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깜짝 놀란 내가 되물었지만, 유안나는 대답을 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랑 함께할 생각은 정말 없어요? 그럼 가방은 내가 가져가야겠다.”
“이봐요, 성녀님. 탈출 열쇠를 갖고 있다는 게 무슨 얘기인지 설명을…….”
내 말을 무시한 그녀가 내게 다시 손을 뻗었을 때, 루제프가 달려왔다. 그가 유안나의 손목을 낚아채서 그녀를 밀어낸 뒤에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 하십시오.”
“이러기 있어요, 주교님?”
내내 적당히 미소 짓고 있던 유안나가 미간을 좁히고 루제프를 노려봤지만, 루제프는 내 앞을 가로막은 채 미동도 없었다.
옆에서는 카이든과 디에고가 아직도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저렇게 싸우는데도 아직까지 누구 하나 피를 흘리지 않는 것도 대단했다. 엄청난 괴력을 가진 카이든을 상대로 제법 단단하게 버틸 정도라니 디에고도 보통은 아닌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에녹이 움직였다.
“그만들 하지.”
에녹은 카이든의 뒷덜미를 잡아서 뒤로 당기고는 디에고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에녹에게 맞은 디에고가 가볍게 날아가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
아니, 그만하자는 말이 왜 그렇게 과격해.
게다가 덩치도 커다란 근육질의 남자를 주먹질 한방에 날려 버렸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에녹을 쳐다봤다. 알고는 있었지만, 카이든이나 에녹이나 괴물 같은 힘을 갖고 있긴 매한가지였다.
“그만하고 일어나. 마거릿이 기다린다. 피를 보기라도 하면 곤란해. 아직은 내가 폭주 상태를 제어하는 게 불안정하거든.”
에녹의 말에 카이든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피를 보면 에녹이 발작할 텐데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유안나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그 생각을 못 했어.’
하지만 문제는 하필 그 타이밍에 디에고가 여기저기 피가 묻은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는 점이다.
“그냥 가시는 건 안 됩니다. 절 쓰러뜨리고 가십시오.”
디에고는 아무래도 자신이 란그리드 제국의 근위대장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어가는 듯했다.
사람보다 마물이 더 많은 이 무인도에서 지내다 보면 미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긴 하지만, 그래도 정신은 차려야 하지 않겠니.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에녹을 돌아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디에고를 바라보는 에녹의 금안에 은은하게 광기가 돌기 시작했다.
“자, 잠깐……!”
“위험합니다. 다가가지 마십시오.”
놀라서 그쪽으로 달려가려는데 루제프에게 금방 제지당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에녹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디에고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에녹의 상태를 눈치챈 건 아스달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조용히 에녹을 불렀다.
“이봐, 반황.”
그러나 아스달의 부름에도 에녹은 대답이 없었다.
디에고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에녹의 발밑으로 작살이 채였다. 걸음을 멈춘 그가 가만히 발에 채인 작살을 내려다봤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자못 섬뜩하게 느껴졌다.
에녹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나무 작살을 주워 들었다. 나는 루제프에게 팔이 잡힌 채로 에녹을 불렀다.
“에녹!”
물론 그에겐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잠깐만요, 에녹!”
한 번 더 그를 불렀지만, 에녹은 대답이 없었다. 아니, 아나콘다 나왔을 때는 알아서 잘만 제어하더니! 제어하는 것도 복불복이냐!
그가 천천히 디에고에게 다가갔다.
“전하.”
“왜 저래?”
디에고와 카이든이 차례로 당황하며 말했다.
에녹은 목을 죄는 셔츠 맨 윗단추를 손으로 풀어헤치고는 뒷목을 매만지며 뻐근한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피가 나는군.”
에녹이 꽤 심하게 피가 터진 디에고의 입술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디에고가 당황하며 자신의 입술을 만지는 사이 에녹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디에고는 그제야 에녹의 발작 상태를 눈치챈 것처럼 보였다.
에녹의 트라우마에 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란그리드 제국의 황제, 에녹의 측근, 그리고 황족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근위대 단장 디에고.
그렇게 소수의 사람만이 그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제국에선 적절히 그에게 진정제를 투여하며 관리를 해 왔던 것으로 안다.
그러니까 디에고 역시, 진정제 없이 에녹의 폭주를 마주하는 게 처음이라는 거다.
