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40)화 (40/234)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데……. 그리고 당장 떠날 생각인 것도 아니다.

이럴 땐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나를 바라보는 에녹은 늘 세심했다.

그가 내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 이후로 그가 나를 보살피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대충 눈치는 채고 있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다.

“나도…….”

에녹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긴장된 얼굴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도 버리고 떠날 건가.”

침울한 얼굴을 한 그가 가슴 아프게 애틋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조금 당황해서 황급히 말을 골랐다.

“버리긴 누가 버려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가 내게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네 옆에 내가 있게 해 줘, 마거릿.”

그가 내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귓가가 간질거리는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버리지 말고.”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렇게 해도 되잖아. 응?”

그가 고개를 들고 내게로 시선을 맞췄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그 무던함을 가장한 얼굴에는 어쩐지 애처로운 빛이 흘렀다.

나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금색 눈동자를 보다가 그만 홀리고 말았다.

세상에, 어떡하지?

들어갈 자리도 없을 텐데 벙커에 에녹의 자리를 내어주고 싶어졌다.

“……그 말,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나는 일부러 버리겠다는 말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에녹은 말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만 봤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싼 그의 커다란 손이 이내, 뺨을 매만졌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하지.”

그렇게 쉽게 장담하면 안 될 텐데.

다행히도 에녹은 그 이상 나를 채근하며 답을 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강가 주변을 정찰했고, 에녹은 나를 따라 오다가 토끼 두 마리를 잡아 왔다.

나는 에녹이 토끼를 줄로 엮어 허리춤에 매다는 것을 보며 루제프가 허리에 물고기를 매단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도 물고기보단 토끼가 낫지.

해가 질 무렵에서야 나와 에녹은 오두막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신기하게 최근에는 마물을 본 적이 없네요. 강가로는 늑대형 마물들이 내려오지 않는 걸까요?”

내 물음에 에녹이 주변을 경계하다가 나를 흘끔 보았다.

“우리가 깨어난 해변 근처로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것 같군. 늑대 마물들이 물을 싫어하는 모양이야.”

에녹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설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이 섬에는 늑대형 마물 말고도 여러 종류의 마물이 존재한다.

마물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건 아나콘다 형상을 한 마물과 타란튤라 형상을 한 마물이 있었다.

기억하기로 아나콘다형 마물은 입김으로 독을 뿜어내기도 했던 것 같다.

보통은 늪지대에서 서식하지만, 하천 주변에서도 종종 목격돼서 주인공들이 강가로 나갈 때 매우 주의를 했던 게 떠올랐다.

‘잠깐만, 강가라고?’

“와. 그걸 왜 이제야 생각했지? 나는 겁도 없었네.”

돌이켜보니 우리가 만든 거처도 강가 주변이라 그리 안심하고 있을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에녹이 무슨 일이냐고 내게 물었다.

“아니에요. 일단 해가 지고 있으니 돌아갈까요?”

내 말에 에녹이 의아한 얼굴로 내 표정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해가 떠 있을 때에는 마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게 더 위험한가?

“이건 뭐지?”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길에 에녹이 수풀 사이로 빈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군용 물품처럼 보였는데 가까이서 살펴보니 보급품 박스였다.

“어……, 그러게요. 누가 이미 열어 본 것 같은데요. 루제프 주교 일행일까요?”

내 물음에 에녹이 턱을 괴고 빈 상자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일단 이 섬에서 사람이라곤 그들과 우리뿐인 것 같으니.”

보급품 박스까지 나올 줄이야.

박스에는 한글로 ‘군수 지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이 섬이 한국에 있는 어느 외딴 섬은 아닐까 하는 가설에 다시금 힘을 실었다.

“벌써 해가 지네요, 일단 빨리 돌아가죠.”

빈 박스를 아무리 들여다봐야 나오는 건 없었다. 나와 에녹은 다시 걸음을 옮겨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러나 오두막에 도착한 우리는 뜻밖에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이게 대체.”

에녹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 역시 오두막 앞 강가에 길게 늘어져 있는 아나콘다 마물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아나콘다의 몸에 작살이 십여 개는 꽂혀 있었다.

