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42)화 (42/234)

결의에 차서 상자의 뚜껑을 들었는데, 덜그럭거리며 경첩과 함께 걸쇠가 바닥에 한꺼번에 떨어져 버렸다.

덕분에 무리 없이 상자를 열었고 나는 그 안에서 폭탄 더미를 발견했다.

“세상에나…….”

미쳤다. 이거 작동은 되는 걸까?

작고 동그란 폭탄은 언뜻 봤을 때는 정말로 수류탄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아니었다.

탄체 위에 안전핀이 꽂혀 있었는데 문제는 일반적인 수류탄과 달리 안전 손잡이가 없었다.

※주의※

핀을 뽑고 목표물에 던지기

충격이 가해지면 폭발

던지고 엎드리시오

탄체 겉면에 란그리드 제국어로 그런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것 역시 내가 주운 조명탄처럼 인위적으로 개조한 흔적이 보였다.

“알레아 짓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일단 상자를 닫고 화염 폭탄이라는 걸 챙겨 들었다.

오두막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생각보다 멀리 나와서인지 해가 저물 것 같았다.

나는 커다란 상자를 양손으로 받쳐들고 얌전히 오두막으로 복귀했다.

정확히는…… 얌전히 복귀하려고 했다.

나는 오두막 근방이 아수라장이 된 것을 발견하고 놀라서 자리에 멈춰 섰다.

콰아아아아앙!

요란한 굉음이 절벽을 타고 온 하늘을 뒤덮었다. 거대한 아나콘다가 절벽에 부딪히고는 쓰러졌다.

나는 나무 상자를 든 채, 멍하니 무너지는 절벽을 쳐다보았다.

맙소사.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소설 속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고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오두막 앞에는 거대한 몸집을 한 아나콘다형 마물이 세 마리 정도 있었다.

“비켜!!!”

크와아아악!!

에녹과 카이든이 무기를 들고 날아다니다시피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루제프가 열심히 짐을 옮겨 나르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봤다. 처음 늑대형 마물들을 마주쳤을 때와 같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나콘다 마물이 있는 강가는 하늘을 가리는 장애물도 없이 밝았다.

‘제길, 마물은 어두울 때만 나타나는 거 아니었냐고!’

마물의 머리는 카이든을 한입에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카이든은 그런 마물의 몸 위에 올라가 은색의 비늘 위로 작살을 꽂아 넣었다.

그러는 사이 다른 마물이 그의 등 뒤에서 커다란 입을 쩍 벌린다. 멀리서 또 다른 마물을 상대하고 있던 에녹이 이를 눈치채고 달려왔다.

그는 곧장 들고 있던 작살을 마물의 주둥이 아래에서 위로 꽂아 올렸다.

검도 아니고 고작 나무 작살이다. 마물을 상대하기에는 심히 볼품없는 무기였는데 카이든과 에녹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두 마리의 아나콘다 마물을 쓰러뜨리고 한 마리의 마물만 남았는데, 강가에서 머리를 들이밀고 나오는 또 다른 아나콘다들이 보였다.

미쳤어. 대체 갑자기 왜 이렇게 많은 마물들이 몰려드는 거지? 뭐가 문제였지? 내가 뭘 놓치고 있었던 걸까.

에녹과 카이든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피의 양을 봐서는 에녹이 아마 발작을 시작했을 것 같아서 더 큰일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뚜껑을 열고 폭탄의 개수를 살폈다. 폭탄은 총 열세 개였다.

내가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인데, 폭탄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사나이들이 군사 훈련을 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즐겨 봤던지라 수류탄의 사용법은 안다. 연예인들이 새로 받는 훈련이 있을 때마다 해당 훈련 내용에 대해 검색해 보곤 했으니까.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제는 당연히 다르다. 베테랑 군인도 긴장하게 만드는 무기가 바로 수류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게 보통 수류탄이 아니라 내가 가진 조명탄처럼 수류탄을 개조한 무기였다는 거지만.

나는 일단 주머니에서 조명탄을 꺼내 탄알을 다시 살폈다.

조명탄 탄알은 총 네 개가 남았다. 여분의 탄알이 든 주머니는 오두막에 있어서 당장에 사용할 수 있는 탄알이 이것뿐이었다.

이어서 폭탄을 던질 만한 위치를 가늠했다.

마물들과 카이든, 에녹, 그리고 루제프는 모두 강가 바로 앞에 위치한 넓은 자갈밭 위에 있었다. 나는 그보다 지면이 조금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위치를 볼 때 자칫 에녹과 카이든이 다칠 수도 있어 보였다. 그들을 향해 비키라고 소리쳐도 제대로 들릴지 의문이었다.

그때, 짐을 옮기느라 그나마 가까이 다가와 있는 루제프가 보였다.

