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41)화 (41/234)

“후우.”

정신이 들었는지 에녹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황태자는 왜 이러는지 설명 안 해 줄 거야?”

“에녹에 대한 거니까, 본인한테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에녹의 트라우마에 관한 걸 미주알고주알 남에게 말할 수도 없어 그저 침묵했다.

에녹이 콧잔등을 찡그리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눈에 초점이 없는 게 아직 완전히 정신이 돌아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카이든이 그런 그를 흘끗 보더니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럼 설명을 듣기는 어렵겠네.”

에녹이 직접 답해 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너는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네가 묻는다면 그게 뭐든 다 말해 주지.”

거짓말인 걸 안다. 카이든은 이상하게 나한테만큼은 입에 발린 소리를 잘했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넌지시 죽은 아나콘다들을 보다가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따까리 좀 쫓아내려고 잠깐 오두막을 비웠거든?”

카이든은 기억을 더듬는 얼굴로 뒷머리를 헤집더니 말을 이었다.

“갑자기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나기에 달려왔더니, 저놈이 있었어. 뭘 처먹고 있었는데, 뭔지는 모르겠군.”

아나콘다가 뭘 처먹고 있었다니. 그것만큼 섬뜩한 문장이 있을까?

열심히 만든 오두막이 처참히 부서진 광경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여기까지 마물이 나오다니, 이곳도 안전한 피난처는 아닌 것 같네.”

내 말에 카이든도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다른 피난처를 찾아봐야겠어.”

카이든은 강가 부근에서 기절해 있는 루제프를 부서진 오두막 근처까지 끌고 왔다.

그사이 고단한 얼굴로 앉아 있던 에녹도 정신이 다 들었는지 내게로 다가왔다.

“마거릿, 고맙다. 역시 난 그대가 없으면 안 될 것 같군.”

그 말에 카이든이 눈치를 보며 에녹을 향해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에녹이 발작 증세를 보인 것에 대해서 직접 물으려다가 포기한 모양이다.

“점점 증세도 좋아지는 것 같던데요? 우선 괜찮으면 다 같이 이것 좀 치울까 봐요.”

우리는 부서진 오두막 잔해를 치우고 살림살이를 챙겨 정리했다.

“카이든. 상처 치료하게 이리 와 봐.”

나는 부서진 오두막을 뒤적이며 구급약통을 찾아와 카이든을 바닥에 앉혔다.

“에녹, 카이든 상처 치료할 거니까 가까이 오지 마세요.”

멀리 있던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렸다. 나는 그가 완전히 돌아선 것을 확인하며 카이든을 향해 말했다.

“상의 좀 벗어 봐.”

카이든은 찢어져서 엉망인 마법사 로브를 벗고는 흰 셔츠까지 몽땅 벗었다.

드러난 그의 탄탄한 복근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뭐지, 이게 마법사 몸이 맞는 건가?

에녹만큼은 아니지만, 일단 웬만한 기사들만큼이나 몸이 단단해 보였다. 잘 짜인 근육에 복근까지 완벽했다.

아나콘다에게 당한 상처라면 독이 있었을 텐데, 카이든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에녹은 이전에 마물의 독 때문에 고생했는데, 왜 카이든은 멀쩡한 걸까.

나는 천으로 카이든의 몸에 잔뜩 튀어 있는 핏물을 닦아 냈다.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카이든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 거지.

카이든은 내가 그의 몸을 닦아 내는 동안에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몸 정도는 그더러 닦으라고 할걸. 생각이 짧았다. 왠지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마른침을 삼키고는 천을 짜서 내려놓으려는데 갑자기 카이든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내 손에 자신의 뺨을 기대더니,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더 해 주지, 왜 그만해.”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그의 뺨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게 아니라, 이제 진짜 상처 치료를 해야지.”

그러고는 소독약을 꺼내는데, 갑자기 에녹이 다가와서는 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본인이 앉았다.

“피는 다 닦아 낸 것 같으니, 상처는 내가 대신 봐 주지.”

그가 내 손에 들린 소독약을 빼앗아 들었다.

에녹은 약간의 상처 정도는 볼 수 있었지만, 카이든이 얻어 온 상처는 제법 크고 깊어서 피를 닦아냈다고 해도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놀라서 그를 말리려고 손을 뻗었다가, 소독약을 쥔 그의 붉어진 손등에 핏대가 잔뜩 선 걸 보고 깨달았다.

이 정도는 정신력으로 제어가 가능한 모양이다.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해서 카이든을 직접 치료하려는 거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에녹을 쳐다봤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싫습니다. 마거릿이 아니면 치료받지 않을 겁니다.”

