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스달이 기가 차다는 투로 카이든의 행동을 지적했다.
“란그리드 제국의 로드는 분명 플로네 영애를 혐오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별 희한한 광경을 다 보겠군.”
아스달이 신기해하는 것도 이해는 한다. 카이든이란 미치광이 캐릭터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나도 정말이지 적응이 안 됐으니까.
“저 새끼 정말 말 많네.”
아스달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카이든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네 목숨은 여러 개야? 왕세자한테 왜 그렇게 굴어. 섬에서 나가게 되면 어쩌려고?”
아무리 쟤가 건빵 왕자 같은 이상한 별명을 갖고 있어도 말이야, 일단은 왕세자다.
“알 게 뭐야.”
카이든이 신경질적인 투로 대꾸했다. 나는 더는 할 말이 없어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오두막은 버리고 가. 우리가 반격을 못 해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니거든.”
아스달 왕세자가 피곤한 얼굴로 우리를 향해 말했다.
조명탄과 수류탄까지 보유한 우리가 훨씬 우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들을 만만하게 볼 순 없었다. 루제프와 유안나까지 넘어가 있으니 수적으로도 우리가 불리했다.
상대방을 훑어보던 나는 루제프의 손에 내 구급 약통이 들려 있음을 깨달았다.
‘잠깐……. 구급 약통이 왜 저기 있지?’
아무래도 루제프가 무의식중에 챙겨 들고 간 모양인데, 왜 저게 저쪽으로 넘어가는 걸 인지하지 못했을까.
사실 이 섬에서 살아남는 데는 조명탄보다 구급약통이 더 중요했다. 상처 소독과 치료를 위한 약들이 다 저 약통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건 반드시 우리가 되돌려 받아야 했다.
건빵 왕자 일행에게 당황하고 초조한 티를 내면 안 된다. 협상의 기본은 상대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빠르게 표정을 숨겼다. 그리고 짐짓 태연한 얼굴로 아스달을 향해 말했다.
“루제프 주교님을 이쪽으로 넘겨요. 그럼 오두막은 두고 가도록 하죠.”
일부러 나의 목적이 루제프인 것처럼 말했다. 구급약통으로 시선이 돌아가게 해선 안 된다.
루제프는 제가 구급약통을 들고 있다는 생각도 못 하고 있는지, 그저 감격한 눈을 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보아하니 내게 엄청 감동이라도 한 얼굴이었다. 양심이 쑤셨다.
“기각한다.”
아스달이 팔짱을 낀 채로 거만하게 웃음을 지었다.
“뭘 협상을 해, 그냥 뺏어 버리지.”
카이든이 이를 드러내며 유안나 일행을 위협했다.
“로드, 가만히 있어라. 그런 태도는 일절 도움이 안 돼.”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에녹이 카이든을 향해 일침을 가했다. 카이든은 뒤늦게 내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다물었다.
“같이 하지 않을 거면 그냥 빨리 떠나요. 가져갈 건 충분히 가져가지 않았나요? 여기서 더 약탈을 하시려고?”
유안나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기가 차는 소리를 했다.
나는 그들 일행을 도발하듯이 턱을 치켜들고는 웃었다.
“약탈은 이게 당신들 것이었을 때나 성립되는 단어고요. 주인이 없는 물건이라면 그 물건을 소지할 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이 소유해야죠.”
내 말에 카이든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감탄사를 뱉었다.
“주교님을 보내 주실 생각 없으세요?”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자 아스달이 잠시 입을 다물고 나를 노려보더니, 디에고와 유안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루제프는 그들에게서 잠시 떨어진 채로 우리와 그쪽을 번갈아 보며 처량하게 서 있었다.
“아니면, 그냥 이거 태워 버리고.”
나는 오두막을 향해 조명탄을 조준했다.
“사실 우린 이 오두막이 꼭 필요하진 않거든요. 만들 줄 알아서. 하지만 그쪽은 필요할 것 같은데.”
마지막 내 말이 결정타였는지 아스달이 알겠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좋아. 주교를 넘기지.”
루제프는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아스달을 노려봤다.
“저한테 이러실 순 없습니다, 저하.”
우리 일행에게로 합류하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아스달이 자신을 미련 없이 떠나보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 기분 나쁠 만했지. 그래도 그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며 쌓은 정이라는 게 있을 텐데 말이다.
“미안하네.”
아스달이 영혼 없는 목소리로 루제프에게 사과했다.