나는 우선 조명탄을 장전하고 해머를 당겨 내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폭탄을 꺼내어 쥔 채, 루제프를 불렀다.

“주교님!!”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플로네 영애! 이곳은 위험합니다! 멀리 도망가십시오!”

“잘 들어요!!! 카이든하고 에녹에게 제가 신호를 줄 테니까, 최대한 마물에게서 멀리 떨어지라고 전하세요!!!”

내 외침에 루제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히고 머뭇거리자 나는 기어코 화를 터뜨리고 말았다.

“빨리 안 가고 뭐하는 거야!!!!”

불호령을 들은 루제프가 화들짝 놀라더니 카이든과 에녹을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

그는 달리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연신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조명탄을 든 손을 하늘을 향해 올렸다.

멀리서 루제프가 에녹과 카이든에게 내가 한 말을 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동시에 나를 발견하고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두 남자는 루제프와 함께 나를 향해 뛰어왔다.

루제프가 전한 말을 실행하기 위해 마물들에게서 멀어졌다기보단 나를 구하기 위해 내 쪽으로 달려오는 것 같았다.

정말 놀라운 건, 에녹이 아직 발작을 제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다.

뭐가 됐든 마물에게서 멀어지고 있으니 다행이다. 나는 곧장 하늘을 향해 조명탄의 방아쇠를 당겼다.

조명탄에서 쏘아진 붉은 연기가 하늘 위에 잠시 멈칫했다.

펑! 퍼엉!

이내 거대한 불꽃놀이 폭죽이 하늘 일대를 장식한다. 그 요란함에 아나콘다 마물들이 동시에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못해도 다섯 마리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마물들은 나를 발견하고 거대한 입을 쫙 벌리며 입맛을 다셔댔다.

놈들의 입 속엔 촘촘한 이빨이 세 겹으로 박혀 있었다. 세 갈래로 나눠진 혀가 길쭉하게 빠져나와 내게로 달려오는 카이든과 에녹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는 황급히 이로 폭탄의 안전핀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크게 반원을 그려 폭탄을 던진 뒤에 자리에 엎드렸다.

일반적인 수류탄이라면 손잡이를 뗀 후 폭발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7초.

기어오는 아나콘다 마물들 사이로 던져진 폭탄이 굉음을 내며 터졌다.

화염 폭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튕겨 나간 마물 하나가 절벽에 부딪히며 또 한 번의 산사태가 일어났고 나머지 한 마리는 불길에 타들어 갔다.

내게로 달려오던 세 남자가 놀라서 마물들을 돌아본다. 나는 망설임 없이 폭탄 두 개를 연달아 던졌다.

“마거릿!”

에녹이 내게로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그때, 내 시야에 아직 죽지 않은 마물 세 마리가 기어오는 게 보였다.

“씨X, 잠시만요.”

나는 에녹과 카이든을 밀어내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며 조명탄을 장전하고 해머를 당겼다.

“마거릿!!”

등 뒤로 들려오는 남자들의 외침을 끝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세 마리의 아나콘다 사이로 붉은 연기가 비집고 들어갔다.

수초가 지난 뒤, 거대한 불꽃이 터지며 아나콘다들이 조각조각 찢어져 고깃덩어리 비처럼 하늘에서 내렸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보며 나는 코를 가렸다. 아나콘다 마물의 사체에서 나온 짙은 독가스가 사방에 퍼졌고 가까이서 그 향을 맡는 바람에 나는 순간 현기증이 일어 다리에 힘이 풀렸다.

뒤에서 달려온 카이든이 나를 번쩍 들어 어깨에 걸친 뒤, 에녹과 루제프와 함께 독가스를 피해 최대한 멀리 뛰어갔다.

“마거릿, 위험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마거릿, 괜찮나?! 정신 차려!”

“아니 대체 저게 뭡니까? 이 섬에선 마력을 못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플로네 영애, 마법도 쓸 줄 아는 겁니까? 대체 정체가 뭐죠?!”

에녹과 카이든, 루제프 순으로 정신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 멀쩡하니까 제 이름 좀 그만 불러 주실래요? 멋있다, 고맙다는 말은 조금 있다가 하시고요. 지금은 속이 좀 울렁거려서.”

나는 카이든의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린 채로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제야 세 남자가 안심을 하고는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이건 로맨스 소설이 아니다. 그냥 서바이벌 생존물이었다.

그래도 <생존보다 중요한 것>에서 여주 유안나는 마물 걱정도 크게 하지 않고 비교적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남주들과 사랑을 나눴던 것 같은데.

X발, 나는 이게 뭐야? 나한테 대체 왜 이래.

점점 더 하드코어 생존물이 되어 가고 있잖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