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에 비해 나는 불을 잘 피우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바짝 마른 대나무를 잘라 와 반으로 쪼갰다. 쪼갠 대나무 중 하나는 작게 구멍을 뚫어 아래에 부싯깃을 넣어 뒤집어엎었고, 다른 하나는 그 위에 톱질을 하듯이 마구 비볐다. 누르는 힘과 나무를 마찰하는 왕복 운동으로 불씨를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톱질을 하다 보니 아래에서 연기가 났고 나는 대나무 구멍 안으로 바람을 후후 불어 줬다. 불씨가 보여서 대나무를 치우고 부싯깃을 계속해서 살살 불어 줬다.
“마른 잎 좀 가져와요. 아주 바짝 마른 걸로 빨리.”
내 앞에 넋 놓고 내가 하는 걸 지켜보던 루제프가 황급히 움직여 마른 잎을 구해 왔다.
나는 그걸 2차 부싯깃으로 사용해 불씨를 불로 만들어 냈다.
“맙소사.”
루제프가 멍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잘 봤죠? 다음엔 주교님이 하시는 거예요.”
내 말에 루제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난 불을 피워서 그에게 생선을 좀 구워 주고는 정수된 물도 나눠 줬다.
그런데 이놈이 열심히 생선을 먹고 물도 받아 마시고는,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질 않는다.
한술 더 떠서 생선을 먹었던 나뭇가지를 자진해서 치우고 청소까지 시작했다.
“저, 여기서 지내면 안 됩니까?”
“저더러 마녀라고 하신 거 기억 안 나세요? 양심 좀 챙겨요.”
내 말에 루제프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네 집으로 꺼지라고 말해도 기어코 그는 에녹과 카이든이 올 때까지 떠나지 않고 버텼다.
에녹과 카이든이 그를 발견하고 난리가 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카이든이 우리 동굴에 눌러앉았던 때가 떠올랐다.
불길하다. 이 루트, 뭔가 익숙한 것 같은데.
하지만 해가 저물고 있었고 무턱대고 마물이 돌아다니는 밤에 루제프를 쫓아낼 수도 없어서 결국 하룻밤만 그를 받아 주기로 했다.
“너 이 졸개 새끼야. 들어올 생각 말고 집 앞이나 지켜. 너희 신관들 그런 거 잘하잖아. 지키는 거.”
오두막에 함께 들어오려는 루제프를 쫓아내며 카이든이 으르렁거렸다.
루제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얼굴로 카이든을 노려봤지만, 끝내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밤에 숲을 헤맬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든 버티려는 모양이다.
“그래도 밖은 위험하니까…….”
내가 불현듯 운을 떼자 루제프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감격에 젖어 나를 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생각은 없었다.
“입구에서 앉아서 지켜요. 밖에서 사람 냄새 풍기면 마물들이 몰려올지도 모르잖아요.”
루제프가 절망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고 카이든이 박장대소를 했다.
아무튼 강가로 이사를 오고 나서는 밤에 마물을 만나는 횟수도 줄었고 늑대 울음소리의 빈도도 확실히 줄었다.
마물들이 물가로는 내려오지 않는 걸까?
아침에 일어나니, 에녹이 대나무 통에 블루베리를 한가득 따 왔다.
나는 오두막 앞에 앉아 며칠 전에 새로 만든 씹는 막대로 양치를 하고 있었다.
루제프가 그 모습을 보더니 신기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뭡니까?”
에녹과 카이든이 각기 자신이 사용하는 나무 막대를 씹어 이를 닦으며 내 양 옆에 앉았다.
“양치하는 건데요.”
나는 나뭇가지로 이를 닦고 물로 헹궈낸 뒤, 루제프를 향해 물었다.
“아, 혹시 주교님은 양치 안 하세요?”
내 물음에 루제프가 당황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이상한 게 이 섬에 걸려 있는 마법 때문인지 뭔지 몰라도 다들 냄새가 안 난다. 그래도 양치를 안 하는 건 찝찝하잖아.
나는 우선 팔뚝만 한 길이에 폭이 1cm가량 되는 얇은 나뭇가지를 잘랐다. 그리고 루제프에게 나무 끝을 씹게 했다.
나무의 섬유질이 침 분비를 촉진시키고, 침은 음식물 찌꺼기를 중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렇게 섬유질로 갈라놓은 부분으로 이를 닦으면 됐다.
“간단하죠?”
내 물음에 루제프가 막대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따까리. 너 이제 그만 돌아가.”
아침 식사로 블루베리를 먹으며 카이든이 루제프에게 눈치를 줬다.
냉소로 일그러진 카이든의 얼굴이 루제프의 행색을 아니꼽게 훑었다.
“플로네 영애를 만나기 이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만났는데 영애 없이 이제 어떻게 삽니까? 안 갈 겁니다.”
루제프가 괴상한 소리를 했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블루베리를 열심히 먹었다.
오늘은 벙커로 가는 길을 탐색하면 좋을 것 같다. 벙커 위치가 적힌 지도도 찾았으니 가는 길을 찾는 건, 식은 죽 먹기 아닐까?
