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38)화 (38/234)

나는 그가 조금 짠하게 느껴져서 굽지 않은 물고기 두 마리를 더 챙겨 줬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끝마친 그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민망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식사 전까지는 나를 보고 마녀니 어쩌니 하면서 아주 경멸을 하더니, 내 동정은 마다하지 못한 자신의 이중적인 행태를 깨달은 모양이다.

“그……. 영애께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게 아니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루제프를 보던 에녹이 한마디 거들었다. 아무런 부연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루제프를 빤히 바라보는 에녹의 시선이 자못 살벌했다.

루제프가 에녹을 흘끔 보고는 얌전히 내게 사과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죄송했습니다, 영애.”

사과는 깔끔했다.

“그래요. 잘 가요.”

내 말에 루제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잡아 준 물고기를 소중한 물건 안듯이 안고는 사라졌다.

비린내 날 텐데…….

여주 유안나는 잘 있을까? 사실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뜬금없이 ‘일행 중에 여자 한명 있죠?’ 하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타이밍을 놓쳐 끝내 질문을 하지 못했다.

나는 루제프가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급격하게 피곤해져서 일찍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나는 강가를 수영하며 여유롭게 물고기 사냥을 하던 중이었다.

“저게 뭐지?”

물속을 배회하고 있는 중에 나는 절벽 사이에 꽂혀 있는 의문의 천 조각을 발견했다.

그건, 놀랍게도 지도였다.

내가 그토록 찾고 있던 벙커의 위치가 적힌.

“세상에!”

나는 곧장 절벽 틈에서 벙커 지도를 빼내고 물속에서 나왔다. 그리곤 곧장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에녹은 사냥을 나갔고 카이든은 거처 주변 정찰을 나간 상태였다.

난 홀로 오두막에 앉아 벙커 지도를 살폈다.

“……이게 지도야?”

벙커 지도는 아주 엿 같이 표시가 되어 있었다.

커다란 섬 안에 산봉우리 세 개가 그려져 있었고 세 개의 산봉우리 가운데엔 거대한 강이 흘렀다.

북섬에 위치한 산봉우리 옆에 엑스 표시와 함께 ‘bunker’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그게 끝이었다.

“아니, 씨X……. 이거 찾아가라고 그린 거 맞아?”

나는 기가 차서 지도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산 정상에 올라가서 섬의 크기를 보고 얼마나 막막했는지 생각해 보면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일단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이 됐으니, 꾸준하게 정찰을 나가 봐야겠다.

우리가 있는 위치는 남섬의 중앙 부근이었다. 그러니 섬 중앙에 흐르는 거대한 강을 건널 방도를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벙커 지도가 왜 절벽 사이에 꽂혀 있는 걸까?

“이건 날짜인가?”

나는 벙커의 끄트머리에 적힌 숫자를 읽었다.

“잉그람 왕국력, 666년.”

잠깐, 잉그람 왕국력이라니.

마거릿의 나라인 란드리그 제국을 포함한 서대륙과 동대륙은, 천 년 전에 제정한 통일된 기년법인 위니아력을 사용한다.

잉그람 왕국이라면, 란그리드 제국이 건립되기 이전의 왕조였다.

그러니까 이건 천 년 전, 잉그람 왕국에서 사용하던 연도 표기라는 소리다.

“뭐야……. 소름 끼치게. 이 지도가 천 년이나 됐다는 건가?”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든 거지?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나, 지금으로선 고민해봐도 답을 알 수 없는 부분이기에 결국 지도를 접었다.

“그래, 일단 벙커에 가 보자. 그럼 뭐라도 나오겠지.”

나는 일단 카이든이 만들어 준 가방에 지도를 넣었다.

“그런데 벙커를 찾으면…… 에녹이랑 카이든은 어쩌지?”

그들을 데리고 갈 것인지, 아니면 처음 계획대로 홀로 벙커에 갈 것인지, 고민이 됐다. 어차피 벙커는 1인용일 테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뇌에 찬 숨을 뱉었다.

그들과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붙은 정이라는 게 있는데, 혼자 떠나 버려도 되는 걸까?

그들이 유안나를 만난다고 변할지 아닐지 아직은 모르는 일 아닌가.

게다가 당장의 에녹과 카이든은 내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조금만 더 지내면서 생각해 볼까?”

