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말로 타이르듯 명령을 내린다. 역시 주인공인가 보다.
유안나는 분명 미소를 은은히 머금은 온화한 얼굴인데도 포스가 굉장했다.
게다가 아스달은 그냥 왕세자도 아니고 오만하고 자기애가 강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남자도 가볍게 다루는 저 여유로움이라니.
‘저건 좀 존경스러운데……?’
어떻게 하는 건지 그 비결을 물어보고 싶다.
“디에고 경. 저 가방 가져오게.”
아스달의 명령에 디에고가 움직였다.
젠장, 큰일이다. 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기만큼은 절대로 빼앗기면 안 된다. 게다가 저쪽은 검이 있는 상황이고 우린 아니지. 그러니 더더욱 양보할 수 없다.
나는 곧장 카이든과 에녹을 밀어내며, 주머니에서 조명탄을 꺼내 장전한 뒤 해머를 당겨 내렸다. 탄알은 아주 넉넉했다.
아스달이 그런 나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저 여자가 이상한 빨간 막대를 들고 뭘 하는 건가 싶겠지.
‘궁금하면 보여 줘야지.’
나는 하늘을 향해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붉은 연기가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올라가 하늘에 거대한 불꽃을 만들어 냈다.
펑! 퍼엉!
경험상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는 대낮에는 무슨 짓을 해도 마물이 나타나지 않으니 믿고 저지른 일이었다.
아스달과 디에고는 제가 본 걸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찡그렸다.
“이게 대체…….”
아스달이 경악하자 디에고가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지난번 그 마법이, 플로네 영애의 짓이었나 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아스달이 미간을 좁혔다.
“마녀인가? 저 여자 때문에 우리가 여기 납치된 것 같군. 어쩐지 란그리드 제국 때부터 미쳐 있기는 했어. 기어코 일을 쳤군.”
나는 아스달의 비난을 들으며 짜증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진짜 듣자 듣자 하니까.
“마법을 부린 게 아니고 마도구를 쓴 거예요. 저도 주운 거라고요!”
“글쎄, 그런 사정은 관심 없다. 디에고 경, 잡아.”
저 XX XX가.
나는 내게 다가오는 디에고를 향해 조명탄을 겨누었다. 디에고가 걸음을 멈췄다.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줘도 못 알아들었으면 됐고. 방금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 봤죠? 그걸 사람한테 쏘면 어떻게 될까요?”
하늘을 가리키며 묻자 아스달이 살벌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디에고도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알아들었으면, 입 닥치고 손 들어.”
두 남자가 잠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조명탄을 흔들어 보이며 인상을 구겼다.
“쏜다?”
그리고 내가 방아쇠를 당길 듯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아스달이 마뜩잖은 얼굴로 손을 들었고 디에고 역시 마지 못해 검을 집어넣고 손을 들었다.
그렇게 긴장을 놓지 않고 그들을 향해 조명탄을 겨눈 채로 천천히 가방 쪽으로 다가가던 중이었다.
잠시 눈치를 보던 디에고가 내 위협을 무시하고 다시 칼을 뽑으려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조명탄을 다시 쏘았다.
쿠궁 콰앙!!
불꽃을 정통으로 맞은 커다란 바위가 굉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런 일에 탄알을 낭비하다니……! 아무리 탄알이 넉넉해도 아까운 건 아까운 거였다.
‘하지만 무기가 든 가방을 빼앗길 순 없지.’
디에고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황급히 양손을 들었다. 꼭 말로 하면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나는 조명탄을 겨눈 채로 가방을 주워 등에 멨다. 마치 은행 강도 같은 모양새였지만, 일단 가방을 챙기는 게 우선이었다.
이런 것도 사실 해 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때, 디에고가 생각지도 못하게 움직였다. 그가 갑자기 몸을 숙여 바닥을 굴러버린 것이다.
놀라서 조명탄을 내린 순간 이번엔 아스달이 나를 향해 뛰어왔다.
물론 아스달은 내게 채 다가오지 못하고 에녹에게 가로막혔고 바닥을 구른 디에고는 카이든에게 걷어차였다.
“이 자식이……!”
카이든이 디에고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아무리 대단한 괴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숙련된 기사, 그것도 진검을 든 최연소 근위대 단장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전개가 이어졌다. 카이든이 생각보다도 더 단순하고 우악스럽게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디에고가 검을 쥔 손에 돌을 던졌다. 디에고가 진검을 바닥에 떨어뜨린 사이, 카이든이 그의 몸 위에 빠르게 올라타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싸움의 기술이고 나발이고 그냥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주 난장판이었다.
저 인간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유안나가 내게 다가왔다.
“플로네 공작 가문의 영애였군요. 마거릿이란 이름은 저도 들어 봤어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사로잡힐 만큼 예쁜 웃음이었다.
