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네 영애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그는 여전히 나를 플로네 영애라고 불렀다.
그래. 믿지 않을 줄은 알았다. 나는 작살을 주워 들고는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산짐승인 줄 알았죠. 그러게 누가 그렇게 몰래 훔쳐보래요?”
루제프는 여전히 청초하고 예뻤다. 하지만 성격이 매우 사나워서 친해지기는 어려운 남자였다. 여주 유안나도 그와 친해지는 데 꽤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지.
“훔쳐보긴 누가 훔쳐봤다고 그럽니까!”
루제프가 비명처럼 외치다가 멈칫했다.
그는 잠시 놀란 얼굴로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내 어깨 너머를 쳐다봤다.
그곳엔 내가 잡아 둔 물고기들이 자갈밭 위에 널려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물고기 사냥을 하신 겁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넋을 놓고 자갈밭에 널려 있는 물고기를 쳐다보았다.
내가 물속에서 물고기 잡는 것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플로네 영애가 정말 사냥을 했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군. 이건 말도 안 돼. 지나가던 악마가 다 비웃겠어.”
루제프는 횡설수설하며 넋이 나간 듯 나를 훑었다.
‘지나가던 악마가 비웃겠다니. 그거 너무 상천데.’
그런데 돌연 등 뒤에서 지독히도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뭘 훔쳐봐?”
에녹이었다.
다듬지 않은 날 선 시선이 루제프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이로군, 주교. 목숨이 아까우면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꼭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찢어발길 수 있다면 에녹이 아마 진즉에 루제프를 찢고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황태자 전하?”
루제프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에녹을 바라봤다.
에녹과 루제프는 섬에서 서로를 처음 만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디에고가 일행에게 에녹을 주기적으로 만난다는 걸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른 사람은 없대요?”
“그건…… 모르겠군.”
에녹에게도 자신의 일행에 관해서 숨긴 것 같고.
디에고라면 성녀 유안나를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인물 중 하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여자 하나를 독차지하겠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지, 암.’
그리고 그 ‘여자 하나를 독차지하겠다고 거짓말을 하는 문제 있는 사람’이 에녹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전하께서 여기 어떻게……? 아니, 왜 전하께서 저런 마녀 같은 영애와 함께 계시는 겁니까. 저 마녀가 기어코 전하께 무슨 짓이라도 한 겁니까?”
루제프가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놈의 마녀 소리 지겨워 죽겠다.
“어쩐지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 달라고 할 때부터 수상쩍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그리 쉽게 얻으려 하는 사람치고 정상적인 인물은 없지요. 이 마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말해라!”
“하…….”
나는 피곤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결국 조명탄을 장전하고 해머를 당겨 내렸다.
“주교님? 자꾸 그렇게 시끄럽게 구실 건가?”
그리고 루제프를 향해 조명탄의 총구를 겨누었다.
“이거 뭔지 알죠? 팡!”
내가 방아쇠를 당겨 총을 쏘는 시늉을 하자 루제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알면, 닥치고 손 들어. 쏘기 전에.”
죽기 전에 꼭 한번 해 보고 싶은 대사였다.
루제프는 굴욕적인 얼굴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들었다. 그의 새하얀 주교복이 엉망이 되어 있었는데도 물빛 머리카락은 비단결처럼 고와 보였다.
처진 눈꼬리 때문에 인상은 유순해 보였는데 사람은 역시 얼굴만 보고는 모르는 거다. 저렇게 처연한 얼굴로 성깔이 더럽다니.
“역시 이 마녀……!”
퍽!
루제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카이든이 그의 등을 발로 걷어찼기 때문이다.
“윽.”
카이든은 루제프의 등을 발로 지그시 밟으며 웃었다.
“뒈지고 싶냐? 그렇지 않아도 내가 신관들을 더럽게 싫어하거든?”
카이든의 말에 나는 마법사들과 신관들 사이가 역사적으로 골이 깊다는 걸 떠올렸다.
“이거 뭐야, 심지어 주교복이네? 대주교야? 이야……. 내 손에 죽고 싶어서 기어 들어왔나?”
카이든의 말이 계속될수록 등이 밟힌 루제프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이 더러운 마법사가……!”
그러고 보니 신관들은 마법사들을 영혼이 타락한 인간 취급을 했다.
마법사들은 현대로 치면 과학자와도 비슷했는데, 그들은 오만 가지 연구를 다 했다.
