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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44)화 (44/234)

그는 살짝 미열이 돌고 있어서인지 조금 퇴폐적인 낯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강렬한 눈빛 때문인지, 아니면 상대를 압도하는 그의 기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마 그를 밀어낼 생각조차 못 했다.

“네가 마거릿이 맞을 리가 없어.”

깨어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거라니.

내가 마거릿이 아님을 확신하는 그의 단호함에 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마거릿이 아니면 누군데.”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누구든 지금의 너로 남아 줘.”

‘지금의 나로 남아 달라니…….’

보아하니 카이든이 뭘 알고 하는 소리인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말이 내게 큰 위안이 된 것만큼은 확실했다.

“네가 그 마물들 죽이겠다고 뛰어 들어갔을 때, 나 진짜 미쳐 버리는 줄 알았어.”

카이든은 이를 악물고는 으르렁거리듯이 내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감정 조절을 못 해서가 아닌 것 같거든.”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함께 키스할 듯이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멍하니 쳐다봤다.

“어쩔 거야, 마거릿? 내가 정말 너한테 관심이 생겼다면.”

속삭이는 그의 말에 나는 사고가 정지되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숨만 삼켰다.

나는 일단 키스할 듯 다가오는 카이든의 입가를 손으로 막아냈다.

카이든은 잠시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곱게 눈웃음을 지으며 내 손바닥에 간질거리는 입맞춤을 남겼다.

“응? 마거릿, 대답해 봐.”

그가 내 손목을 붙잡고는 연신 손바닥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숨결이 손안에 담겨 간질거리는 느낌에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나는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빼냈고 카이든은 억지로 나를 붙잡지 않았다.

“어쩌긴 뭘 어째. 그런 애매한 말로 나더러 무슨 대답을 하라는 거야?”

나는 붙잡혔던 손목을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네가 여전히 날 의심하는 것도 변함이 없잖아.”

내 물음에 카이든이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우리 그냥 이 섬에서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자.”

여주를 향한 관심이 내게로 향한 것이든 아니든, 이 외딴섬을 탈출하고 나서도 과연 지금과 같을까?

카이든 블레이크 로하데.

지금이야 이 외딴섬에서 크게 힘을 쓰지 못하고 있지만 그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대단한 마법사이자, 마탑주였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과연 이 섬을 나가서도 그토록 경멸하던 마거릿을 좋아한다고 말할까?

흔들 다리 효과라는 게 있다.

사랑을 해서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심장이 뛰기 때문에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거다.

흔히들 여행지에서 이런 현상을 많이 겪지만, 지금 우리와 같이 극한의 환경에서 고난을 함께 겪어도 비슷한 현상을 경험한다.

게다가 카이든은 아직 여주 유안나를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카이든이 내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시기적절하게 루제프가 나타나 카이든을 내게서 떼어 냈다.

그는 내 앞을 가로막은 채, 아주 못돼 먹은 치한 바라보듯 카이든을 바라보며 나를 감쌌다.

“이 파렴치한 마법사가……!”

루제프가 한쪽 팔을 들어 보호하듯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마법사들은 예의란 것도 없는 겁니까?”

루제프의 말에 카이든이 팔짱을 낀 채,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염치없는 신관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로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 마법사 놈을 치료해 줬는지…….”

“치료 안 해 줬어도 난 살았을걸?”

카이든이 어깨를 으쓱이며 전혀 고맙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웬만하면 잘 죽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는 몸이거든.”

그럴 수밖에 없는 몸이라니?

“카이든, 그게 무슨 말…….”

“마거릿!”

나는 카이든이 뱉은 의미심장한 말에 관해 물으려고 했는데, 금방 깨어났는지 에녹까지 다가와 나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에녹은 잠시 나를 끌어안은 채,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내 양 뺨을 손으로 감싸고는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의 흑발이 이마 위로 잔뜩 흐트러졌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금안은 조급하게 나를 훑었다.

왼쪽 눈 밑에 있는 눈물점 때문인지, 아니면 그 역시 미열로 살짝 홍조가 돌아서인지, 오늘따라 그의 눈빛이 매혹적으로 보였다.

“다친 곳은?”

“없어요.”

“아픈 곳은.”

“없어요.”

“불편한 곳도?”

“괜찮아요. 정말로.”

그제야 그가 안심한 얼굴로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체취를 맡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대가 마물에게로 뛰어갈 때, 내 심경이 어땠는지 아나.”

에녹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마.”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옆에 앉아 있던 카이든이 짜증스레 대꾸했다.

“지금 여기 나랑 따까리도 있다는 걸 잊은 게 아니길 바랍니다.”

그제야 에녹의 시선이 카이든에게 닿았다.

이어서 카이든의 사나운 눈빛과 에녹의 살벌한 눈빛이 맞물렸다.

나는 두 사람의 신경전이 시작되는 걸 보고 황급히 중재했다.

“저는 괜찮지만, 두 분은 그렇지 않은 것 같거든요? 상태를 좀 체크해 볼게요.”

나는 구급 약통을 가져와서 카이든과 에녹의 상처를 차례로 살폈다.

루제프는 에녹과 카이든이 저에게 고맙단 소리를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인지 토라진 얼굴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러곤 저녁 식사를 할 때가 되어서야 풀린 얼굴로 과일을 조금 주워 먹었다.

나는 입맛이 없어서 과일을 미뤄 두고 낮에 만들다 만 신발을 완성하기 위해 잘라 둔 나무줄기들을 챙겨 왔다.

짚신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야지. 플랫 슈즈는 진짜 도저히 못 신겠다.