목에서 찰랑거리는 단발 때문인지 표정이 없으면 조금은 차가운 인상이기도 했는데, 말을 할 때에는 한없이 나긋나긋하고 친절해 보였다.
그러나 말할 때 옅게 묻어 나오는 카리스마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왜 원작 남주들이 그녀에게 목을 맸는지 알만한 대목이었다.
“제 머리가 신기한가요? 하긴, 귀족 영애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죠.”
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는 걸 눈치 채고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자연스러운 몸짓마저 대단히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유안나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귀족이 아니라서요. 반항하려고 잘랐어요. 덕분에 교황청 꼰대들이 기함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죠. 영애도 그 얼굴을 봤으면 무척 즐거워했을 거예요.”
아, 그랬었지. 그녀는 본래 평민이었다. 그것도 뒷골목에서 소매치기를 해서 먹고 살던.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성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억지로 교황청에 끌려가 성녀가 되며 모든 자유를 빼앗긴 것이다. 그 탓에 교황청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 가방에 뭐가 들었죠?”
유안나가 나른한 목소리로 내가 메고 있는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도 모르죠. 열어 봐야 알 것 같은데. 검이 들었다는 건 확실하네요.”
나는 가방 위로 나와 있는 길쭉한 검집을 가리키며 대답한 뒤, 조용히 조명탄을 들어 그녀에게 겨누었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 가방에 손을 뻗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을 줄 알았어요?”
“보기보다 눈치가 빠르네.”
내 물음에 그녀가 아쉽다는 투로 양손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성녀님!”
공교롭게도 내가 유안나에게 조명탄을 겨눈 걸 봤는지, 카이든과 주먹다짐을 하던 디에고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우리에게로 향했다.
“난 괜찮아요.”
유안나가 여유로운 얼굴로 웃으며 디에고에게 말했다.
아스달은 에녹에게 제지당한 이후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에녹은 금방이라도 내게로 달려올 것처럼 자세를 잡고 있었다.
“영애, 그 수상쩍은 물건은 어디서 났어요?”
유안나가 내 표정을 찬찬히 훑으며 내 손에 들린 조명탄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에게 조명탄을 겨눈 채로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주웠어요.”
“흠……. 그래요. 그건 그렇다고 넘어가고. 저는 영애가 좀 수상쩍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이 섬에서 깨어나게 된 게 영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러기엔 너무 스케일이 크잖아.”
그녀가 턱을 괴고는 고민하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내가 그녀에게 진짜로 조명탄을 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본인이 그런 것쯤은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거나.
뭐가 됐든 둘 다 나를 무시하는 처사여서, 유쾌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쩐지 그녀의 얼굴 위로 아스달이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자, 미치광이라는 공작 영애가 내 시중을 들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가 대뜸 내게 미친 소리를 던졌다.
“네?”
뭐야 이 또라이는?
“동의해 주신다면, 저 남자들을 말려 줄게요. 저 두 사람은 내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있거든요. 보아하니 그쪽은 영애께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 같으니, 나는 영애를 가지면 되겠네요.”
확실히, 카이든과 에녹이 내 의견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건 사실이지만…….
아스달은 아무래도 바지사장이고 저쪽 일행의 진짜 우두머리는 유안나였나 보다. 여주니까 예상 못 할 일도 아니었지만.
“제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비록 미치광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전 플로네 공작 가문의 일원이에요. 귀족이라고요.”
“여긴 제국이 아니잖아요. 섬 밖의 신분은 쓸모가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요?”
“이런 한정된 공간 안에서 단체 생활이라는 걸 하면, 자연스럽게 서열이 정해질 텐데. 그걸 좀 빨리 하자는 거예요.”
그건 또 무슨 개논리야?
“그게 성녀님의 시중을 드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요? 게다가 전 그쪽 일행과 단체 생활을 할 생각도 없어요.”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힘을 합쳐야 탈출 확률도 높아지잖아요.”
“글쎄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얘기가 있죠.”
“어머, 그거 아주 좋은 표현이네요.”
유안나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뭘까. 이 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정상적인 대화가 되질 않고 있는 느낌이었다.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원작에선 유안나가 이런 성격이라는 말은 없었잖아!’
분명 다른 남주들은 내가 알던 것과 같았는데, 유안나만 원작에서 묘사된 것과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소설이 유안나 시점에서 서술됐기 때문인가?
“……그럴 바엔 성녀님이 제 시중을 드는 게 어때요? 저는 남의 시중을 받는 게 익숙한 사람이지 시중을 드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아, 그건 곤란해요. 주도권은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내 발언권이 높아지잖아요.”
“성녀님의 발언권이 높아야 하는 이유는 뭐죠? 납득이 안 되는데요.”
“제가 열쇠를 갖고 있거든요. 탈출 열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