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43)화 (43/234)

10. 흔들 다리 효과

아나콘다를 해치우고 독가스를 피해 어떻게 이동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카이든의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려서 숲속 어딘가로 피신했다는 건 알겠는데…….

부옇게 흐려져 있던 시야가 느릿하게 초점을 맞췄다.

먼저 보인 것은 넓적하고 커다란 나뭇잎이었다.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나뭇잎이 흔들리자 그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아 다시 뒤로 엎어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슬쩍 돌리자 부드러운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곱게 눈을 감고 있는 카이든의 얼굴 전체가 시야에 담겼다.

나는 잠시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럼에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깊게 잠이 든 건지, 아니면 쓰러져서 일어나질 못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이든을 살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카이든의 옆으로는 에녹이 누워 있었다. 난 조용히 그들 코에 손가락을 대고는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고른 숨을 쉬는 것 같아서 그제야 안도했다.

우리는 거대한 나무뿌리 아래에 옹기종기 누워 있었는데, 커다란 나뭇잎이 나무뿌리 입구를 가리고 있었다.

산짐승이나 마물에게 노출이 되지 않도록 누군가가 나뭇잎으로 덮어 놓은 것 같았다.

나는 나뭇잎을 치우고 나무뿌리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둔탁한 무언가가 흙바닥을 나뒹구는 소리가 들려왔다.

툭, 투둑, 툭. 바닥엔 코코넛이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그 앞엔 루제프가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플로네 영애……?”

아, 루제프는 다행히 무사한 모양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놀라는 거지?’

그는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더듬더듬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뻐근한 목을 돌리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나요? 조금 어지러운 것 빼곤 괜찮아요. 푹 자서 그런지 몸이 개운하네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제프의 새하얀 뺨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의 청초한 회색빛 눈동자에선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의 턱 끝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보며 잠시 당황했다.

“다행입니다. 영애께선 이틀 만에 깨어나셨습니다. 아마도 독가스의 영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이틀 만이요?”

너무 놀라서 되묻자 루제프가 처연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도, 황태자 전하께서도 사경을 헤매며 깨어나지 못한 지 벌써 이틀째입니다.”

그가 이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였다.

상황이 이런데도 청초한 미인이 그러고 있으니 안타까워서 손수건이라도 내어주고 싶은 심경이었다.

“저는…… 저는 정말로 모두 죽는 줄 알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나는 카이든과 에녹을 다시 돌아봤다. 그냥 잠든 게 아니라 정말로 쓰러진 게 맞았던 모양이다.

놀라서 그들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들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많았는데, 조금 깊은 상처들은 새하얀 천으로 둘둘 감겨 있었다.

아마도 루제프가 응급처치를 한 모양이다. 하긴, 그는 신관이었으니 치료술 정도는 기본으로 익혔을 테다.

“영애의 약통은 뭐가 무슨 약인지 알 수가 없어서요. 제가 아는 지식으로만 응급처치를 했는데…….”

나는 그제야 에녹과 카이든의 머리맡에 놓인 구급약통을 발견했다.

그 옆으로는 화염 폭탄이 든 나무 상자도 있었다.

나는 가만히 카이든의 뺨에 손을 얹었다.

미열이 있었는데 아마도 초반에 들끓던 열이 조금 내려간 게 아닌가 싶었다. 상태가 호전되어 가는 중이라면 좋겠는데.

나는 에녹의 열도 체크하고 마찬가지로 미열이 있는 걸 확인하다가 루제프를 돌아봤다. 그는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코코넛을 챙기고 있었다.

“왜 일행에게 돌아가지 않았어요?”

내 물음에 루제프가 울컥한 얼굴로 나를 원망스레 쳐다봤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냐는 듯한 시선이라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격하게…….

“다친 사람을 두고 제가 어떻게 떠납니까. 모두 이렇게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그제야 나는 그가 신을 모시는 선량한 사제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소설 속에선 신도 잊고 여주랑 이런 짓 저런 짓 많이 하길래 잊고 있었지 뭐야.

이틀 동안 세 명의 부상자를 돌보는 건 제법 힘든 일이긴 했을 거다. 거기다가 셋 모두 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는 상태였으니까.

