지 않은 곳에는 우리가 목욕을 하던 계곡이 있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이 아니다 보니 낚싯대보다는 작살, 통발, 그물망 등으로 사냥을 하는 게 좋았다.

다행히 에녹과 나는 그간 작살로 사냥을 해 왔기에 민물고기를 잡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사실 에녹은 사냥‘도’ 잘했다. 그가 사냥하는 모습을 직접으로 보는 건 처음인데, 대체 이 남자는 못 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우선 에녹이 잡은 물고기들의 피를 빼내서 간단히 손질한 뒤, 나무줄기에 꼬아서 작살에 매달았다.

“오늘만 물고기 채집을 하고 내일은 육지 동물을 낚을 올가미를 만들어야겠어요.”

카이든에게 활도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카이든이라면 뭐든 뚝딱 만들어 내곤 했으니까 분명 활과 화살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에 한참 대답이 없던 에녹이 입을 열었다.

“내일 사냥은 로드와 내가 갈 테니, 넌 좀 쉬어.”

“어떻게 그래요. 모두 바쁜데.”

카이든과 에녹이 내 대신 사냥을 해 준다면 나야 편하겠지만, 각자의 역할이라는 것도 있고.

“마거릿, 넌 그래도 돼. 지금까지 고생해 왔으니까.”

에녹이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힘들다고 도망가지 말고. 쉬어.”

나는 에녹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도망가지 말고.’라는 말에 어쩐지 뼈가 섞인 것 같아서 식은땀이 났다.

편히 쉬라고 했지만 역시 나는 최대한 내 몫을 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소설의 열쇠를 쥐고 있으며 남주들의 그 모든 호의를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유안나지.

* * *

단체 생활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늘 나는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주로 혼자 지내는 게 익숙했고 그건 사회로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챙겨주거나, 보필하거나, 조직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 내 기분을 억누르는 짓 같은 건 잘 못한다는 소리다.

“이보게, 영애. 쩨쩨하게. 너무 소분하는 거 아닌가? 팍팍 좀 넣지 그래?”

주방에서 물고기 손질을 하던 중이었는데 지금까지 빈둥거리던 아스달이 다가와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 댔다.

퍽!

나는 결국 짜증이 나서 주방 테이블에 돌칼을 꽂아 넣었다.

아스달이 깜짝 놀라서 두 발자국 내게서 물러난다. 거실에 앉아 알 수 없는 이유로 멱살을 잡고 싸우던 카이든과 루제프마저 놀라서 나를 돌아볼 정도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스달을 째려봤다. 역시 나는 단체 생활이 안 맞아.

“굶고 싶지 않으면, 비켜요.”

아스달이 두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나를 보더니, 뒤늦게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영애, 지금 그거 나한테 한 소리야?”

나는 테이블에 꽂혀 있던 돌칼을 뽑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씀드려요?”

그렇게 말하며 아까보다 더 강하게 돌칼을 나무 테이블에 내리 꽂았다.

퍼억! 쩍.

나무 테이블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돌칼이 테이블에 깊게 꽂혔다.

“방해되니까 비키라고요.”

내 말에 아스달이 당황한 얼굴로 돌칼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뒷걸음으로 슬그머니 빠졌다.

그러면서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어차피 우리 황태자께서 구해 온 식량 아닌가. 왜 영애가 생색을 내는지 모르겠군.”

그런 신경 긁는 소리를 하며 거실로 나갔다.

유치한 말이지만, 애초에 물고기는 에녹보다 내가 더 많이 잡았다. 그리고 나는 생색을 낸 적이 없다.

아스달은 거실로 나가 주방에 있는 나를 돌아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플로네 영애. 내가 조언 하나 하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우린 영애와 함께 지낼 수 없어.”

하필이면 지금 오두막엔 에녹도 없었다. 정찰을 나갔기 때문이다.

카이든과 루제프는 여전히 서로의 멱살을 쥔 채로 근처에 다가온 아스달을 멀뚱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디에고는 아스달의 작태 같은 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유안나밖에 없단 듯이 그녀를 도와 벽난로의 불을 지피는 중이었다.

하긴 애초에 디에고는 유안나 때문에 저쪽 무리에 속해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에녹의 사람이다. 아스달이 아니라.