“진정하십시오, 전하.”
디에고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카이든이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에녹을 돌아봤다.
“뭐야, 왜…….”
카이든이 의아한 얼굴로 운을 뗐을 때였다.
느긋하게 움직이던 에녹의 걸음이 일순 빨라졌다. 눈 깜작할 새에 디에고에게 다가간 그가 디에고의 멱살을 잡고 나무 작살을 높게 치켜들었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꺄악!”
유안나의 비명이 울렸다.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는 에녹을 향해 소리쳤다.
“에녹, 그만해!”
작살을 내리꽂으려던 에녹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역시 ‘그만해’라는 통제어에 반응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작살을 쥔 에녹의 손이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쓰읍, 에녹. 하지 마.”
재차 반복된 통제어에 에녹의 몸이 움찔거리며 이번에는 완전히 멎었다.
왜인지 디에고는 그를 피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에녹은 한참 동안 같은 자세로 멈춰 있었다.
그러나 나는 디에고의 멱살을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걸 보았다. 어찌나 손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벌겋게 변한 손등에 핏대가 잔뜩 서 있었다.
에녹 본인도 자신의 폭주를 억제하려고 노력 중인 모양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그에게 말했다.
“잘하고 있어. 이제 그만해도 돼.”
에녹이 드디어 디에고의 멱살을 잡은 손을 천천히 풀었다.
작살을 쥔 에녹의 다른 손도 천천히 내려오고 있던 중이었다.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끝까지 긴장을 놓지는 않았다. 나는 박수를 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격려했다.
“옳지, 잘한다. 그만하자.”
결국 에녹의 양손이 모두 완전히 내려왔다. 손에 들린 작살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멍하니 바닥을 구르는 작살을 내려다보던 에녹이 느릿한 동작으로 나를 돌아봤다.
디에고를 노려보던 살벌한 낯이 완전하게 지워지고 한층 온순해진 얼굴이 보였다.
“제어했다. 그대 덕에.”
그가 조용히 내게 감사를 전했다. 이제야 평소의 에녹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나는 잠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녹에겐 여전히 내가 필요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니.’
언젠간 에녹이 트라우마를 치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은 그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게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다가 너무 조용해서 슬쩍 고개를 드니, 다들 당황한 얼굴로 나와 에녹을 번갈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카이든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대체 이게 뭐야?”
긴장이 풀려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카이든의 말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조명탄을 장전하고 해머를 당겨 내리며 아스달과 디에고를 향해 겨누었다.
“거기 두 남자는 일단 손들어.”
아스달과 디에고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나는 재촉하듯 한 번 더 조명탄을 흔들었다.
“손, 들어.”
조명탄의 위력을 보았던지라 그들은 망설이는가 싶다가 결국엔 손을 들었다.
“에녹, 카이든. 이리 와요.”
나는 아스달 왕세자와 디에고를 향해 조명탄을 겨눈 채, 에녹과 카이든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환한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곁에 다가온 에녹은 곧바로 내 손을 잡아당기더니 나를 유안나와 루제프 주교에게서 멀리 떨어뜨렸다. 루제프가 저를 밀어내는 에녹을 향해 서운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에녹은 사람의 피를 보면 폭주하거든요. 피 좀 닦아 주실래요? 다 같이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으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에고가 황급히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아스달은 얼떨떨한 얼굴로 디에고를 보다가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자신의 깔끔한 옷가지를 괜히 한번 훑어보았다.
유안나는 시종일관 팔짱을 낀 채 이 모든 난리가 너무 재미있다는 얼굴로 상황을 관망할 뿐이었다.
“뭐야, 지난번엔 안 알려주더니, 그때도 그런 이유였어?”
카이든이 나와 에녹을 보며 물었다. 나는 에녹의 옆얼굴을 흘끗 보고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이봐, 반황. 대체 언제부터 그런 거야? 옛날엔 그런 발작 같은 거 안 했잖아.”
아스달이 믿기 어렵다는 얼굴을 하고는 에녹을 쳐다봤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는 듯한 배신감도 어려 있었다.
“……전쟁의 후유증이다.”
에녹은 간단히 대답하며 내 손을 다시 잡아당겼다.
“아, 로말리잔 전투 말이지? 신마 전쟁 때의?”
아스달이 알은체를 하며 되물었다.
에녹은 말없이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