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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57)화 (57/234)

그의 대답에 마거릿이 곤란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뭐, 그렇겠네요. 여긴 우리뿐이니 이미지 관리 안 해도 되고.”

그녀의 대답을 듣고 루제프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끝입니까?”

“네?”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 뭐, 비난을 한다던가, 위로를 한다던가…….”

“아…… 하지만 그걸 바라고 말씀하신 거 아니잖아요. 그냥 얘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셨던 거 아닌가요?”

그녀의 반문에 루제프는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녀의 말이 맞다. 실은 그녀가 무슨 반응을 해 주길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을 본 그녀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전 공감 능력이 좀 떨어져요.”

“정말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본인이 그렇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런가요?”

그녀가 민망하단 듯이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루제프는 어설픈 말로 조언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그의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속내를 고백한 상대가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마거릿 로즈 플로네라니.

“교황청에서 제가 본 플로네 영애와, 지금의 당신. 어느 쪽이 본 모습입니까.”

그래서 루제프는 문득, 그런 질문을 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마거릿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질문이 이상하네요. 둘 다 저예요. 전 과거의 저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녀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루제프 또한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테니까.”

밤하늘의 별빛이 폭포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래. 흐르고 있다는 건 어쩌면 그저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그의 마음이 녹아 움직이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지금의 모습이 그녀가 가진 본성이라면, 루제프는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진심이 그의 마음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루제프는 이 순간을 머릿속 깊숙이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애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게 맞는 것 같군요.”

그는 이제 그녀가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녀를 믿기로 결심했다.

“영애, 저는 앞으로 영애를 믿…….”

“잠깐만요.”

그리고 그가 막 그 말을 꺼내려고 할 때,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 긴장된 낯을 한 그녀가 숲속 너머를 노려보며 이번엔 검지를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쉿.”

그녀의 박력에 압도되어 루제프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숨까지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몸을 숙여요. 천천히.”

그녀가 손을 들어 느릿하게 아래로 누르는 동작을 보였다. 루제프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네?”

그를 흘끔 본 마거릿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어 넘어뜨렸다.

나무 덱을 등지고 넘어간 그의 어깨 위로 마거릿의 몸이 기울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마물이 지나가는 것 같아요.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어요. 잠시만 조용히.”

그녀가 그의 위로 올라타다시피 몸을 기울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루제프는 순간 열이 올라 뺨을 발그레 물들였다. 여성과 이렇게 긴밀한 접촉을 하는 게 처음이었기에 그는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몸에 힘을 줬다.

마거릿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온 신경을 숲속 너머로 고정한 채였다.

“……지나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이대로 있을게요. 혹시 모르니까.”

박력마저 느껴지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에 반드시 복종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마저 들어 루제프는 말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말을 여는 순간 콩닥거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쓸데없는 걱정도 들었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마거릿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루제프는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다소 허전함을 느꼈다. 아직도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불편했죠, 죄송해요. 저도 놀라서.”

마거릿이 그런 그를 보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루제프는 다소 멍하게 그녀의 듬직한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네요. 마물이 여기까지 올라올 것 같진 않은데, 아무래도 밤이라 밖에 있는 건 위험한 것 같아요. 들어가죠?”

그녀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다시금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마거릿이 영문을 모르겠단 듯이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루제프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저는 믿습니다. 영애를.”

그래서 부러 그런 말을 한 뒤, 저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까지 꺼내고 말았다.

“그리고 영애께서 저희를 이 섬에서 탈출시켜 주실 거라는 것도. 믿습니다.”

그녀라면 뭐든 해낼 것이다. 루제프의 가슴속에 그런 강경한 확신이 생겼다.

그의 마지막 말에 그녀가 매우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루제프는 어두운 달밤에 잠시 제가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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