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과 마탑의 대립의 역사는 천년이나 된다.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다가 결국 크게 터진 것이 지난 신마 전쟁, 즉 신전과 마탑의 전쟁이었다.
현재 서대륙은 마력이나 신력을 가진 인구수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추세였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도 소중한 인력을 교황청과 마탑이 전쟁을 일으켜 낭비한 것이다.
신마 전쟁은 서대륙 중심에 있는 아네스 평원에서 치러졌는데, 당시 성기사단이 자신들의 홈그라운드인 서대륙 북부 성역 로말리잔으로 마법사들을 유인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마탑의 군대가 그 뻔한 술수에 속아 성역 로말리잔으로 향하며 대규모 사상자를 낳는다.
결국 보다 못한 란그리드 제국과 헤스티아 왕국이 그들을 중재하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했고 그 연합군의 지휘 사령관이 바로 에녹이었다.
“이봐, 반황. 그런 걸 왜 내겐 말하지 않았어?”
“말해야 하나.”
“그럼! 우린 아카데미 시절에 매일같이 싸울 정도로 절친하지 않았나.”
아스달이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매일같이 싸우는 게 절친한 거야……?’
이 세계의 절친 정의법은 내가 알던 것과 조금 다른 모양이다.
“전쟁 얘기는 나도 듣긴 했어. 동면을 하고 나왔더니, 갑자기 마탑이 전쟁을 치르고 있더라고.”
가만히 그 대화를 듣던 카이든이 말을 얹었다. 나는 황당해서 그를 돌아봤다.
“동면이라니, 네가 뱀이야?”
“어릴 적 신전에 납치되어 실험을 당했었거든. 그때 소실된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카이든의 말에 나는 당황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미안.”
“괜찮아. 그보단 계속 이렇게 대치 상태로 있을 거야?”
“그럼 나랑 에녹이 저 인간들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오두막에서 챙길 게 있는지 보고 올래?”
그가 얌전히 내 지시를 따라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는 기분은 조금 묘했다. 그건 카이든이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뜻과도 같았으니까.
‘어쩌면 공동의 적이 있어 뭉치게 되는 심리일지도 모르지.’
불현듯, 아스달을 경계하며 서 있던 에녹이 내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군.”
나는 에녹의 말이 조금 묘하게 들려서 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그제야 느릿하게 움직여 내게로 향했다.
“아직은 발작을 완전히 제어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 나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그대뿐이지 않은가.”
그건 그렇긴 하지. 아직 유안나는 에녹의 폭주를 막을 방도를 모르는 것 같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끝을 흐린 그의 부드러운 금안이 일순 거칠게 일렁였다.
“마거릿, 난 그대가 필요해. 그러니 부디 떠나지 말아줘. 부탁한다.”
에녹의 말에 이번에도 나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전에 카이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태자는 무슨 분리 불안이라도 있는 것처럼 너를 찾다가 미쳐 날뛰지…….”
카이든이 했던 말대로 에녹에게 분리 불안비슷한 성향이 생긴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에녹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 머리를 한 번 토닥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작살을 다시금 꽉 움켜쥔 그가 멀리 선 아스달 일행을 경계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쟁취한 배낭에 검이 꽂혀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에녹, 이거 써요.”
아스달 일행을 향해 조명탄을 겨눈 채 조심스럽게 배낭에서 검을 뽑아 에녹에게 건넸다. 에녹이 얌전히 내게서 검을 받아 들었다.
“저는 어차피 쓰지도 못하니까요.”
“고맙다.”
담백한 감사 인사를 전한 에녹이 곧장 작살을 버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역시 에녹에겐 작살보다 검이 어울렸다. 지저분하지만, 황태자 제복을 입고 검을 들고 서 있으니 태가 난다.
감탄하고 있을 때 에녹이 내게 말했다.
“오두막에서 지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군.”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나는 멀리 선 아스달 일행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오두막은 특별하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오두막 근처로는 마물들이 잘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작에서도 주인공들이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오두막이 아무리 좋다 한들 저들과 함께 지낼 순 없는 노릇이다. 다 함께 지내기엔 저쪽 일행이 너무도 공격적이다.
우리끼리만 오두막을 차지하려면 전투는 불가피해 보이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적에게 노출된 베이스캠프에서 지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죠. 쓸 만한 물건만 가지고 빠질까 봐요.”
나는 아스달 왕세자와 디에고를 ‘적’으로 분류했다. 우리를 위협했으니 적으로 표현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내 발언에 에녹은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두막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알아봐야 할 부분이 남아있었다.
“제가 열쇠를 갖고 있거든요. 탈출 열쇠.”
