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61)화 (61/234)

“성녀님은 왜 그렇게 저희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는데 집착하세요?”

그 점이 계속 의문이었다.

뭔가를 결정해야 할 만한 안건이 생기면 우리는 회의를 진행했는데, 유안나의 발언권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유독 유안나에게 발언권이 많이 돌아가는 건 그녀가 주도권을 잡고 있어서라기보단, 그녀가 가진 ‘열쇠’라는 특수한 정보 때문이긴 했지만.

그리고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구성원 사이에서 잠깐 주도권을 잡는 게 딱히 의미가 없다는 걸 그녀 본인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재밌잖아요. 귀족들의 머리 위에 앉는 게.”

너무 직설적인 답변이다.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되는데.

유안나는 늘 그렇듯 웃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속을 모르겠는, 그런 얼굴 말이다.

귀족들의 머리 위에 앉는 게 재미있다니. 마거릿은 귀족이었지만, 현대인 이진주인 나는 그 말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맞아요. 저는 평민 출신이라 귀족을 싫어해요.”

내 미묘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유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내 옆에 서서 한참을 하품하고 있던 카이든이 나를 끌어안았다.

“마거릿, 그만하고 비누도 찾은 김에 우리 같이 씻으러 가자.”

“자연스럽게 X소리 하지 말고 저리 가.”

내가 카이든의 어깨를 밀어내자, 루제프와 에녹이 동시에 카이든의 양팔을 부여잡고 내게서 떼어 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유안나가 내게 제안을 했다.

“영애, 그럼 저랑 같이 목욕하러 갈래요?”

나는 그녀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턱을 괴고서 디에고를 슬쩍 흘겨봤다.

“아, 그런데 좀 걱정되네요. 목욕을 하는 동안 어떤 변태가 또 드레스를 훔쳐가진 않을지…….”

“아, 안 훔칩니다!”

나무꾼 디에고가 당황하여 소리치자 나와 유안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유안나와는 사고나 성향이 너무도 달라 함께 지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지만, 일단 같은 여자라는 유대감만은 끈끈했다.

나는 유안나에게 눈짓하며 오두막 밖을 가리켰다.

“갈까요?”

“네.”

유안나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랜만에 비누로 몸을 씻으니 굉장히 개운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건 비단 나만의 감상은 아니었는지 모두들 콧노래를 부르는 등 한결 나아진 기색이었다.

디에고는 땔감을 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루제프 주교가 과일과 버섯을 채집하기로 했다.

유안나는 오두막 정리와 식사 준비를 맡았고, 카이든은 오두막에 남아 짐을 지키기로 했다. 디에고와 아스달 왕세자는 믿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자연히 사냥과 주변 탐사는 나와 에녹이 함께하기로 했다. 그러자 아스달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플로네 영애가 사냥도 한다고?”

아스달이 작살을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나를 보며 손가락질했다.

“괜히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있는 게 어때? 영애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것 같은데.”

그러는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는 주제에. 아스달의 말에 에녹, 카이든, 루제프 주교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우리 대단하신 왕세자 저하는 뭐 한대?”

“글쎄요.”

존대인지 반말인지 모를 말로 카이든이 묻자 루제프가 곤란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마거릿이 구해다 주는 식량이나 축낼 생각인가 보지. 내버려 둬라.”

에녹의 마지막 빈정거림이 정점을 찍었다.

아스달은 살벌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유안나에게 붙잡혔다.

“저하. 자꾸 그렇게 딴짓할 거예요? 저를 도와준다고 하셨잖아요.”

유안나의 짜증 가득한 투덜거림에 아스달이 주춤거렸다. 이내 그는 화를 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뭘 도와 달라고 했지, 성녀님?”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으며 유안나에게 다가갔다.

“아, 그 두 남자가 왜 저한테 그렇게 절절 매냐고요? 잘못한 게 있거든요. 자기들 딴에는 미안해서 맞춰 주는 것 같아요.”

유안나와 함께 목욕을 하면서 그들이 왜 그러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이 이상의 설명을 해 주지는 않았다.

