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59)화 (59/234)

나는 허리를 숙여 조심스레 그것을 주웠다.

새하얗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알이었다.

“새알인가?”

“마물의 것일 수도 있지.”

카이든이 깍지 낀 양손에 뒷머리를 기대면서 느긋하게 대답했다.

“혹시 모르니 내려놓는 게 좋겠군.”

에녹이 중얼거렸다. 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럼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오두막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두는 게 좋겠어요.”

나는 오두막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들어가 알을 내려놓은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내가 돌아왔을 때는 오두막이 시끌벅적해져 있었다.

에녹, 카이든과 함께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난장판이 되어 있는 오두막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에요?”

가장 가까이 있는 루제프를 향해 물었다. 루제프가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나를 돌아봤다. 그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 영애는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습니다. 푸흡, 여기 있으면 좋지 못한 꼴을 봅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속옷 차림으로 2층에서 뛰어 내려오는 디에고를.

날 발견한 그가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양옆에서 커다란 손이 뻗어 와 내 눈을 가렸다. 에녹과 카이든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디에고 경.”

에녹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요란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와 우당탕탕 하는 시끌벅적한 소음, 그리고 카이든이 미친 듯이 박장대소하는 소리까지 아주 정신이 없었다.

“무슨 일인데요?”

“디에고 경이 옷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합니다. 근처 계곡으로 아침 목욕을 하러 갔는데 목욕하던 중에 옷이 사라지는 바람에 속옷만 입은 채로 여기까지 올라왔더군요.”

“아, 역시 그 일이었군요.”

난 참지 못하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이 치워지고 몸이 돌아갔다. 에녹이 나를 디에고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돌려 세운 것이다.

“마거릿, 설마…….”

에녹의 가느다란 눈초리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저도 아까 계곡에 좀 다녀왔거든요.”

내 말에 옆에 서 있던 카이든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웃음을 채 지우지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거릿 작품이었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루제프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슬쩍 루제프를 봤다가 그의 등 뒤로 속옷만 입은 커다란 애플 힙을 발견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 버렸네.

“그거 알아요, 디에고 경?”

나는 에녹을 향해 돌아선 채로 디에고가 들을 수 있게끔 목소리를 높였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어요. 자기가 한 대로 업보를 돌려받는다는 뜻이죠. 그러게 왜 기사도 정신은 땅에 버리고 여자 드레스나 훔치는 변태 짓을 하고 다녀요?”

“여, 영애께서 제 옷을 훔쳐 가신 겁니까!”

“제가 훔친 게 아니라, 경께서 뿌린 대로 거둔 것일 뿐입니다.”

나는 아주 능청스럽게 변명하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보는 에녹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으나 일단 너무도 즐거웠다.

“잘못했습니다.”

이어서 디에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아해서 등을 돌리려다가 에녹이 내 어깨를 꽉 부여잡은 탓에 디에고를 마주볼 수는 없었다.

“돌아보지 마라. 흉하다.”

에녹의 말에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고 카이든이 다시 한번 배를 잡고 웃었다.

“그땐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그날의 일을 되새김질하며 자책했습니다.”

이 섬에 있으면 제정신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건 딱 거기까지만.

“제 옷을 훔쳐다가 어디에 쓰려고 했는데요?”

“성녀님께 드리려고 했습니다.”

유안나에게?

“성녀님도 옷이 있으시잖아요. 멀쩡히 옷이…….”

그러다가 나는 문득, 유안나의 의복 상태가 나보다 조금 더 심각하게 너저분했던 걸 떠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남의 하나뿐인 옷을 훔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지.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왜 바로 사과하지 않으셨죠?”

나는 디에고를 돌아보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되물었다.

“그건…….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사죄를 드릴 타이밍을 보고 있었습니다.”

디에고가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잠시 그의 사죄를 들으며 고민했다. 사과를 거절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

하지만 역시 바로 사과를 받아 주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오늘 오후까지만 그의 옷을 돌려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타이밍 좋게 오두막 현관문을 열고 유안나와 아스달이 들어왔다

“다들 뭐 해요? 어머!”