그게 무슨 말인지 유안나에게 물어보긴 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상황이 정리되면 떠나기 전에 그녀를 따로 불러야 하나?
그때 아스달이 상당히 거만한 얼굴로 유안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성녀님, 이쪽으로 오시죠.”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상황을 관망하던 유안나가 나를 흘끔 돌아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가볍게 윙크를 했다.
“잘 생각해 봐요. 우리랑 함께 지내는 거. 뭐, 사실 생각할 것도 없이 내 뜻에 따르는 게 좋겠지만.”
그런 말을 남긴 채 유안나는 여유롭게 아스달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말을 들은 에녹이 나를 쳐다봤다. 유안나가 한 말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이었다.
“자기네와 합치자는군요. 게다가 저보고 자신의 전담 시녀가 되래요.”
시중들라는 말이 그 말이지 뭐. 내가 한숨을 내쉬며 빈정거리자 에녹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그녀가 소설 속 주인공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명망 높은 공작 가문 영애인 마거릿이 평민 출신 성녀의 시중을 드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나?
‘이래서 원작에서 마거릿이 유안나를 싫어했던 걸까?’
마거릿 같은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에녹이 유안나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려던 찰나 아스달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제프 주교. 이리 와.”
아스달이 이번엔 루제프를 향해 손짓했다.
루제프가 조급한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여, 영애……?”
심지어는 나를 부르기까지 하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는 듯이 의견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니, 얘는 진짜로 내가 이 팀의 리더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뭘 꾸물거리고 있나, 주교.”
아스달이 짜증 가득한 말투로 재차 그를 부르자 루제프가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이동했다.
그렇게 유안나와 루제프가 모두 아스달 곁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사실 그들이 모두 아스달 일행에게 넘어갔다는 것보다 놀라운 건, 에녹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디에고가 여전히 저쪽에 버티고 서 있다는 거다. 정말 유안나에게 미치기라도 한 모양이다.
에녹 또한, 디에고의 태도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치 디에고가 그럴 걸 알고 있었거나 혹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마침 카이든이 오두막에서 나왔다.
“별건 없던데.”
그의 손에는 여성용 흰 운동화가 들려 있었다.
이어서 나는 그의 다른 손에 들린 손가락만한 은색의 네모난 지포 라이터를 발견했다. 경첩으로 뚜껑이 연결된 클래식한 디자인의 라이터였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라이터라니, 그것도 지포 라이터!’
지포 라이터는 일반 라이터와 달리 바람이 불어도 꺼질 일이 적어 이런 야생에서 쓰기 적합했다.
부싯돌 점화 방식이고 오일이나 기름을 채우는 원리라 다 쓰면 쓸모가 없어지겠지만, 살짝 흔들어 보니 기름이 가득 채워져 있는 듯했다.
나는 굳이 유안나 일행이 보는 앞에서 라이터의 불을 켜지 않고 얌전히 받아서 드레스 주머니에 넣었다.
다행히도 라이터의 쓰임새에 대해 아는 이가 없어, 아무도 내 행동을 수상쩍게 여기지 않았다.
“이건 여성용 구두인 것 같은데, 신기하게 생겼어. 신을래?”
카이든이 흰색 운동화를 보여 주며 말했다. 제국엔 운동화라는 개념이 없어서 구두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원작에서 나왔던 것처럼 정말로 오두막 안에 현대식 의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운동화도 있으니, 옷도 있지 않을까?
“마거릿, 신을래?”
카이든이 재차 내게 물었다. 내 발에서 조악한 나무 슬리퍼를 치우고 싶어 안달이 난 눈초리였다.
“신을래.”
“신겨 줄게. 넌 그거 계속 들고 있어.”
카이든이 아스달을 향해 겨누고 있는 조명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직접 신발을 신겨 주었다. 커다란 손이 내 발목을 한 번에 감쌌다. 카이든도 역시 손이 컸다.
내 발에서 나무 슬리퍼를 벗긴 그가 발바닥을 자신의 손으로 툭툭 털어 주기까지 했다.
그는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내 맨발을 어루만졌는데, 너무도 느릿하게 맨살을 매만져서 발이 간질거릴 정도였다. 고문하는 건가?
“나, 남의 발 만져 보는 거 처음이야.”
“만지라고 한 거 아니고 신발 신겨 달라고 한 거거든? 시간 없어, 카이든.”
“되게 부드럽다.”
카이든이 내 말을 무시하고는 한참 동안 내 발을 만지작거렸다. 이 X끼가……?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녹의 분위기가 숨 막히도록 험악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에녹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가락을 분질러 버릴까.”
진정해, 같은 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