“개수작 부리지 말고 가서 신이나 찾아. 왜, 신이 응답을 안 해? 그럴 만하지. 신은 없는데.”
“지금 말 다 하셨습니까?!”
“다 한 것처럼 보였어? 아닌데. 생각해 봐, 신이란 게 있으면 우리가 여기에 떨어졌겠나.”
“말조심하십시오!”
두 사람의 언성이 점차 높아졌다.
나는 귀가 아파서 잠시 눈살을 찌푸렸는데, 그런 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에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그만하지. 마거릿 앞에서 시끄럽게 굴지 마라.”
마거릿이라는 단어엔 아마도 마법이 걸려 있는 게 아닐까?
카이든과 루제프가 얌전히 입을 다물고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나는 그 두 사람을 보다가 빈 대나무 통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무줄기를 허리에 엮어 돌로 만든 도끼를 끼우고 작살을 손에 쥔 채, 카이든과 루제프를 돌아봤다.
“저는 정찰을 다녀올게요.”
새 보금자리에 왔으니 주변 탐색을 해야 했다. 위험한 건 없는지, 근처에 우리가 필요로 할 만한 뭔가가 있는지 파악하는 건 매우 중요하니까.
루제프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아주 괴상한 것을 보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영애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게 계속 봐도 적응이 되지는 않네요.”
저건 나를 처음 만난 남주들의 필수 대사인가 보다. 꼭 해야만 하는 대사 리스트에 있기라도 한 걸까.
루제프의 말에 이번에는 카이든도 에녹도 대답하지 않았다. 에녹은 사냥 준비를 하느라 대답하지 않았고 카이든은 귀찮아서 대답하지 않은 듯했다.
루제프는 굴하지 않고 질문 하나를 더 던졌다.
“원래 귀족 영애들은 다 플로네 영애처럼 적응력이 빠른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물론 나도 대답하기 귀찮아서 루제프의 질문을 한 귀로 흘렸다.
“카이든, 그동안 루제프 주교 좀 돌려보내고 있어.”
“걱정 마, 아주 혼쭐을 내서 쫓아낼게.”
“조금 더 머물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
그리고 그런 내 말에 카이든과 루제프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물려 뭐라고 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재차 되묻기도 귀찮아서 나는 그냥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등 뒤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둘이 또 다시 싸우고 있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에녹은 무기를 챙겨서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내 뒤를 따라오는 에녹을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다.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오늘은 내가 사냥 당번이라서.”
그가 내 의문 어린 시선에 조용히 답했다.
“사냥은 카이든이 쭉 하는 거 아니었어요?”
내 물음에 에녹이 나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로드가 새만 잡아 온다고 그대가 불평하지 않았나.”
나는 그의 대답에 조금 당황했다.
“불평한 적은 없는데…….”
다만 매번 새랑 물고기만 먹고 있으려니 이제는 정말 물려서 육류를 잡아야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물론 카이든보고 잡아 오라고 한 건 아니다. 내일 중으로 멧돼지 같은 사냥감을 포획할 덫을 내가 직접 만들겠다고 하기도 했고.
“토끼라도 잡아 주겠다.”
에녹의 제안에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봤다.
“정말요?”
무심한 얼굴로 재킷의 소매를 접고 있던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든과 루제프 주교 때문에 오두막이 시끌벅적해서일까, 에녹이 상대적으로 품위 있고 위엄 있어 보였다. 황태자인데, 아무렴.
그를 ‘전하’가 아니라 ‘에녹’으로 부르기로 한 시점부터 자꾸만 그 사실을 잊는다.
이 외딴섬을 탈출하고 제국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데 왜 자꾸 따라와요? 저는 정찰을 가는 길인데?”
“그대를 따라가며 사냥해도 좋겠다 싶어서.”
에녹의 말에 나는 조금 곤란해졌다.
왜냐하면, 에녹과 헤어지고서 혼자 강북으로 가는 길을 찾으러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처 지우지 못한 내 곤란함을 눈치챈 에녹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나와 함께 가는 게 싫은가.”
“그건 아닌데…….”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함께 가요.”
하는 수 없지. 오늘은 벙커 위치를 찾는 건 포기해야겠다.
의심을 사고 싶지는 않았고 벙커는 아무리 에녹이라도 알려 줄 수 없었다.
이건 정말 내가 가진 최후의 수단이었으니까.
나는 에녹의 뒤를 따라 걸으며 드레스 주머니를 뒤적였다.
조명탄은 무사히 주머니에 보관되어 있었다.
카이든도 에녹도 내게 조명탄을 달란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내가 찾은 걸 그들에게 줄 이유가 없어서 직접 보관 중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벙커지도를 챙겨 왔는데, 다행히 그것 또한 주머니에 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다가 나는 그만 걸음을 멈춘 에녹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혔다.
그러니까 등판이 아니라 가슴팍에.
내가 부산스럽게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는 걸 에녹이 다 보고 있었단 소리다.
나는 그걸 깨닫고 조금 허탈해졌다. 난 좀 바본가……?
에녹의 얼굴은 차고 단단했다. 그리고 늘 파고들 틈 없이 완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떠날 준비 한다는 거 알고 있다.”
갑작스런 에녹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