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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55)화 (55/234)

에녹은 덤덤한 얼굴로 긍정을 표했다.

“그것도 추측 가능한 원인 중 하나겠지. 하지만 그것 외에도 짐작 가는 것들이 많아서 추론이 어렵군.”

결국은 또다시 원점이다. 눈치를 살피며 말할 타이밍을 보고 있던 루제프가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다 함께 탈출 게이트를 찾는 걸 목표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모두가 루제프의 말에 동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피로에 젖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덧 시야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추가로, 주기적으로 해변으로 나가 지나가는 선박이 있는지 살피는 것도 좋겠어.”

아스달이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구조 요청이 쓸모없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무척 말리고 싶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 리가 없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우우-

그때 아주 먼 곳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가 바짝 긴장을 한 채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자세한 얘기는 해가 뜬 뒤에 하죠. 오늘은 이만 자리를 정리하는 게 좋겠어요.”

유안나의 말에 모두가 동의한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마물들이 오두막 근처로는 올라오지 않는다고 해도 밤에 불을 피우는 건 위험하다.

결국 모두 후다닥 자리를 정돈하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 * *

우리는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여기서 ‘우리’는 나와 에녹, 카이든과 루제프를 말한다.

우리가 불침번을 서는 이유는 마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보다 유안나 일행의 도발을 막기 위함이 더 컸다.

그렇게 오두막 1층 나무 바닥에 낙엽을 깔며 잘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2층 계단을 밟고 내려오던 카이든이 나를 보며 위쪽을 가리켰다.

“2층에 있는 방 두 개 중 하나는 성녀가 쓴다던데?”

카이든의 말에 나를 도와 낙엽을 깔던 루제프가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하나는 왕세자 저하께서 사용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카이든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와락 인상을 구겼다.

“뭐야, 그럼 우리 마거릿은?”

멀리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디에고와 에녹이 의아한 얼굴로 우리 쪽을 쳐다봤다.

야밤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고 애초에 2층 방이라고 해 봐야 딱딱한 나무 침대 말고는 별게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카이든을 진정시켰다.

“됐어. 난 여기서 자는 게 안전할 것 같아. 너랑 에녹도 있고, 주교님도 있고.”

카이든의 눈썹이 추켜 올라가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 말이 썩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디에고와 에녹이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곧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무언가 의논하기 바빠 보였다.

나는 낙엽을 모두 깔고 그 위에 앉아 가만히 두 사람을 쳐다봤다. 무슨 대화를 저렇게 하는 거지?

“마물의 정보에 대해 공유 중인 것 같던데.”

턱을 괴고 옆에 앉아 나를 따라 에녹을 쳐다보던 카이든이 말했다.

“마물의 정보?”

“두 사람이 뭔가 거래를 한 모양이야.”

벽난로 앞에 앉아 나뭇가지로 장작을 들쑤시던 루제프 주교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카이든을 돌아봤다.

카이든은 미간을 좁히고는 에녹과 디에고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못해도 열댓 걸음은 떨어져서 속닥이고 있었는데 카이든은 저걸 어떻게 듣는 걸까? 소머즈야?

“디에고가 저쪽 사람들과 지내면서 알아낸 것을 황태자한테 보고 중인 것 같군.”

카이든이 그 말을 끝으로 혀를 찼다.

“그래,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디에고는 에녹 황태자의 사람이라는 거.”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저 나무꾼한테 복수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복수를 잘했다고 소문이 나려나.

카이든이 코웃음을 치고는 팔짱을 낀 채, 디에고를 넌지시 바라봤다.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기사지. 저거 보아하니, 성녀한테 단단히 빠진 모양이야. 황태자를 따르지 않고 성녀의 옆을 지키겠다고 말하네. 저 X끼 보통 미친 게 아니잖아? 제국으로 돌아가면 어쩌려고 저래?”

왕세자한테 씹X끼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카이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다가 자리를 잡고 누웠다.

카이든이 잠시 투덜거리더니 내 왼편에 누웠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던 루제프가 내 오른편 자리에 누우려고 할 때, 에녹이 등장했다.

“비키게, 주교. 거긴 내 자리다.”

에녹의 매서운 목소리에 루제프가 짜증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한숨을 내쉬고는 쭈뼛쭈뼛 그 옆자리로 고분고분 자리를 옮겼다.