연구라면 생체 실험도 마다하지 않는 게 마법사였다.
사실 실험이라면 신전에서도 했는데, 그들은 음지에서만 실험을 진행하면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마법사들을 비난했다.
당연히도 마법사들은 그런 신관들을 역겨워했고 말이다.
가만히 두 사람의 신경전을 지켜보던 에녹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루제프가 슬그머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옷을 정돈하고 있었다.
“야, 따까리. 누가 일어나랬어?”
카이든이 그의 어깨를 툭 치자, 루제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흔히 신관들이 자신을 낮출 때, 신의 종이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 마법사들이 이를 보고 신관들을 비하하는 말로 ‘따까리’라는 말을 쓰곤 했다.
“그 입 닥쳐라, 이 패배자야.”
루제프의 말에 카이든이 박장대소를 했다.
“하여간에 따까리 놈들은 욕도 할 줄 몰라요.”
“너희와 우릴 같은 선상에 두고 말하지 마라. 저급하니까.”
루제프가 이를 악물고 카이든을 노려보며 말했다.
카이든은 귀를 후비며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루제프를 열 받게 만들었는데, 아마도 의도한 행동인 게 분명했다.
나는 에녹과 팔짱을 끼고 서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다가 루제프에게 물었다.
“혼자예요?”
내가 기억하기로 루제프는 유안나 일행과 함께 다녔었다.
루제프는 카이든과 입씨름을 하다가 흥분해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나를 돌아봤다.
“아니요, 일행이 있습니다.”
역시나 여주와 함께 있는 모양이다.
“근데 왜 혼자 돌아다녀요?”
내 물음에 루제프의 얼굴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 그는 잠시 카이든과 에녹의 눈치를 살피더니, 내 어깨너머를 쳐다봤다.
의아해서 등을 돌렸더니, 루제프의 시선 끝에 내가 아까 잡아 온 물고기가 있었다.
“먹을 걸 구하려고…….”
루제프가 머뭇머뭇 말했다.
“……사실은 며칠째 과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질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그가 슬그머니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는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을 사냥했는데, 요즘 사냥 가능한 짐승도 보이질 않더군요. 물고기 사냥은 할 줄 아는 이가 없어서…….”
물고기 사냥을 할 줄 아는 이가 없다니.
나는 그제야 그쪽 남주들이 근위대 기사단장, 성직자, 왕세자뿐이라는 걸 떠올렸다. 하긴 그들이 물고기 사냥을 해 봤을 리가…….
“물고기 좀 나눠 줘요?”
내 물음에 루제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나 그는 곧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방 경계태세로 전환했다.
“아니, 그런데 플로네 영애는 정말로 제가 아는 플로네 영애가 맞는 겁니까?”
저건 나를 처음 만난 남주들의 필수 대사인가 보다. 꼭 해야만 하는 질문 리스트에 있기라도 한 걸까.
“네가 아는 플로네 영애가 맞든 아니든 그게 뭐가 중요하지? 어차피 그대는 오늘 이후로 마거릿을 보지 못할 텐데.”
에녹의 살벌한 읊조림에 루제프가 당황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이후로 마거릿을 보지 못할 텐데.’라니 그 말이 꼭 루제프를 죽이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메두사야 뭐야, 마거릿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죽는 거야?
나는 그 말이 웃겨서 실없이 웃음 짓고 말았다.
꼬르르르륵.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사이로 루제프의 배에서 밥 달라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동시에 루제프를 바라보자, 그가 당황하더니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마침 해가 저물려고 하고 있어서 우리도 저녁을 먹어야 할 타이밍이긴 했다.
내가 아까 사냥해 둔 물고기를 모닥불에 구웠는데, 그걸 본 루제프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고기를 이렇게 구워 먹는군요.”
루제프는 말을 하면서 입맛을 다셨는데, 본인이 그러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밥심이 얼마나 중요한데.
조금 불쌍해져서 나는 그가 나더러 마녀라고 했던 것도 잊었다. 구운 생선을 허겁지겁 삼키는 그에게 내 몫의 생선도 하나 더 건넸다.
그가 감동한 얼굴로 연신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역시 배고픔 앞에는 자존심도 없는 모양이다. 싫어하는 사람의 호의도 감사히 받는다니.
루제프는 결국 에녹 몫의 생선까지 해치우고서야 만족한 얼굴로 식사를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