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미쳐 버리면 나 역시 곤란하니, 보다 적극적으로 그에게 노동을 시켜야 했다.
“저기 마거릿, 앞으로라니……. 나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말한 건데.”
“사냥도 지금 해야 할 일인데? 앞으로도 계속 몸을 움직이고 싶을지도 모르잖아. 한번 맡아서 해 봐.”
카이든의 반문에 나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카이든이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너…… 그냥 이때다 싶어서 식사 당번으로 부려 먹으려는 거지?”
“눈치챘어?”
내가 웃으면서 묻자 카이든이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내쉰다.
“내가 먼저 물어본 거니까 그냥 속아 준다. 대신에.”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게로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코앞으로 그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자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여기에 입 맞춰 줘.”
“싫으면 사냥은 그냥 내가 할게.”
그렇게 칼 같이 대답을 하고 있을 때, 에녹의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로드는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그 입, 영원히 못 쓰고 싶은가?”
에녹이 매우 단호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카이든을 내게서 밀어냈다.
‘에녹의 말투가 점점 거칠게 변하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방심하고 있다가 맥없이 밀려난 카이든이 황당하단 얼굴로 에녹을 쳐다봤다.
“말이 심하십니다?”
카이든이 화가 잔뜩 치민 목소리로 반박을 할 기미를 보였다.
나는 그의 눈에 광기가 스미는 걸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감정 제어를 못 하는 카이든과 피를 보면 폭주하는 에녹이 부딪히면 아주 대참사가 일어날 거다.
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찍은 뒤, 그 손가락을 카이든의 뺨에 찍었다.
“됐지? 네가 좋아서 해 준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이제 그만 사냥 다녀와.”
에녹도 카이든도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조금 전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먼저 정신을 차린 카이든이 예쁘게 눈웃음을 지며 나를 쳐다봤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카이든과 대조되게 에녹은 조금 화가 난 얼굴이었다.
“마거릿.”
에녹의 잔소리가 시작될 것 같아 나는 황급히 꽁무니를 뺐다.
“저는 물고기 사냥이나 할게요. 에녹은 불 좀 다시 피워 줘요.”
등 뒤로 두 남자의 시선이 따갑게 찌르는 것 같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카이든도 에녹처럼 폭주하거나 하진 않겠지?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는 걸까?’
나는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래도 카이든은 마력의 흐름을 조절해 주면 폭주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당장엔 내가 없으면 에녹의 발작을 막을 사람도, 카이든의 광기를 조절해 줄 사람도 없었다.
“마거릿, 나도 그대가 신경 쓰인다고.”
“하지만 마거릿, 네게 관심이 생기는 건 이유가 뭐든 내 감정이잖아. 그러니까 그건 내가 결정해. 방금 그 훈계는 조금 건방졌어.”
나는 얼마 전에 두 남자가 내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사람 심란하게 왜 그런 말을 해서는…….’
차라리 고백을 해 버리면 마음 편하게 거절이라도 했을 텐데, 그 애매함은 뭐람.
별 생각 없이 지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괜히 두 사람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일단 사냥이 더 중요해.’
그렇게 한참을 물속에서 물고기 사냥을 한 뒤에 나는 숯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했다.
요즘은 카이든과 에녹이 종종 야생 동물을 사냥해 왔기에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 장작으로는 고기를 굽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는 거다.
‘쉽게 타거나, 혹은 잘 익지 않거나.’
그래서 오늘은 숯을 만들기로 했다.
나는 구덩이를 파고 안에 부싯깃으로 쓸 만한 얇은 잔가지들을 모아 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 숯을 만들 짧은 나무 장작도 넣었다.
“뭐 하는 거지?”
장작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고 불을 피우는 내게 다가온 에녹이 물었다.
“숯 만들어요. 아, 숯이 뭐냐면…….”
“숯이 뭔지는 알지. 그저 그대가 못 하는 건 뭔지 궁금해졌을 뿐이다.”
에녹이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나는 민망해서 뺨을 긁적였다. 대단한 걸 하고 칭찬받았으면 모르겠는데, 이건 정말 별게 아니라서…….
“만드는 거 엄청 쉬워요.”
캠핑 가서 해 본 적도 많았으니까. 팔짱을 낀 채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에녹이 조용히 읊조렸다.
“제국으로 돌아가면 플로네 공작을 꼭 한번 만나 봐야겠군.”
결의를 다지듯 하는 그의 말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 문제는 코앞에 닥치려면 멀었으니 미뤄 두자.
“불은 내가 피울 테니, 다른 걸 하고 있어라. 손목 다쳐.”
