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열쇠를 쥔 사람
나는 카이든이 나뭇가지를 얽어서 만들어 준 가방에 폭탄을 옮겨 담았다. 폭탄이 부딪혀 터지지 않도록 나무 상자에 들어 있던 완충제로 탄체를 꽁꽁 감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제프가 물었다.
“영애는 대체 그런 마도구를 어디서 찾는 겁니까? 작동 방법을 금방 익히는 것도 신기하고요.”
“마도구는 우연히 주웠어요. 작동 방법은 이것저것 만져 보다가 알게 됐고요.”
루제프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 구태여 말을 얹었다가 말실수라도 할 바엔 침묵이 나을 것 같았다.
짐을 다 챙기고 우리는 다음 정착지를 찾아 여정을 떠났다.
당연한 거지만, 마땅한 정착지를 바로 찾지는 못해서 이틀 정도 야영을 해야 했다.
삼 일째 되는 날은 지쳐서 모두 말없이 걷던 중이었다.
홀로 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 오두막이 있을 법한 장소로 미리 봐 두었던 절벽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갈까요? 저 절벽 근처에 동굴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내 말에 세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거릿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저도 영애만 믿겠습니다.”
에녹과 카이든, 루제프가 차례로 대답했다.
아니, 왜 다 결정을 나한테 미루는 거야? 이러면 내가 이 팀의 리더라도 된 것 같잖아.
나는 결국 앞장서서 걸었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절벽 아래에서 <생존보다 중요한 것>에 등장했던 오두막을 발견했다.
정말 있을까 했는데, 섬을 오래 헤매지 않고 찾게 되어서 무척 다행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우리가 발견한 게 오두막뿐만이 아니었다는 거다.
나는 반대편 수풀 사이로 걸어오는 세 사람을 보고 멈춰 섰다.
연갈색 단발머리에 성직자 예복을 입은 여자 한 명, 짧은 밤색 머리에 근위대 제복을 입은 남자 한 명, 그리고 분홍 머리에 고급스러운 제복을 걸친 남자 한 명이 똑같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여주 유안나와 디에고 근위대장, 그리고 아스달 왕세자가 분명했다.
젠장, 인생은 역시 엿 같은 타이밍으로 이뤄져 있는 게 분명하다. 확실해.
‘도망가야 하나? 아니면, 오두막을 먼저 차지해 버려?’
“어머, 여자가 있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유안나였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는 무척 반가운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소설 속 유안나도 마거릿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같은 여자라고 좋아했지. 그녀를 싫어하고 괴롭혔던 건 마거릿 쪽이었다.
“위험해.”
내게 다가오려는 유안나를 아스달 왕세자가 막아섰다.
분홍색 머리를 가진 그의 얼굴은 무척 잘생겼다. 처진 눈꼬리 덕에 인상도 유순해 보여서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았을 것 같았다.
거기다가 이 야생에서도 주눅 드는 법이 없는 기품 있는 동작과 거만한 눈빛은 에녹과는 다른 분위기의 위압감을 풍겼다.
유안나는 아스달의 제지에 금방 흥미가 식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정확히는 아스달과 입씨름하기 매우 귀찮아서 물러났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아스달은 나를 노려보며 쐐기를 박듯이 한 번 더 말했다.
“내가 아는 여자야. 위험하니까 가까이 가지 마. 저 여잔 미치광이거든.”
아무리 마거릿이 정말 미치광이가 맞다고 해도 여기 사람들은 왜 다 하나같이 면전에 대고 모욕을 하는지 모르겠다. XX.
“그래요? 음…… 그러고 보니 신발도 좀 이상하고…….”
아스달의 말을 들은 유안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보다가 내 발밑으로 미묘한 시선을 던졌다. 내가 손수 만든 나무 슬리퍼를 발견한 모양이다.
나는 괜히 민망해서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아스달이 매우 공격적인 투로 내게 경고했다.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거기 그대로 있어.”
그 순간, 갑자기 두 팔이 내 앞으로 교차하더니 나를 엄호했다.
오른쪽에서는 에녹이, 왼쪽에서는 카이든이 각자 손을 뻗어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에녹과 카이든은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로 아스달과 디에고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에녹과 카이든은 여주인 유안나를 만났는데, 아무렇지 않은 건가?
하지만 그들은 미동도 않고 온 신경을 날 보호하는 데만 쏟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녹과 카이든에게 맞대응을 하려는 듯 디에고가 검을 빼어 들고는 우리를 향해 겨누었다.
아차, 디에고가 근위대장이라는 점을 깜빡했다. 무인도로 넘어올 때, 그는 남주들 중 유일하게 무장을 한 채로 깨어났다. 즉 검을 소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 나무꾼 XX, 드레스 도둑 주제에……!
디에고는 란그리드 제국의 근위대장인데, 왜 에녹이 있는 이쪽을 향해 검을 겨누는 거지?
“두 사람,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정보 교환하는 거 아니었어요?”
나는 에녹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에녹이 미간을 좁히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저런 것은 아니었다. 갈수록 말을 듣지 않는군.”
에녹은 마치 아끼는 학생의 엇나간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스승처럼 디에고를 쳐다봤다.
……디에고가 미쳐 있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거겠지.
‘젠장, 여기는 안 미친 인간이 없어.’
“주교님께선 왜 거기에 있는 겁니까.”
그때, 디에고가 내 뒤에 서 있던 루제프를 향해 물었다.
루제프가 뜨끔한 얼굴로 내 등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리 오지?”
