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나의 말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잠시 유안나의 질문을 곱씹으며 어디서부터 그 말을 지적해야 할지 고민했다.
“성녀님의 편을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황태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근위대장이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게 문제가 되는 거죠.”
내 말을 듣고서야 상황을 이해한 유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여전히 불량스러운 태도를 고수한 채, 팔짱을 끼고는 삐딱하게 에녹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래도 디에고 경은 내 사람이에요. 함부로 하지 말아 주세요.”
“디에고 경은 그대 사람이고 말고 하기 이전에, 란그리드 제국의 근위대장이다.”
“하지만 여긴 란그리드 제국이 아니죠.”
양쪽 입장 모두 이해가 됐다. 첨예한 기 싸움이었다.
“회의가 참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그때, 우리의 회의를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던 건빵 왕자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는 뒤늦게 회의에 참여할 마음이 들었는지 이쪽으로 느긋하게 다가왔다. 걸음걸이마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요지는 흐리지 말고. 논점만 말하자고. 성녀님, 그렇게 자꾸 다른 데 초점을 돌려서 회의 분위기를 흐리면 안 돼.”
아스달의 지적에도 유안나는 역시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었다.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그러다가 그녀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다시 에녹을 돌아봤다.
“아, 혹시…… 제가 깨어난 장소 근처에 탈출 게이트가 있었던 것 아닐까요?”
“흠. 그럴 가능성도 있지.”
카이든이 유안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추측이지만, 잠시 다른 데 초점을 두고 있었던지라 우리 모두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깨어난 장소가 이곳에서 먼가.”
에녹이 물었고 유안나는 야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멀지 않아요. 밤엔 위험하니, 낮 시간대에 주로 이동했는데 여기까지 오는 데 꼬박 이틀 정도 걸린 것 같네요.”
“답이 나왔네.”
카이든이 턱을 괸 채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일단 정찰대를 꾸려서 그쪽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카이든의 제안에 에녹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디에고, 그리고 성녀가 다녀오는 걸로 하지.”
잠깐, 그건 안 된다. 그들끼리만 떠나게 둘 순 없었다. 열쇠의 비밀에 관해선 나도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저도 갈래요.”
내가 손을 들고 말하자 카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럼 나도 갈래.”
다들 떠나겠다고 말하자 루제프가 아스달의 눈치를 살피더니 황급히 엉덩이를 달싹였다.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그는 아무래도 아스달과 단둘이 남아 있기 싫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
에녹이 고단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짜증스레 이마를 문지르며 좌중을 훑었다.
“다 같이 갈 순 없어. 인원을 다시 꾸리지. 나와 성녀, 그리고 마거릿이 함께 가는 걸로 하겠다. 나머진 오두막을 지켜.”
“인원 분배가 이상한데? 가려면 디에고 경이 가야지, 플로네 영애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녀를 데려간단 거야?”
저 건빵 왕자는 또 시작이다. 조만간 오두막 뒤로 따로 불러서 인생의 쓴맛 좀 보여줘야지 안 되겠는걸.
그런 허세 가득한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응급 상황에 대한 상황 판단과 대처는 마거릿을 따라갈 자가 없지.”
에녹이 나를 돌아본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게로 집중됐다. 나는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서 어깨를 움츠렸다.
왜. 뭐.
에녹이 양손에 깍지를 끼고는 느긋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검이라면 나 역시 디에고 경 못지않은 실력을 갖췄고. 그래서 나는 이 인원이 정찰대로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만하면 답이 되었나?”
아스달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사실 그는 나를 만나고 내내 시종일관 저런 태도였다.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눈초리. 거기다 의심 어린 시선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에녹의 주장에 이견이 없는 듯 보이자 아스달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알아서 하란 제스처였다.
그렇게 새 정찰대가 꾸려졌고 우리는 준비를 철저히 하여 나흘 뒤에 출발하기로 했다.
* * *
회의가 끝난 뒤, 우리는 각자의 할 일을 하며 바쁜 오후를 보냈다.
나는 사냥감 손질 후에 남은 잔뼈를 가지고 바늘을 만들기 위해 돌칼로 다듬고 있었다.
“뭐 해? 그건 어디서 났어?”
산책을 다녀왔는지 오두막으로 들어오던 카이든이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왔다.
“지난 베이스캠프 때, 사냥감 손질하고 남은 거 좀 모아 뒀어. 혹시 몰라서.”