카이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에녹은 미동도 않고 근엄한 얼굴로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시끄럽고, 앉아.”

“싫습니다. 마거릿, 이리 와.”

에녹 옆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카이든이 손을 뻗자 에녹이 그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카이든 블레이크 로하데.”

“네, 황태자 전하. 싫습니다.”

카이든이 다른 손으로 귀를 후비며 짜증스럽게 에녹을 쳐다봤다.

두 남자가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걸 보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내가 하는 일 방해하면, 그냥 혼자 떠날 거예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두 남자가 얌전해졌다.

이젠 나도 이들을 다루는 법을 좀 익힌 것 같다.

* * *

다음 날, 우리는 결국 다른 거처를 찾아 이사를 하기로 했다.

마물이 등장했으니 이곳도 안전하진 않았다.

루제프는 뒤늦게 깨어나서는 민망한 얼굴로 쭈뼛거리다가 눈치를 보며 짐 챙기는 것을 도왔다.

카이든이 그더러 썩 꺼지라고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지만, 루제프는 카이든의 욕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떠나지 않고 남았다.

가장 놀라운 건 카이든의 체력이었다. 그는 상처 때문에 밤새 끓어오른 열로 고생을 했는데 아침이 되자 씻은 듯이 나은 사람처럼 돌아다녔다.

‘독에 대한 내성이라도 있는 걸까?’

어쩌면 그가 어린 시절 신전에 납치되어 당했던 실험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었다.

지난번 동굴 앞에서 발견했었던 상처는 정말 심각한 상처여서 못 일어났던 것 같고…….

걱정돼서 그에게 가만히 휴식하라고 말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전혀 개의치 않은 듯이 그는 아침부터 뽈뽈거리며 과일을 따러 다녔다. 어제 힘을 써서 배가 고프다나 뭐라나.

“떠나기 전에 잠시 주변 정찰을 좀 하고 올게요. 제가 오기 전까지 저 아나콘다에 대해서 뭔가 알아내면 좋고요.”

내 말에 카이든과 에녹의 눈치를 살피던 루제프가 쪼르르 내게 달려왔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혼자보다는 그래도 둘이 낫지 않겠습니까.”

곧장 그를 따라 달려온 카이든이 루제프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어딜 가려고?”

루제프는 불쾌하단 얼굴로 카이든의 팔을 치워 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루제프의 성깔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아서인지 나로서는 그가 저렇게 카이든의 무례를 참아 내는 게 참 대단해 보였다.

에녹도 드물게 카이든의 의견에 동의하며 루제프에게 눈치를 줬다.

“그럼 혼자 다녀올게요.”

에녹이 그래도 혼자는 위험하다며 내게 다가오기에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그의 걸음을 막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 위험하면 이거 쏠게요.”

내가 주머니에서 조명탄을 꺼내 흔들어 보이자 에녹도 그제야 내 말을 듣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위험한 일이 생기면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에녹에게 안심하란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썩 못미더웠는지 에녹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개의치 않고 얌전히 오두막을 벗어났다.

이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 오래 지나지 않아서 돌아오기로 했다.

오두막을 벗어난 나는 어제 봤던 빈 보급품 박스를 다시 찾았다.

소설 속에서 마물들이 지키고 있는 보급품 창고가 있었던 게 뒤늦게 기억이 났다.

그 보급품 창고엔 다양한 현대식 무기들과 함께 생존 키트와 식량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벙커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빈 박스 근처에 뭔가 힌트가 있지 않을까 살펴봤는데 마땅히 건질 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박스 밑에 뭔가가 있었다.

흙바닥 사이로 나무판자 같은 게 언뜻 보여서 나는 황급히 손으로 흙을 치워 냈다.

아래에는 네모난 나무 상자 같은 게 묻혀 있었다.

나는 흙을 조금 더 파내고 이어 땅에서 상자를 꺼냈다.

나무 상자의 뚜껑에는 은색 철제로 된 잠금 걸쇠가 걸려 있었는데, 자물쇠는 달려 있지 않았다.

※취급 주의※

M67 세열 수류탄

화염 폭탄

나무 상자의 겉면에 쓰여 있는 글자를 훑고 나는 몹시 놀랐다. 수류탄이라고?

게다가 한글로 적힌 글자를 누가 인위적으로 지우고 그 밑에 란그리드 제국어로 ‘화염 폭탄’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다.

이 상자, 열어도 괜찮은 건가? 취급 주의라고 적혀 있는데.

나는 한참 동안 닫힌 상자를 노려보며 고민하다가 결심을 굳혔다.

그래,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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