카이든과 에녹은 심각한 상처를 입어 목숨이 위태로웠을 텐데 아직 무사한 걸 보니, 루제프가 제법 신경 써서 그들을 돌본 것 같았다.

“고생했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내 말에 루제프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더니, 다시금 눈물을 뚝뚝 흘렸다.

꼬르르륵.

그때 그의 배 속에서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요란함에 놀라서 그에게 물었다.

“설마, 이틀간 굶은 건 아니죠?”

그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산딸기나, 블루베리 같은 과일로 배를 채우긴 했습니다.”

나는 결국 잠시 쉬며 기력을 좀 더 회복한 뒤, 근처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아 왔다.

나 역시 이틀간 아무것도 먹질 못해서, 정신을 좀 차리니 허기가 몰려와 몹시 고통스러운 참이었다.

루제프에게 불을 피우고 있으라고 한 뒤, 물고기를 잡아 왔는데 루제프는 그때까지도 불을 피우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아직도 불도 못 피웠어요? 지난번에 불 피우는 법 알려 드렸잖아요.”

내 물음에 루제프가 난감한 얼굴로 대답도 못 하고 허둥댔다.

“그게…… 눈으로 본 것과 직접 해 보는 건 다르지 않습니까.”

루제프가 양손을 꼼지락거리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쌍하게.

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직접 불을 피우고 모닥불을 만들어 물고기를 나뭇가지에 꽂은 뒤 구웠다.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물고기를 루제프에게 먹인 뒤에야 쉴 수 있었다.

“그 마물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거였어요?”

나는 모닥불 앞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며 루제프에게 물었다.

그는 아주 우울하게 가라앉은 낯으로 잠시 침묵하다가 한참 뒤에서야 입을 열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로드와 오두막 안에서 다투며 짐을 싸고 있던 와중에 황태자 전하께서 급하게 나오라 부르시는 소리에 나갔더니…….”

그가 기도하는 모양으로 손을 모으더니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그놈들이 전날 죽은 마물의 사체 주위를 배회하던 걸 봤는데, 아마도 그 사체 때문에 마물들이 몰려든 게 아닌지……. 일단 제가 추측하기로는 그렇습니다.”

“카이든이 그 전날 죽인 마물이 뭘 먹고 있었다고 했거든요? 그게 뭔지 알아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뭘 먹고 있었다기보다는 뭘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뭘 준비해요?”

“글쎄요. 알이라도 까려고 했었는지도 모르죠.”

알을 까려고 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다.

루제프 주교는 그 이상은 아는 게 없어서 더 자세한 상황은 에녹에게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에녹과 카이든이 무척 걱정되어서 결국 잠은 못 자고 꼬박 밤을 새우며 루제프와 함께 그들의 상처를 살펴야만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다음 날, 카이든이 먼저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나부터 찾았다.

그때, 나는 얇게 자른 나뭇가지를 꼬아 짚신 같은 신발을 만드는 중이었는데(정확히는 슬리퍼지만), 등 뒤에서부터 커다란 손이 뻗어져 나와 나를 끌어안았다.

“마거릿.”

너무 놀라서 그만 나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제기랄, 거의 다 만들었는데.’

어깨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간질거리게 맨살을 쓸었다.

“마거릿…….”

카이든의 애처로운 음성에 나는 몸을 돌려 앉았다. 그는 이제 막 깨어난 참이라서인지 몽롱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깨어난 줄 몰랐어. 몸은 괜찮아?”

그가 이내 고개를 숙이곤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저 그 자세로 내게 기대어 쉬는 듯했다.

그래. 이제 막 깨어난 거라 정신이 없을 수 있겠다. 나는 가만히 그를 내버려 뒀다.

“너 진짜 마거릿 아니지.”

그런데 그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차분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적안은 핏빛처럼 붉은 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꼭 루비처럼 예쁘게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한 말에 몸이 빳빳하게 굳어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엔 넌 정말 다른 사람 같거든.”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더니, 뒷머리 사이로 손가락이 얽혀 들어왔다.

그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서로의 코끝이 살짝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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