간단하게 선택할 문제가 아니었기에 나는 결국 결정을 보류했다.

그리고 카이든과 에녹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도 잊지 않고 시작했다.

카이든이 만들어 준 나무 끈도 다 떨어진 것 같아서 버드나무 껍질과 가지도 주웠다. 얇게 잘라 끈을 꼬아 만들기 가장 좋은 재료였다.

한참을 거처 근처에서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으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황급히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오래 지나지 않아 한 남자와 여자가 나타났다.

먼저 남자의 짧게 자른 짙은 밤색 머리카락, 녹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근위대 제복을 입은 걸 보고 난 그가 바로 디에고 바스티안 빌터하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저 새X가 내 옷 훔친 나쁜 X끼구나?’

디에고는 등에 한 여자를 업고 있다가 쓰러진 나무 기둥 위에 내려놨다. 카키색에 가까운 연갈색 머리카락이 여자의 목 언저리에서 찰랑거렸다.

내가 기억하는 원작 속 유안나의 외관과 마거릿의 기억 속 성녀의 얼굴이 일치했다.

저 여자가 바로 대성녀 유안나 루시인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입은 신복의 상태가 내 지저분한 드레스보다 심각해 보여서 놀랐다.

그녀의 신복은 못 쓸 정도로 지저분하게 찢겨 있었다. 그 아래에 상처들이 있는 걸 보아하니 짐승에게 할퀴거나 마물에게 공격당한 게 분명했다.

“성녀님.”

디에고가 유안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디에고는 매우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달 왕세자 저하께서 강압적으로 구시는 게 성녀님을 힘들게 한다는 걸 압니다.”

오오. 다른 남주 뒷담화 하며 자기 어필을 하는 건가? 디에고의 절절한 대사에 분위기가 일순 팝콘각이 되었다.

“저를 믿고 의지해 주십시오.”

그러고는 그가 허리를 숙여 유안나의 발등에 입맞춤을 했다. 마치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 당혹스럽게 바라봤다.

‘왜 저렇게까지……?’

그러는 중에도 유안나는 아무런 동요도 없는 얼굴로 그저 무덤덤하게 디에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런 디에고를 귀찮게 여기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그냥 만사가 지겨운 얼굴인 건가?

그녀는 굉장히 무기력해 보였다.

“하아……. 뭐, 그래요. 고마워요.”

유안나가 굉장히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러나 디에고는 눈치를 채지 못한 건지 매우 감격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디에고가 유안나를 다시 업고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지켜봤다.

‘기묘하네.’

“남을 훔쳐본다고 저를 나무라시더니, 영애께서도 저와 별다를 것 없으시군요.”

“깜짝이야!”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뒤를 돌아보니 허리에 물고기를 차고 있는 루제프가 서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들을 노려봤다.

검도 아니고 물고기를 허리에 차고 다닌다니. 심지어 저건 어제 내가 준 물고기 같은데.

“아니, 여기서 뭐 해요?”

나는 잠시 코를 틀어막았다. 루제프에게서 비린내가 풍겼기 때문이다.

“지나가다가 영애가 보이기에 말을 건 것뿐입니다.”

까칠하게 굴던 그의 기세가 지난번과는 다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조금 전 보았던 여주 유안나와 디에고의 대화를 떠올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원작에서 아스달 왕세자의 폭정에 화가 난 루제프가 무리에서 몇 주간 따로 떨어져 나와 생활하던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 같다.

“저 사람들 누군지 알아요?”

내 물음에 루제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일행입니다.”

루제프는 그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유안나와 디에고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제 안 돌아갔어요?”

내 물음에 슬쩍 나를 본 루제프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사정이 있어서…….”

그는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대충 이유를 알고 있는 나는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사실 그의 사정을 일일이 들어 주기 귀찮기도 했고.

“그 물고기는 왜 안 먹었어요?”

나는 비린내가 계속 풍겨서 결국 대놓고 코를 막은 채, 그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불 피울 줄 몰라요?”

내 물음에 루제프가 입을 꾹 다물고는 내 눈치를 살폈다.

그렇다는 건 그는 오늘도 하루 종일 굶었다는 소린데…….

“밥은 먹고 다녀요?”

이번에도 루제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꼬르르르륵.

그의 배 속에서 내 물음에 대한 답을 대신한다.

나는 루제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