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짠 판이었다면, 이곳에 저는 없었겠죠. 뭐 하러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같이 고생을 하겠어요?”
아스달이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반박했다.
“실제로 죽을 고비를 넘긴 게 맞나? 과장하는 거 아니고? 이쪽은 진짜 생사를 넘나들었어. 역시 영애가 고생을 덜 해 봤군.”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우리가 고생했는지, 안 했는지 저가 어떻게 안다고 저런 말을 하지?
게다가 뭐가 됐든 자기가 한 고생만큼은 아닐 거라고 단정 짓는 대단한 꼰대 마인드에도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과장이라니, 난 몇 번을 뒤질 뻔했는데?”
옆에서 카이든의 섬뜩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은 그의 웃는 얼굴만 봤었는데, 오랜만에 광기가 들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와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죽을 고비를 넘겼던지라 그 역시 아스달의 발언에 상당히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아스달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카이든을 노려봤다.
“지금 그거 내게 한 소리인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구는 것 같은데, 로드. 그리고 내가 틀린 말했나?”
“예민? 지금 예민이라고 하셨습니까? 저하께서야말로 지금까지 인생 너무 편하게 사신 것 같은데, 죽을 고비 한번 넘기게 해 드릴까요?”
카이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아스달의 멱살을 잡았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나는 아스달에게 화낼 타이밍도 잊고 그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말리느라 바빴다.
물론 그것도 곧 에녹이 카이든의 뒷덜미를 잡아 옆으로 치워 낸 덕에 금방 끝났지만 말이다.
카이든은 흙바닥에 앉아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아스달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스달이 짜증스럽게 카이든에게 잡혔던 옷깃을 펴며 중얼거렸다.
“로드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내가 누군지 모르는가.”
“생존이 달린 상황에서 신분 따위는 쓸모가 없지.”
지금 카이든에게 신분과 권위, 그리고 예의범절을 운운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를 이해했다.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규율을 어겨야만 할 때가 많다. 그런 과정을 계속해서 겪다 보면, 사회적인 신분, 계급을 논하는 게 무의미해진다.
얌전히 눈치를 보던 루제프가 적당히 중재를 하며 우리 편을 들었다.
“저도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저하께서도 보셨어야 합니다. 그 아나콘다들은 정말로…….”
루제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회상하며 다시금 진저리를 쳤다.
“그 말이 맞다. 마거릿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무사하지 못했을 거다.”
에녹이 과장을 좀 보태어서 나를 추켜세웠다.
“뭐, 저희도 죽을 뻔한 건 맞아요. 거미 모습을 한 마물들에게 공격을 받았거든요.”
이번엔 디에고와 얌전히 앉아 상황을 관망하던 유안나가 아스달을 두둔하고 나섰다. 아스달이 팔짱을 끼고는 거보란 듯이 우리를 향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흘끗 본 유안나가 들고 있던 코코넛 그릇을 내려놓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다들 정황에 따라 추측만 할 뿐 범인을 좁히진 못하고 있잖아요. 실제로 범인이 있는 건지 아니면 우리 모두 어떤 사건에 휘말린 건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요.”
유안나의 말에 아스달이 눈치를 보다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저 오만한 아스달을 단번에 입 다물게 하는 건 봐도 봐도 정말 신기했다.
“그러니 지금은 서로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따지기보단 이 섬에서 탈출할 방법이 있는지를 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 이상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굉장히 논리정연하고 설득력 있게 말을 한다.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남주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생존’만을 생각한다는 점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때, 카이든이 입을 열었다.
“이것 또한 추측이지만, 난 섬에 탈출 게이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워프를 하는 데 일정 부분 마력이 소모되거든요. 이 섬이 다른 시공간에 있는 섬이고 그 탓에 우리 모두 상당히 많은 양의 마력을 소모했다고 하면 우리가 지금 마력을 못 쓰는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됩니다.”
“갑자기 이런 곳에서 눈을 뜬 것도 의심쩍고……. 워프를 한 것 같은데, 아니라면 탈출 게이트 같은 게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섬을 다 뒤져 볼 생각이야.”