그래 뭐, 내가 에녹, 카이든과 함께 지내며 생사를 넘나들었던 것처럼 그쪽도 그쪽만의 어두운 사정이 있었을 테다.

나는 탄알을 가득 채운 조명탄을 드레스 주머니에 넣고 나무칼을 손에 들었다. 물고기를 즉석에서 손질해 오기 위해서였다.

폭탄도 챙길까 하다가 조명탄이 있으니 그냥 두기로 했다. 아나콘다를 해치우는 데 사용해서 남은 폭탄이 몇 개 없었다. 그러니 웬만하면 아껴 둬야지.

오두막을 나선 우리는 주변 탐사부터 하기로 했다. 탐사를 해야 사냥할 만한 장소를 물색할 수 있으니까.

에녹이 앞장서서 검으로 길을 가로막는 덤불을 베어 내며 전진하던 중이었다.

내가 먼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저 사람들과 지내는 거 말이에요. 열쇠 때문에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괜찮겠죠?”

아직까지 유안나가 뭔가 흉계를 꾸미는 것 같진 않았다. 또, 열쇠를 주웠다는 장소에 가 보고 유안나가 열쇠를 줍게 된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서야 판단이 설지도 모르고.

에녹이 흘끗 나를 돌아봤다.

“글쎄. 그대는 그대 할 일을 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생각을 하긴 해야죠. 생존의 문제인데.”

“……늘 하는 생각이지만, 정말 삶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강한 것 같군.”

에녹의 물음에 나는 뜨끔해서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놈의 ‘생존’ 소리를 지나치게 많이 한 것 같기는 해.

에녹이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삶에 대한 애착이라기보단, 이런 데서 죽고 싶지는 않은 거죠. 에녹은 안 그래요?”

내 반문에도 에녹은 답이 없었다. 어쩌면 마땅한 답변을 고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그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를 따라 자리에 멈춰 서서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밤하늘을 담아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흑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나를 바라보는 아득하게 깊은 금안이 보였다.

날카로운 콧날 아래 자리 잡은 매혹적인 입매가 그림처럼 곱게 비틀렸다.

“……삶에 미련은 없어. 하지만, 그대 때문에 내 인생관에 문제가 생겨 곤란한 참이긴 하지.”

그가 느릿한 동작으로 내 뺨에 닿을 듯 가까이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눈빛에 시선이 사로잡혀 꼼짝도 못 한 채로 나는 숨을 참았다.

“마거릿, 너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구석이 있어.”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제가요?’

나는 순간적으로 나온 반문을 삼켜 냈다.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고서 에녹이 내게 물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마거릿.”

에녹이 내게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대었다. 그러더니 고단한 숨을 뱉었다.

“그대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조각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단단하고 너른 어깨를 지나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쇄골이 긴장 섞인 호흡으로 인해 잠시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대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라니. 왜 이렇게 친밀하게 구나 했더니, 이제 알겠다.

에녹은 아직도 내가 ‘그를 미친 듯이 좋아하는 마거릿’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혹시 마음이 바뀌었나?”

황금색 눈동자가 혼탁한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내가 그대에게 부족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면.”

그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은 온도를 머금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무런 온기도 없는 그의 시선에 나는 온몸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확신을 줘, 마거릿. 응? 부탁이다.”

섬뜩하리만치 표정이 사라진 얼굴에 잠시 압도되어 나는 입만 벙긋거렸다.

에녹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까지 불안한가? 내가 혹여 떠나기라도 할까봐?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나는 오래도록 고민하다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녹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이 섬에서 단 한 명과 동행할 수 있다면, 그건 에녹뿐이에요.”

이 말은 한 치 거짓도 없는 사실이다. 나는 그만큼 에녹을 신뢰했다.

내 말을 들은 에녹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제안을 해 왔다.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우리 둘이 떠나는 건 어떤가. 이 섬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사탕을 주고 어린아이를 꾀어내는 사람처럼 그는 나를 회유했다.

에녹이 고개를 기울이고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