유안나가 나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하더니 내 등 너머를 보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스달의 고함과 함께 2차로 디에고가 질타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모두에게 한 소리를 들은 뒤, 나는 저녁즈음이 되어서야 그에게 옷이 있는 장소를 알려 줬다.

디에고의 옷은 아스달의 침대 밑에 있었는데, 그래도 고상한 귀족이라 차마 왕세자의 침대 밑을 뒤져볼 생각은 못 했으리라.

“역시 마거릿은 재밌어.”

한 차례 해프닝이 끝난 뒤에 카이든이 디에고를 골려 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겠냐며 나를 회유했다.

“귀찮아.”

누군가를 골려 준다거나 복수를 하는 덴 상당한 시간과 정신을 쏟아부어야 하기에,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디에고도 적당히 알아들은 것 같고.

“아쉽네.”

카이든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하여간 쟤도 1절만 하는 법이 없다.

* * *

버섯으로 죽을 끓여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우린 회의를 열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았다. 고위 귀족들이 이렇게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회의를 하는 건 좀처럼 볼 수 없는 진풍경일 것이다.

처음에는 예의범절을 따지던 이들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 열악한 환경에 적응했다. 아마 시간이 더 오래 흐른다면, 서로의 신분조차도 무의미해지겠지.

부디 모두가 섬에서 탈출할 때까지만이라도 정신 줄을 붙잡고 있기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에녹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고개를 들었다.

회의는 국무 회의와 전술 회의로 다져진 내공이 있는 에녹이 진행했다.

아스달이 반박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아예 회의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듯, 시종일관 팔짱을 끼고 능청스럽게 웃으며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저쪽 일행도 썩 상식적인 인물은 없는 듯했다.

“짐작 가는 게 정말 하나도 없는 건가, 성녀.”

에녹의 날 선 목소리에 나는 상념을 접고 고개를 들었다. 에녹의 질책을 듣고도 유안나는 주눅 드는 법 없이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깨어났을 때 머리맡에 있었다는 거 말고는 저도 아는 게 없는걸요.”

에녹은 그런 유안나의 얼굴을 무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는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다소 묘한 기분으로 바라봤다.

에녹은 첫눈에 반하는 성격이 결단코 아니다. 원작 속에서도 그는 천천히 유안나에게 젖어 들면서 매료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지금도 그런 과정 중에 있는 거겠지?

에녹도 카이든도 루제프 주교도,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다가 이제 겨우 호의적인 태도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들이 앞으로 유안나의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나는 잊어선 안 된다. 방심해선 안 돼.

나는 에녹이 유안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유심하게 관찰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닌 건지, 아무리 관찰을 해 보아도 유안나를 바라보는 에녹의 시선은 마치…….

“탈출 게이트의 위치에 대해서도 모르고?”

에녹이 재차 유안나를 추궁했다.

아, 그래. 꼭 죄인을 추궁하는 것 같았다.

‘죄인이라.’

여주를 바라보는 남주의 시선이 저래도 되는 걸까?

“너무 몰아세우듯이 질문하시는 것 아닙니까. 성녀님께서 놀라셨습니다.”

디에고가 유안나를 감싸듯이 말했다. 물론 유안나는 전혀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에녹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디에고 경.”

에녹의 낮은 음성이 납덩이처럼 공기 중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디에고를 바라보는 에녹의 금안은 상대를 옥죄듯 위압적으로 빛났다.

그 숨 막히는 분위기에 나는 새삼 에녹이 제국의 황태자, 그것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투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섬에서 보인 경의 행동, 귀책 사유가 된다는 건 인지하고 있겠지.”

에녹이 손가락에 관자놀이를 기대고는 디에고를 바라보며 물었다. 디에고는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할 말이 있는 게 이상하지.

“제국으로 돌아가면, 직위 강등될 각오 정도는 해 두도록.”

에녹의 말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던 유안나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디에고 경이 제 편을 든 걸로 직위가 강등되는 건 지나친 권력 남용 같은데요.”

이상하게도 그녀는 에녹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공격적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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