카이든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가 그런 말을 했었다. 지금은 보다 구체적으로 추측을 하고 가설을 세운 모양이다.
카이든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물이 존재하는 걸로 보아 마력이 없는 섬은 아닐 텐데, 우리 중 누구도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정황상 워프를 했다고밖에 생각이 안 듭니다. 워프를 시켜놓고 마력 방출을 못하도록 임의로 막은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군요.”
“게이트로 워프를 했다……. 지금까지 들었던 추측 중에 가장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껏 얌전히 대화를 듣고 있던 디에고가 카이든의 추측에 힘을 실었는데, 에녹이 곧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게이트로 워프를 한 거라면, 성녀가 가지고 있는 열쇠는 어떻게 설명할 건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유안나에게로 집중되었다.
“성녀님께서 가진 열쇠에 ‘출구 열쇠’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지만, 그게 정말 이 섬을 나갈 수 있는 문의 열쇠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내 물음에 유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섬을 전부 돌아보자는 거예요. 이게 어떤 열쇠인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머리를 하도 썼더니 두통이 밀려왔다. 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유안나에게 되물었다.
“혹시 함정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만약 누군가가 의도와 목적을 갖고 저희를 납치한 거라면, 그 열쇠가 함정일 수도 있잖아요.”
“무엇을 위한 함정이요?”
“그건 알 수 없죠.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늘 염두에 두고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음. 맞는 말이네요. 영애는 보면 볼수록 탐이 난단 말이야. 정말 제 ‘부하’가 될 생각 없어요?”
유안나가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말에서 ‘부하’를 강조하는 걸 보아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인 모양이다.
“부하 될 생각 없으니까 입 다물어요. 다시 한번 밧줄에 묶이고 싶지 않으면.”
내 대답에 유안나가 재미있다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드는 점이 있다고 한 건 취소다. 아무리 봐도 카이든의 여자 버전 같다.
제국에서의 유안나였다면 아마도 내게 ‘부하’나 ‘시중’ 운운하지는 못했겠지.
다들 점점 서로 지키고 있던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깨며 미쳐 가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물론 거기엔 나 역시 포함됐다.
“탈출하는 방법이 꼭 게이트를 찾거나 열쇠에 맞는 문을 찾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때 에녹이 말했다.
“구조 요청을 하거나 아니면 직접 배를 만들어서 나가는 방법도 있어.”
“배를 만든다고요? 우리가? 마법도 없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카이든이 반문했다. 에녹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모두가 1과 2만 논하는 것 같아 보여 하나의 예시를 들었을 뿐이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할 일 없는 이 섬에서 못할 것도 없지.”
“그러게요. 사실 선택지가 너무 광범위해서 좁혀지지 않는 느낌이기는 해요.”
나는 에녹의 말에 대답하며 턱을 괴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지금 논의를 해야 할 게 열쇠뿐만은 아니었다. 현대의 물건이 왜 이곳에 있는 건지도 파악해야 했다.
“하긴, 영애가 주웠다는 마도구들 말이에요. 제국에선 본 적 없는 정말 특이한 물건들이던데, 대체 저런 것들은 왜 이 섬에 있는 걸까요?”
그때, 마치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유안나가 내가 주운 현대 물건들을 언급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조명탄을 꺼내 보였다.
“저도 이 물건들의 존재 이유는 모르겠어요. 여기 ‘알레아’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요. 제가 추측하기로는 이 알레아란 사람이 범인이 아닌가 싶어요.”
“알레아? 알레아가 누군지 아는 분 계신가요?”
내 얘기를 듣고 유안나가 좌중을 훑으며 물었다. 그러나 모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침묵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스달이 맞장구를 쳤다.
“어쩌면 이 오두막을 만든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정말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말할수록 오리무중이다. 점점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 헤매는 느낌이다.
그때, 아스달이 에녹을 향해 물었다.
“이봐, 반황. 누군가 원한을 갖고 저지른 일이 아니라면, 로말리잔 전투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