아스달이 루제프를 향해 재차 손짓했다. 루제프는 잠시 아스달의 옆에 선 유안나에게 한 번 시선을 준 뒤, 다시 나를 돌아봤다.
그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아스달을 향해 걸어가며 연신 나를 돌아봤다. 마치 저를 잡아 달란 듯이 말이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에녹이 입을 열었다.
“내게 인사할 생각조차 없나 보군. 디에고 경.”
디에고와 아스달의 시선이 에녹에게로 꽂혔다. 루제프가 중간 즈음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디에고가 그제야 아차 싶은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뒤늦게 한쪽 무릎을 꿇고 가슴 위에 주먹 쥔 손을 올리곤 고개를 숙였다.
“란그리드의 광명을 위하여.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러자 아스달도 에녹에게 알은체하며 인사했다.
“그래. 나도 인사가 늦었지? 오랜만이로군, 반황. 자네가 여기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일세?”
반황이 뭐지? 나는 의아한 얼굴로 에녹을 올려다봤다. 에녹이 성가시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두 사람은 마치 서로를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두 사람이 어릴 적 친분이 있던 사이라는 설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는 자네야말로 이곳엔 어떻게 온 건가, 건방달.”
건방……. 뭐? 건빵도 아니고?
나는 괴상한 별칭에 더 유치한 별칭으로 응수하는 에녹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봤다. 굉장히 에녹스럽지 않은 말투였다. 에녹이 저렇게 유치하게 말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어?
내가 의문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자 에녹이 나를 흘끔 봤다.
“어릴 때 헤스티아 왕국 아카데미에서 유학한 적이 있다. 그 당시 헤스티아 왕족들이 저 녀석을 ‘건방진 아스달’이라고 불렀지. 건방달은 그걸 줄인 거고.”
그제야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건빵이란 말이죠?”
건빵 왕자라니. 재미있다.
“건빵이 아니라, 건방ㄷ…….”
내 물음에 건빵 왕자 본인, 아니 아스달이 반박하며 말을 하다가 현타가 왔는지 도로 입을 다문다.
“반황은 뭔데요?”
“반쪽짜리 황자라는 뜻이지. 지금은 반쪽짜리 황태자겠군.”
아스달이 굉장히 재수 없는 얼굴을 하고는 이죽거렸다.
반쪽짜리라니. 진짜 무례하네, 건빵 왕자 주제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란그리드 제국민들이 들었으면 난리가 날 게 분명한 발언이었다.
에녹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만한 건 여전하군.”
“왜? 여긴 제국도 왕국도 아닌데, 이런 말을 한들 누가 날 나무라겠는가.”
아스달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반황이란 소리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한단 소리다. 더 악질이네.
그러나 에녹은 아스달의 이죽거림 따위는 우습다는 듯이 무시했다.
“자네는 여기 어떻게 온 거지?”
“글쎄, 눈 떠 보니 이곳이었어. 반황, 자네가 우리를 납치하신 건 아니고?”
“내가 무슨 연유로 그런 짓을 해. 그러는 자네야말로 의심스럽군. 헤스티아 왕국의 계책은 아닌가.”
에녹과 아스달의 신경전이 계속됐고 멀리 서 있는 유안나는 아무렴 관심 없다는 듯 나무 기둥 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뭐가 됐든 이기는 편이 내 편이란 듯이 귀찮은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나는 흘끗 오두막을 쳐다봤다. 오두막 앞에는 주인 없는 커다란 배낭이 놓여 있었다.
배낭에는 이끼가 껴 있었고 젖어서 말라붙은 것처럼 보이는 낙엽들이 마치 한 몸처럼 붙어 있었다. 아마도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대체 저런 게 왜 저기 있는 걸까? 누가 가져다 놓은 거지?’
나는 배낭 안에 검집으로 보이는 검은 막대기가 반쯤 꽂혀 있는 걸 보았다. 모양이 언뜻 봐도 검집이었다. 그것도 기사들이 쓰는 장검.
이런 위험천만한 야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무기였다.
‘저건 반드시 우리가 가져와야 해!’
굳은 결심을 하고 배낭을 향해 발을 떼려는데, 디에고가 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에녹과 카이든이 경기를 하며 나를 동시에 끌어안았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건가, 디에고 경!”
“깜짝 놀랐잖아, 저 씹X끼가!”
두 남자는 정말 많이 놀란 모양이다.
디에고는 에녹이 나섰는데도 검을 거두지 않았다. 정말로 황태자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아스달이 여유가 넘치는 얼굴로 디에고 옆에 서서 배낭을 가리켰다.
“미안하지만, 그 가방은 우리가 먼저 발견했거든. 가까이 가지 마, 다쳐.”
“왕세자라고 봐주는 거 없으니까 우리 마거릿 위협하면 가만 안 둔다, 이 XX 같은 XX들아. X같이 굴지 말고 당장 꺼져, XX.”
카이든이 사납고 저급한 욕설을 줄줄이 뱉었지만, 아스달과 디에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쪽 분들이 안달 난 걸 보아 중요한 게 들어 있는 모양인데……. 저 가방은 우리가 꼭 가져와야겠네요, 그렇죠?”
얌전히 앉아 있던 유안나가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아스달과 디에고를 향해 말했다.
아스달과 디에고가 말없이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우리를 가리켰다.
“저쪽과 타협을 하든가, 그게 어렵다면 가방을 빼앗아 오든가, 둘 중 하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