“저 개X끼가…….”

카이든이 욕설을 뱉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가 또다시 하극상을 보이려 들기에 나는 황급히 말문을 열며 화제를 돌렸다.

“저하가 그렇게 불편하다고 하시니 앞으로 식량은 그쪽 팀과 우리 팀 중 한명씩 차출해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응?”

아스달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단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얌전히 불을 피우고 있던 디에고와 유안나마저 나를 돌아봤다.

“단체 생활이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공평하게 나눠서 구해야죠.”

“잠깐 잠깐, 잘못 들은 것 같은데. 플로네 영애, 나더러 지금 식량을 구해 오라고 한 건가?”

아스달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기서 식량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이 따로 있나요? 자꾸 잊으시나 본데, 저 플로네 공작 가문의 영애예요.”

플로네 공작 가문은 란그리드 제국에서 위세가 대단했다. 그렇다는 건 곧 란그리드 제국과 교류를 하는 국가들에도 대단한 위력을 떨친다는 뜻이다.

가문의 이름이 나오자 아스달이 곧장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섬에서 탈출할 거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지켜 오던 상호 간의 예의도 이제는 시효가 끝나 간다.

벌써 낯선 섬에서 눈을 뜬 지 두 달가량이 훌쩍 지났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섬에서 머무르게 될지도 모른다. 탈출하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즉, 이제는 생존을 위해 신분이고 체면이고 전부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하여간, 꼭 일을 키우시네요.”

유안나가 아스달을 향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싫다고 하시면 식량은 나눠 드릴 수 없어요.”

나는 팔짱을 끼고는 아스달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아스달은 그런 내 태도에 당황한 듯 보였다.

소설 <생존보다 중요한 것>의 등장인물들은 유안나를 제외하곤 전부 마거릿과 안면이 있었다. 아스달도 마찬가지였다.

마거릿은 높은 악명만큼이나 발도 넓고 활동 반경도 컸기 때문이다.

4년 전, 그러니까 마거릿이 열여덟 살이 되었을 즈음에 헤스티아 왕국으로 반년 정도 유학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아스달과는 그때 잠시 만났다.

그러니 진짜 마거릿의 성정에 대해서라면 아스달도 다른 남주들 못지않게 잘 알고 있을 거다.

“플로네 영애, 섬에서 나가면 그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아스달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내게 경고했다.

그의 말대로 섬을 탈출하고 난 뒤라면 나는 이 일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섬에서 나가기 전에 죽으면 후회할 것도 없겠죠.”

내 대답에 아스달은 할 말이 없었는지 더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입을 다물었다.

“물러 터져 가지고. 뭘 상대를 해 주고 있어.”

언제 왔는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카이든이 한숨을 내쉬며 내가 하던 물고기 손질을 마저 도왔다.

아스달은 기가 차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나와 카이든을 번갈아 보던 그가 태도를 바꿔 한숨을 내쉬더니, 가슴 앞섶을 움켜쥐었다.

“내 편은 아무도 없군.”

그의 한탄에 유안나가 혀를 찼다.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두 플로네 영애의 편이로군. 가슴이 좀 아픈 것 같으니 나는 쉬어야겠다.”

아스달은 실연을 당한 사람처럼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닦는 척했다.

그러더니 팀을 나눠 번갈아 가며 식량을 구하자는 제안엔 답도 하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눈치를 살피던 루제프가 슬금슬금 다가와 내 안색을 살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아스달 저하께선 어차피 영애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으셨을 겁니다.”

루제프의 말에 나는 다시금 아스달 왕세자란 사람에 대해서 떠올렸다.

‘아스달은 에녹과 너무 달라.’

아스달은 태생부터 고귀했고 저를 위협할 정도로 힘을 가진 형제도 없었다.

에녹이 밑바닥부터 시작해 올라온 황족이라면, 아스달은 처음부터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었던 왕족이란 소리였다.

그는 한 번도 꺾여 본 적 없이 오만했고, 또 그게 정답인 줄 알며 살아온 남자였다.

“아마, 저하께선 영애가 변했다는 것도 인정하지 못하실 겁니다.”

루제프는 답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설명을 했다. 아이를 달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