“뭐 하려는데?”
“바늘을 만들어 보려고. 옷이 하나뿐인데, 찢어지면 곤란하잖아.”
“역시 섬마왕님. 최고야.”
“그딴 소리 집어치워.”
한참 카이든이랑 투덕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2층에서 유안나가 신이 나서 내려왔다.
“플로네 영애! 영애, 이거 봐요, 이거 봐.”
그녀가 내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네모난 고체 덩어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어? 이거 설마…….”
“비누인 것 같아요!”
유안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자 주방에서 물을 마시고 있던 디에고와 루제프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비누?”
카이든이 유안나의 손바닥에 있는 고체 덩어리를 들어서 냄새를 맡았다.
“향 엄청 좋다. 꽃향기 같은데?”
그가 내 코앞으로 비누를 들이대기에 나도 슬쩍 향을 맡았다. 정말로 꽃향기같이 예쁜 향이 풍겼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내 물음에 유안나가 손가락으로 2층을 가리켰다.
“제가 쓰는 방 창문 틈에 끼어있더라고요.”
마침 에녹과 아스달도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오두막 거실 가운데 모여 있는 우리를 보더니, 의아한 얼굴로 다가온다.
“다들 무슨 일 있나?”
아스달의 물음에 유안나가 비누를 흔들었다.
“비누를 찾았어요. 2층에서.”
“오?”
아스달이 유안나에게서 비누를 받아 향을 맡아 보더니 두 눈을 크게 떴다.
“나, 지금 좀 씻어야겠어.”
비누를 들고 그대로 튀려는 그의 손목을 에녹이 빠르게 낚아챘다.
“성녀가 찾은 물건이지 않은가. 허락을 구해야지.”
에녹은 아마도 뭐든 먼저 찾은 사람이 그것의 주인이라는 인식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찾은 조명탄과 화염 폭탄을 탐내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도 어쩌면 이 섬에서 지내면서 생긴 우리들만의 규범이겠지.
“쳇, 아쉽군. 이봐, 반황. 좀 놓지? 손목뼈 부서지겠군.”
아스달이 에녹에게 붙잡힌 손을 들어 보이자 그제야 에녹이 그의 손을 놓았다.
나는 아스달의 손목에 새파란 멍이 든 걸 보고 잠시 놀랐다. 그냥 잡은 것뿐이었는데. 역시 에녹의 완력은 대단하다.
“고마워요. 근데 이건 다 같이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돌아가면서 사용할까요? 일단 저도 무척 씻고 싶네요. 다들 같은 오두막을 쓰는데 좋은 향이 나면 더 좋잖아요.”
유안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음. 그래도 사용할 양을 정해 두는 건 어때요?”
내 물음에 유안나가 그럴 필요가 있냐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껴 써서 뭐 해요. 이런 건 어차피 소비성인데.”
“그래도 오래 쓰면 좋잖아요.”
“어차피 당장 내일 탈출하게 될지도 모르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아. 섬을 탈출할 길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걸 말해 줄 수도 없고, 애초에 유안나가 찾은 비누를 가지고 내가 왈가왈부하기도 애매한 것 아닌가.
“뭐, 결정은 성녀님께서 하시는 거니까요.”
내 대답에 유안나가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아스달과 디에고를 돌아봤다.
“영애가 내 맘대로 하라고 한 거 들었어요? 거봐, 영애도 인정했어. 이제 내가 리더야!”
대체 무슨 맥락으로 내려진 결론인지 모르겠다. 보고 있던 이들도 어이가 없었는지, 루제프가 먼저 유안나의 말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더 플로네 영애가 리더가 된 것 같습니다.”
“잠깐만요. 이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귀찮은 역할을 맡을 정도로 책임감 있는 사람 아니거든요.”
왜 자꾸 나를 걸고넘어지는 건데. 일단 나는 여차하면 혼자 도망쳐야 하는 사람인데.
유안나가 활짝 웃었다.
“거봐, 그럼 역시 나밖에 없잖아요.”
“성녀는 여기 황태자와 왕세자가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가만히 있던 아스달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유안나에게 물었다.
음. 여기서 신분 운운하는 건 좀 쓸데없어 보이긴 했다.
유안나가 아스달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와 잠시 눈싸움을 하던 아스달이 결국 먼저 시선을 회피했다.
대체 저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