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첫 번째 불침번 당번이었다.
양옆으로 카이든과 에녹이 자리를 깔고 잠들어 있었고, 에녹의 옆자리엔 루제프 주교가 누워 있었다.
디에고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왜 저렇게 안쓰럽게 누워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벽난로 가까이 앉아 멍하니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다가 디에고가 패 온 장작을 몇 개 더 가져와 꺼져 가는 불씨를 살렸다.
2층에는 벽난로가 없어서 추울 텐데……. 침대와 이불이 있으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졸음이 밀려와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오두막을 나왔다. 정신을 차리기 위함이었는데 썩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참에 나침반을 이용해 지도나 그려야겠다. 배낭에서 꺼낸 크로스백 안에는 마침 손바닥만 한 수첩과 볼펜도 들어 있었다. 아주 유용한 물건이었다.
오두막의 문을 열고 나오면 입구에 나무 덱가 있었다. 나는 그 앞 계단에 앉아 벙커 지도와 수첩, 나침반, 그리고 볼펜을 꺼냈다.
Bunker
섬의 북섬 방향에 표시되어 있는 벙커라는 글씨를 지그시 노려봤다.
‘알레아’도 그렇지만, 이것도 영어로 적혀 있었다. 어쩌면 알레아라는 사람은 서양인이고 이 섬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등장할 법한 실험용 섬이라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세계 사람들이 이 섬에 있는 게 말이 안 된다.
이쪽 가설을 세우면 저쪽이 말이 안 되고, 저쪽 가설을 세우면 이쪽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환장하겠네.’
나는 우선 벙커 지도를 보고 수첩에 지도를 따라 그린 뒤, 나침반으로 동서남북을 표시했다. 그리고 벙커 위치와 함께 오두막 위치를 그려 넣었다.
남섬에는 산이 두 개 있었다. 에녹, 카이든과 함께 지내던 산을 지나 다음번 산을 넘기 직전에 오두막을 발견했으니까,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섬의 중간즈음에 위치한 것 같다.
나는 천에 그려진 벙커 지도를 다시금 유심히 살피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이제 보니 남섬의 동쪽 끝자락에 북섬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오두막에서도 한참을 올라가야만 했다.
물론, 중간에 다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북섬과 남섬을 연결하는 다리표시를 지그시 노려봤다.
“이건 누가 만든 다리일까…….”
나는 턱에 볼펜을 대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튼 잘됐네, 동쪽까지 가려면 너무 머니까.”
나는 다리 위치까지 옮겨 그린 뒤 수첩을 닫았다.
“뭐 하십니까?”
“X발,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서 경기를 하며 일어났다. 덕분에 무릎 위에 올려 둔 물건들이 와르르 떨어졌다.
루제프가 나를 따라 놀란 얼굴을 하고는 멍하니 내 얼굴을 쳐다봤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영애는 무슨 귀족이 그렇게 욕을 차지게 하는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계단 아래로 떨어진 물건들로 향했다. 나는 황급히 물건들을 주워 크로스백 안에 넣었다.
‘지도를 본 건 아니겠지?’
나는 연기에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거짓말도 능숙하지 못하고. 이러다가 정말 모두를 납치한 범인으로 의심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괜찮으십니까?”
본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루제프는 별다른 내색 없이 내 안색을 살폈다.
“네, 네……. 괜찮아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왜 나왔어요?”
내 물음에 루제프가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잠자리가 바뀌면 원래 잠을 잘 못 잡니다.”
맙소사. 지금까지 계속해서 잠자리를 바꿔 왔을 텐데, 이 섬에서 제대로 잔 시간이 있긴 한 걸까?
그래서 그런지 루제프는 부쩍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한 떨기 백합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웠지만.
그러나 루제프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내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계단을 가리켰다.
“잠깐 앉아도 됩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세요.”
* * *
루제프가 눈을 떴을 때는 오밤중이었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비어 있는 자리는 마거릿뿐이었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 첫 번째 불침번 순서가 끝나지도 않았다는 거다.
마른세수를 하며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쉰 그는 옆자리에 누워 있는 카이든과 에녹을 쳐다보았다.
카이든은 세상모르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에녹은 눈을 감고는 있었으나 잠든 건 아닐 테다. 그는 언제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늘 신경을 곤두세우며 새우잠을 자는 편이었으니까.
‘플로네 영애는 어디 간 거지?’
정수된 물을 한 모금 마신 루제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두막 1층을 둘러본 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살피다가 오두막 밖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입구에 앉아 있는 마거릿을 발견했다.
거대한 초목 사이로 비추는 달빛 때문에 마거릿의 백금발이 새하얗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루제프는 홀린 듯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으나, 그녀는 무언가에 골똘히 집중을 하고 있는지 그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루제프는 그녀의 손에 들린 지도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섬의 지도인 듯 보였다.
“뭐 하십니까?”
“X발, 깜짝이야!”
그녀가 수첩으로 보이는 물건을 접으며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보다 더 놀란 건 루제프였다. 게다가 그녀의 걸걸한 욕설에도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영애는 무슨 귀족이 그렇게 욕을 차지게 하는지…….”
루제프는 그런 말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계단 아래로 떨어진 물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침반과 수첩, 그리고 정체 모를 막대기와 천 조각 하나. 마거릿이 황급히 물건들을 주워 작은 가방 안에 넣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뭘 그렇게 숨기려는 건지 모르겠다. 조금 전 보았던 지도? 그걸 왜 숨기려는 거지? 루제프는 흘끗 그녀가 품에 안은 물건들을 쳐다봤다.
확실히 마거릿은 유안나만큼이나 수상쩍은 구석이 많았다. 사람들이 한 번씩 그녀를 의심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신도 처음엔 그랬었으니까.
루제프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 괜찮아요.”
멋쩍은 얼굴로 대답하는 그녀에게 잠이 오질 않아 나왔다는 말을 해 준 뒤, 계단을 가리켰다.
“잠깐 앉아도 됩니까?”
마거릿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세요.”
루제프가 먼저 자리에 앉고 그 옆에 그녀가 쭈뼛쭈뼛 따라 앉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지그시 숲을 바라보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루제프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저희가 과연 이 섬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주변이 조용해서인지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도 또렷하게 울렸다.
마거릿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네. 탈출할 거예요. 그러니 우리 조금만 더 힘내 봐요.”
그녀의 확고한 대답에 루제프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저리도 굳세고 단단한 걸까.
그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때때로 그는 마거릿의 정신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애와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됩니다.”
나직한 고백 같은 말에 그녀가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안심이요? 저랑 둘이서만 있다가 마물 나오면 함께 저세상 열차 타는 건데요? 저보단 에녹이나 카이든 쪽이 훨씬 안심이 되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루제프의 물음에 마거릿이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시한폭탄을 안고 있어서 좀 무섭긴 하네요.”
“그리고 영애께선 그 시한폭탄을 다룰 수 있고요.”
“음.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마거릿이 재미있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 해맑은 웃음을 보며 루제프는 생각했다. 란그리드 제국이었다면 그녀에게 이런 얼굴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거라고.
그는 묘한 분위기 속에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속내를 조용히 털어놓았다.
“저는 사실 사람을 싫어해서 성직자가 됐습니다.”
“아…… 정말요? 하지만, 성직자가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나요?”
마거릿이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깊이 있는 관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성직자가 되고서 성가신 인간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 편했죠. 그런데 교리에서는 그러더군요. 인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베풀라고.”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속내를 꺼내고 나니 어쩐지 속이 시원했다.
“사실 이 섬에선 그런 척을 하지 않아도 돼서 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