루제프가 우리 쪽으로 완전히 넘어왔을 때였다.
“떠나기 전에 성녀님한테 궁금한 게 있어요.”
내 물음에 유안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제 시중을 들 생각이…….”
“탈출 열쇠, 지금 갖고 있어요? 열쇠는 어디서 난 거죠? 그 열쇠로 열 수 있는 탈출구가 이 섬 어딘가에 있다는 건가요?”
나는 유안나의 헛소리를 단칼에 끊어 내고는 질문을 퍼부었다.
내가 유안나와 열쇠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걸 모르는 에녹과 카이든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유안나는 내 질문을 받고는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턱을 괴더니, 내게 물었다.
“저랑 함께 지낼 생각 없죠?”
“네.”
“아쉽네요. 난 영애가 미치광이라고 해서 마음에 들었는데.”
그러는 너도 제정신은 아니잖아.
“함께할 생각 없으면 답해 줄 의무도 없죠. 내 사람도 아닌데.”
그건 맞는 소리긴 했다. 하지만 열쇠에 대한 건 원작엔 없던 내용이라, 꼭 확인해봐야 하는데.
소설에는 이 섬을 탈출할 수 있는 문이 1년 뒤에 열린다는 얘기만 있었지, 그 문을 열쇠로 열고 나간다는 얘기는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문’을 찾는다 해도 열쇠를 가진 유안나가 있어야만 탈출할 수 있다는 건가?
‘이 정도면 여기서 제일 수상쩍은 건 내가 아니라 유안나 아니야?’
아스달 일행은 열쇠에 관해서 이미 알고 있었는지 놀라는 기미가 없었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열쇠라니.”
에녹이 못마땅한 얼굴로 유안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유안나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저 웃었다.
“말했잖아요. 내 사람이 아니라면 알려줄 생각 없다고. 저도 조심해야죠. 상황이 그렇잖아요.”
에녹도 그녀의 말에는 할 말이 없었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나를 돌아봤다.
그러자 카이든과 루제프도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내게 의견을 구하는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마거릿.”
“난 네 의견에 따를게.”
“저도 따르겠습니다.”
에녹과 카이든 루제프가 차례로 말했다.
‘더…… 부담스러워졌어.’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머리를 굴렸다.
우린 유안나가 가지고 있는 ‘열쇠’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 뭘 계획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유안나의 시중을 들기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가? 오두막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도 필요 없다는 소리잖아.
“이보게, 성녀. 나는 얌전히 앉아서 저들과의 공생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 함께하고 싶다면 가진 걸 다 내놓으라고 전해.”
아스달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는 유안나에게 말했다. 그러자 유안나가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얼굴로 웃었다.
“어차피 함께하게 되면 저게 다 저희 건데요, 뭐.”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내가 시중을 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가진 걸 다 내놓으라니. 날강도야?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탈출 열쇠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그냥 떠날 수도 없고.’
숲을 등지고 서 있는 유안나, 아스달, 디에고를 마주 보다가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바위를 폭파해도 누구 하나 다치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선을 잠시 분산시키기엔 제격일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수류탄, 아니 화염 폭탄을 꺼냈다. 카이든과 루제프가 놀란 얼굴로 내가 하는 양을 쳐다봤다.
“여, 영애. 진정하세요.”
루제프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말렸다. 나는 개의치 않고 에녹을 흘끗 바라봤다.
“제가 뭘 하려고 하는지 알겠어요?”
내 물음에 에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카이든도 알아들었는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루제프만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구급 약통을 품에 안은 채 눈만 깜빡였다.
‘제대로 맞춰야 할 텐데.’
나는 폭탄의 안전핀을 이로 물어뜯고선 잠시 팔을 돌리며 준비 운동을 했다. 그리고 자세를 잡은 뒤, 들고 있던 화염 폭탄을 점찍어 둔 바위를 향해 냅다 던졌다.
“에녹, 카이든. 제압해요.”
콰아앙!
폭탄은 바위에 적중했다.
유안나 일행이 깜짝 놀라며 바위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이, 흙먼지가 자욱하게 깔렸고 에녹과 카이든은 날렵하게 각자 위치로 몸을 옮겼다.
“악!”
“이거 놔요!”
흙먼지 사이로 아스달과 유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찰나의 순간 방심을 해 버린 유안나 일행은 너무도 싱거울 정도로 우리에게 빠르게 제압당했다.
뭐야, 별것도 아니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