루제프 주교는 기절을 한 모양인지 오두막 앞에 쓰러져 있었고 상처가 가득한 카이든이 아나콘다의 머리에 한쪽 발을 올린 채, 작살을 내리꽂고 있었다.

나는 마물의 피를 뒤집어 쓴 카이든을 보고 잠시 아연해졌다. 하지만 곧 꿈틀거리는 아나콘다를 보고 에녹의 팔을 황급히 잡았다.

“여기서 기다려라.”

에녹은 허리춤에 매단 토끼를 바닥에 내던지고 작살을 손에 고쳐 쥔 뒤, 카이든에게 달려갔다. 그러곤 카이든을 도와 아나콘다의 머리에 작살을 내리 꽂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하. 죽는 줄 알았네.”

카이든의 욕지거리가 들려와서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나콘다는 완전히 죽은 듯 보였다.

“괜찮아?!”

나는 급히 카이든을 살폈다. 그의 몸엔 새로운 상처가 굉장히 많았다. 찢기고 긁힌 상처뿐 아니라, 독에 감염된 것처럼 보이는 상처도 있었다.

붉은 피가 가득 튀어 너저분한 몰골을 하고 나를 돌아보는 카이든의 적안엔 짙은 광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카이든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에녹을 돌아봤다. 역시나 한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가리고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에녹이 보였다.

발작하는 걸 참고 있는 건지 붉어진 그의 목에 핏대가 섰다.

“왜 저래?”

카이든이 의아한 얼굴로 에녹을 보는 사이, 나는 바닥에 떨어진 끈을 주워 그에게로 달려가 손발을 꽁꽁 묶었다.

“뭐야, 마거릿. 뭐 하는 거야?”

카이든이 나를 따라 달려와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나는 에녹의 손발을 단단히 묶으며 대답했다.

“진정시키는 거야.”

“뭘?”

카이든에게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에녹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녹. 내 말 들려요?”

다행히도 아직 이성이 남아 있는 상태인지 그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어찌나 힘을 강하게 쥐었던지 끈이 뚝하고 끊어졌다. 그의 팔뚝에 성난 근육들이 울긋불긋해졌다. 온 힘을 다해 스스로를 제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그를 토닥였다.

“괜찮아요, 그만해.”

나는 그를 바닥에 천천히 앉히고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그만하고 멈추자.”

그래도 정말 다행인 건, 에녹을 컨트롤하는 게 전보다 쉬워졌다는 점이다.

에녹은 기절하지도 않았고 발작도 금방 진정이 됐다. 이렇게 진정 속도가 빨라진다면 나중엔 손발을 결박하지 않고도 통제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괜찮아?”

나는 카이든을 돌아보며 그의 상처를 다시 살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황태자는 왜 저러는데?”

“나중에 설명해 줄게. 그보다 너도 심각해 보여서 묻는 거야.”

내 말에 카이든이 나를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매력적인 보조개가 움푹 들어갔는데, 얼굴에도 피가 잔뜩 튀어 있어서인지 그 모습이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

“아, 마거릿. 네가 없어서 다행이었어. 졸개 놈은 저거 보자마자 기절했거든.”

카이든은 동문서답을 하며 기절한 루제프를 가리켰다. 나는 카이든의 말대로 루제프를 한 번 쳐다봐 주고 이번엔 에녹을 흘끗 보았다.

“어딜 봐.”

그리고 내가 에녹을 보는 걸 알아차린 카이든이 내 턱을 돌려 자신에게로 고정시켰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지금은 나만 봐, 마거릿.”

그러고는 관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듯이 나를 채근했다.

“나 고생했잖아. 잘했다고 칭찬 좀 해 줘.”

그의 결 좋은 은발이 피로 온통 지저분해져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혼자 고생했어, 카이든. 무사해서 다행이야. 진심으로.”

내 말에 카이든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 세차게 흔들거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역시 맛이 간 저 눈동자는 좀 무섭다. 게다가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무서웠다.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훔치며 씨익 웃는데, 그는 정말로 미친놈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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