에녹이 내 손에 들린 나무 막대를 빼앗아 들고는 내 옆에 얌전히 앉았다.
이제는 에녹도 요령이 생겼는지 속도감이 붙어 불을 빠르게 지필 수 있었다. 그는 장작 피라미드 안에 놓인 작은 조각 장작에 불을 넣었다.
불꽃의 색깔을 보며 고온이 된 걸 확인한 뒤, 그동안 모아 둔 재를 이용해 장작 피라미드의 구멍을 단단히 채웠다.
“한두 시간 정도 뒤에 확인해 보면 될 거예요.”
내 말에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디에고 경은 소식 없어요?”
“그도 최근에 거처를 옮긴 모양이더군. 그 외에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여전히 에녹은 그들과 함께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일까.
차라리 여주를 빨리 만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공존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나는 그냥 얌전히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사냥 나간 카이든이 돌아왔을 때즈음에 숯이 완성되었다.
카이든은 작은 새를 들고 오두막 앞으로 와서는 숯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거릿, 숯도 만들었어? 이야, 이제는 진짜 얘기해도 된다니까. 너 귀족 아니지?”
입버릇이 된 것 같은 카이든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흘겨봤다.
“그러는 너는 네가 귀족답다고 생각해?”
“아니, 난 내가 귀족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서 괜찮아.”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이 없었다. 제기랄. 나도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걸.
“저녁은 나랑 에녹이 준비할 테니까 씻고 와. 고생했어.”
내 말에 카이든이 생글생글 미소 짓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씻을 건데?”
“뭐? 왜? 더럽게.”
“네가 입맞춤까지 해 줬는데 바로 씻으면 너무 아깝잖아.”
“내가 언제 너한테 입맞춤을 했어?”
그걸 입맞춤이라고 할 수 있나?
황당해서 그렇게 되묻고 있을 때였다.
내 옆에 조용히 앉아 숯에 불을 피우고 있던 에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카이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훅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카이든이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뭐, 뭐야?”
카이든이 당황하는 사이, 에녹이 거침없는 동작으로 그의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내가 아까 손가락으로 찍어 눌렀던 카이든의 왼뺨에 검은 숯이 지저분하게 묻어났다.
“씨X, 이게 무슨 짓입니까?”
카이든이 불쾌하다는 티를 잔뜩 내며 에녹의 손을 쳐냈다. 제 뺨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뺨에 더러운 게 묻었군. 마거릿 앞에서 거슬리게 굴지 말고 씻고 와라.”
매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 에녹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걸린다.
‘뭐야, 왜 저렇게 섹시하게 웃어.’
그의 요염한 미소를 보며 넋 놓고 있는 사이, 내 옆에 앉은 그는 불붙인 숯을 살피고 있었다.
‘저, 정신 차리자.’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에녹의 등 뒤에 대고 손가락 욕을 하고 있는 카이든을 향해 말했다.
“카이든, 그러고 있지 말고 씻어. 뺨에 숯가루가 잔뜩 묻었어.”
“뭐……?!”
카이든이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뺨을 만졌다. 그러곤 손바닥에 검은 가루가 묻어나오자 욕설을 뱉었다.
나는 그가 황급히 강가로 달려가는 걸 보고 그만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 * *
다음 날, 나는 작살을 들고 강으로 나가서 물고기 사냥을 했다.
조만간 카이든에게 통발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매번 이렇게 드레스를 입은 채로 물속에 들어가서 사냥하는 것도 지쳤다.
‘현대 옷을 빨리 찾고 싶은데.’
내 드레스도 너저분했지만, 에녹의 제복도 만만치 않게 너덜너덜했다.
‘원작에선 유안나가 분명, 섬에서 찾은 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었는데……. 워커 같은 신발도 있었고.’
한두 개가 아니라 꽤 많은 양의 옷들이 섬 곳곳에 숨겨져 있다고 했었다.
‘보급품 찾는 서바이벌 게임도 아니고. 섬 안에 숨겨진 현대 물건을 찾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그림이잖아.’
꼭 게임같이.
그런 생각들을 하며 물고기 사냥을 하고 강물에서 나올 때였다.
가까운 수풀 사이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 소리가 아니라면,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 같은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작살에 끼워진 물고기 세 마리를 빼서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손안에 작살을 고쳐 쥐고 그대로 던졌다.
소리가 난 방향을 살짝 비켜가게끔 던졌는데,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물에 들어가느라 강가 앞에 잠시 내려놨던 조명탄을 주워 들고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걸어갔다.
“제기랄! 이게 무슨 짓입니까, 플로네 영애!”
그곳에는 전에 만났던 루제프 주교가 바닥에 볼품없이 주저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