나는 돌아누워 에녹을 올려다봤다. 그가 자리에 선 채로 소매 셔츠 단추를 풀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씨, 이렇게 아래에서 올려다봐도 굴욕 하나 없이 잘생겼다.

그가 천천히 내 옆에 앉아서는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내게 할 말이 있는가 보군.”

나는 몸을 일으켜 앉고 그를 마주 봤다.

“디에고 경과 무슨 얘기했어요?”

내 물음에 등 뒤에 누워 있던 카이든마저 부스럭거리며 돌아눕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녹은 한숨을 내쉬며 셔츠의 소매 자락을 접어 올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간 각자가 만났던 마물의 정보를 교환했다.”

카이든의 말대로다.

“우리를 공격했던 마물은 주로 늑대와 아나콘다 마물이지 않았나. 그런데 저쪽에서 마주친 마물들은 다르다더군.”

에녹의 말에 카이든이 몸을 일으키더니 흥미로운 얼굴로 내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루제프도 에녹 가까이 다가와서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디에고가 우리의 대화를 모두 들은 것 같지만, 이 정도 대화는 극비 사항도 아니었으니 공유되어도 문제는 없었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에녹은 신경 쓰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디에고의 말로는 거대 타란툴라형 마물과 사람의 형상을 한 짐승형 마물을 만났다고 한다.”

사람의 형상을 한 짐승형 마물이라니…….

그 말에 나는 문득, 몇 주 전에 카이든에게 쫓기다가 마주쳤던 마물을 떠올렸다. 사람처럼 두 발로 서 있었고 털로 가득 뒤덮여 있던 짐승.

“사람의 형상이라기보단 꼭…… 거대한 오랑우탄 같기도 했어요. 제가 카이든한테 쫓기다가 마주쳤던 그 마물이요. 그게 디에고 경이 말한 사람 형상 마물 같거든요.”

카이든이 무릎을 치며 내 말에 공감했다.

“아, 그거라면 나도 알아. 공격을 받았거든. 이게 바로 그놈 짓이고.”

그가 대뜸 셔츠를 올려서 가슴에 난 상처를 보여 줬다.

그의 말대로 내가 치료해 주었던 자리엔 깊은 상처가 남았다. 마력도 쓸 수 없으니 아마 상처를 지우긴 어렵겠지.

“……마물이 진화를 하는 것 같다.”

에녹이 짧은 침묵 끝에 덧붙였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지난번 에녹이 찢어발겼던 늑대형 마물들은 분명 진화하고 있었다.

-홀로 지하 창고에 들어온 지도 벌써 나흘째다.

아직도 나는 창고에 들어오기 직전에 벌어진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창고에 들어오기 직전에 나는 마물과 마주쳤다. 가까스로 도망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마물이 나타났다는 것보다 내가 더 놀란 건 마물이 나타난 시간대였다.

노을이 지고 있었지만, 분명 해가 떠 있었다.

그리고 창고에 들어오기 직전에 마주쳤던 거대한 크기의 타란툴라는 태양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것들이 진화를 하는 것 같다.-

정확하진 않지만, 분명 그런 내용이 있었는데.

소설 속에선 1권 마지막즈음에 그 현상이 시작됐다고 나온다. 그것도 유안나가 벙커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런데 우리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그 현상을 목격했다. 섬에서 깨어난 첫날, 나와 에녹은 노을이 지는 시간대에 마물과 마주쳤으니까.

불현듯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소름이 끼쳐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벌건 대낮에도 마물이 나오는 거 아니야?

“무기가 더 필요해.”

카이든이 미간을 좁히고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게로 시선이 집중되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물이 정말로 진화한다면, 지금 가진 무기로는 상대하는 데 한계가 있을 거 아냐.”

그 말이 맞다. 지금 가진 것들로는 부족하다. 조명탄의 탄알도 수류탄도 소비성이라 개수가 한정적이었으니까.

“마물이 감당 못할 정도가 되기 전에 열쇠에 맞는 ‘문’을 찾는 것도 시급하겠군.”

에녹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는 맞추기라도 한 듯, 2층 계단 위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저 위에서 유안나가 열쇠를 갖고 잠들어 있을 거다.

“열쇠의 비밀을 반드시 풀어야 해요.”

“섬의 비밀도요.”

내 말에 루제프 주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대체 이 괴상한 섬의 정체는 뭘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만 쌓여 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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