나무줄기의 껍질을 한 번 벗겨 내서 날카로운 부분을 반들반들하게 다듬으며 나는 에녹을 향해 물었다.

“주교님께 상황은 대충 전해 들었거든요? 그 마물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제야 에녹이 상념을 접고 나를 똑바로 마주봤다.

“아무래도 그 마물의 사체가 문제였던 것 같더군. 그것들이 냄새를 맡고 온 것 같아. 처음 나타났을 때, 사체 주위를 계속 배회하고 있었거든.”

루제프가 했던 말과 같았다.

정말로 루제프의 말대로 죽은 아나콘다 마물이 알을 품고 있었고, 그 마물이 죽는 바람에 암컷과 새끼를 지키려고 다른 마물들이 몰려든 걸까?

이건 제법 일리 있는 가설인데.

만약 정말로 배 속에 알이 있었다면, 그 알 속에 있는 새끼도 죽은 걸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일은 없으니 알 길은 없었다.

카이든이 턱을 괴고 앉아 무심한 얼굴로 포도를 따 먹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늑대형 마물들만 존재하는 줄 알았더니, 뱀이라니…….”

“보아하니, 다른 형태의 마물들도 존재할 것 같군. 노을이 지는 시점부터는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할 것 같다.”

에녹의 말에 나와 루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 그리고 피를 보아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나요?”

내 물음에 과일을 먹던 에녹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고민하는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군.”

“흠. 그래도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니 좋은 징조네요. 트라우마가 치료되는 걸지도 모르죠. 그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잘 생각해 봐요.”

얼른 트라우마 치료가 됐으면 좋겠다. 그가 폭주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기엔, 이 섬에서 우리가 피를 볼 상황이 너무 많았으니까.

나는 나무줄기를 엮어 매듭을 만들며 평평한 신발 밑바닥을 만들기 시작했다.

에녹과 카이든, 루제프가 괴상한 것을 보듯 그런 내 모습을 홀린 듯이 지켜봤다. 부끄럽게 뭘 그렇게까지 쳐다봐.

어차피 짚신 같은 탄탄한 신발 모양으로 만드는 건 절대 불가능하니, 슬리퍼 형태로라도 만들어 신을 수 있게끔 해야겠다. 현대 의복과 신발을 찾기 전까지만 어떻게 이걸로 버티면 되지 않을까?

“일단 다시 안전한 곳을 찾아 이사를 가야겠네요.”

내 말에 다시금 모두가 침묵했다. 그 강가의 오두막도 정말 힘겹게 지은 건데.

“대체 여기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카이든이 짜증 난다는 듯이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탈출 게이트에 대한 단서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어렵네요. 우선 전에 얘기했던 알레아란 사람이 표식을 남기는 것 같으니, 그 표식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카이든의 말을 듣다가 그들에게 다시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 말에 세 남자가 나를 쳐다봤다.

“알레아요?”

루제프 주교가 의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드레스 주머니에서 조명탄을 꺼내 그에게 보여 줬다.

“알레아란 사람이 이 마도구의 주인인 것 같아요. 이것 말고도 절벽 같은 곳에 알레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더라고요.”

루제프가 조명탄에 새겨진 알레아란 글자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구급약통도 그렇고 이것도 동대륙 언어인 겁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섬에서 탈출하면 동대륙 언어가 아니란 게 밝혀지겠지만, 적어도 이 섬에 있는 동안에는 밝혀질 일이 없다. 마땅히 생각나는 핑계도 도저히 없고.

“마거릿 말이 맞다. 우선 단서라도 찾는 게 시급할 것 같군. 지금까지 우리가 이 섬에서 찾은 거라곤 알레아, 이 한 단어뿐이었다.”

에녹의 말에 나는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든이 말한 탈출 게이트가 정말 있을지도 몰라요. 마도구도 있고 마물도 있는데, 이 섬에 다른 뭔가가 또 있지 않으리라곤 장담 못 하잖아요.”

내 말에 에녹과 카이든, 루제프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엔 한곳에 오래 정착하지 말고 이 섬을 전부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섬을 전부? 내가 산에 올라가서 봤는데 여기 생각보다 되게 커, 마거릿.”

그때, 카이든이 내 말을 반박하고 나서자 에녹이 다시 나를 두둔했다.

“나도 안다. 섬이 작은 크기라고 할 순 없지만, 필요하다면 해야 하지 않겠나.”

에녹의 말은 꼭 따라야만 할 것 같은 어떤 힘이 있었다. 군대의 지휘관이었으며, 한 나라를 이끌어 갈 사람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번엔 카이든도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일단 섬을 정찰하며 여기저기 뒤적여 봐야 숨겨진 아이템을 하나라도 더 획득할 수 있고 그러면 생존 가능성도 커진다.

그리고 탈출 게이트가 있다는 것도 없는 말은 아니니까.

비겁한 얘기지만 나는 벙커 지도에 관해서 여전히 함구했다. 그건 정말 나의 마지막 카드니까.

“마거릿의 말이 맞다. 뭐라도 해야지.”

에녹의 대답에 모두가 긍정의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다음 날, 피난처를 찾으며 겸사겸사 섬을 탐험하기로 했다.

나는 드디어 슬리퍼를 완성해서 신었는데, 내가 보기에도 조금 그럴듯했다.

내 맨발을 보고 세 남자가 얼굴을 붉혔다는 건 모른 척하자.

비 오는 날 신는 샌들 같고 좋은데, 왜. 그리고 너희는 남자라서 활동하기 편한 신발들을 신고 있었잖아. 나는 플랫 슈즈였다고, 플랫 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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