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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30)화 (30/234)

나는 당황해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당연히 에녹이라면 한 발 물러설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외려 두 발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원래 이렇게 저돌적인 사람이었나?

나는 애써 정신을 차렸다. 이 험난한 섬에서 살아남으려면, 타인에게 맥없이 휘둘리면 안 된다.

그게 고작 ‘신경 쓰인다’ 정도로 끝나고 마는 불확실한 감정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나는 조금 단호해지기로 했다.

“제게 호감을 갖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면서요. 그러니 헛된 기대는 품지 말라면서요.”

내 말에 정곡이 찔린 모양인지 에녹이 괴로운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그가 내게 했던 모진 말들은 과거의 마거릿으로서는 자업자득이었으니 그걸 에녹이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더 진전되면,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피차 성가셔지잖아요. 그러니 이쯤 할까요?”

이번에도 나는 그가 내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줬다. 내가 한 소심 하는지라 상처받은 말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편이었다.

에녹은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가 어울리지 않게 자책하는 모습이 조금 짠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에녹. 저는 살고 싶어요. 당신도 살아남았으면 좋겠고. 이건 진심이에요.”

에녹에겐 그 말이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놀란 듯 커진 금안이 매섭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우리 지금은 생존만 생각해요. 다른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잖아요.”

그 말을 들은 에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치받는 어떤 감정을 억누르듯이.

* * *

에녹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서 동굴을 나왔는데, 동굴 앞에는 카이든이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리가 의자 대용으로 사용하는 쓰러진 나무 기둥 위에 얌전히 앉아서 어둑한 수풀만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그가 꺼림칙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찾으러 돌아다녔다는 사람에게 감사 인사도 하지 않을 정도로 몰인정하진 못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나 찾으러 다녀왔다고 들었어.”

카이든이 나를 돌아봤다.

“네가 무사했으니 됐어.”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눈을 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하늘에서는 이상한 마법진이 피어올랐지, 해가 지는데 너는 없지……. 황태자는 무슨 분리 불안이라도 있는 것처럼 너를 찾다가 미쳐 날뛰지. 그것도 뭐 됐어. 네가 무사하니까.”

아. 동굴이 난장판이었던 이유는 역시 에녹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분리 불안이라니……. 내가 그의 폭주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유대가 형성된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다시 카이든을 쳐다봤다.

“너는 괜찮아?”

내 물음에 카이든은 대답 없이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시선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왜?”

“안에서 하는 얘기 다 들었어.”

“……어, 그래?”

‘그 부끄러운 대화들을 다 들었다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손부채질을 하며 시선을 회피하려고 했는데, 카이든이 손끝으로 내 턱 끝을 살짝 잡아 올렸다.

덕분에 다시 카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있잖아. 어떡하지. 나도 너한테 관심이 생겼는데.”

그의 말에 나는 그저 두 눈만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에녹이야 함께한 시간이 있다지만, 카이든은 왜……? 거기다가 두 남자가 꼭 짜기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고백을 한다.

“농담하지 마. 나한테 관심을 왜 가져? 내가 싫다 할 땐 언제고?”

그의 첫인상이 좋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그가 어떤 남자인지 알고 있어서일까. 카이든은 무슨 말을 해도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내 되물음에 그의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가 나를 찬찬히 훑었다.

나는 결 좋은 은발이 더운 바람에 살랑이며 흔들리는 걸 가만히 바라봤다.

카이든의 날카로운 고양이 눈매가 재미있다는 듯이 휘어진다. 그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 왜 웃는 거지? 뜻 모를 웃음에 나는 의아해서 두 눈만 깜빡였다.

“내가 농담하는 것 같아?”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뽀얀 것 같은 새하얀 피부와 붉디붉은 눈동자가 시야에 담겼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카이든을 두고 방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이거 놔.”

내가 아픈 듯 미간을 모으자 그가 곧장 내 손목을 놓았다.

“미안. 그리고 전에 널 위협했던 것도 미안해. 싫어한다고 말한 것도.”

그가 다소 볼멘소리로 말을 하고는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건 됐고…….”

내가 입을 열자 카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너 나 안 좋아하잖아.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고.”

카이든의 입매가 빳빳하게 굳었다.

어차피 에녹도 카이든도 여주를 만나면 달라질 것 같은데…….

내가 그들을 믿고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마도 그 이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카이든이 시치미를 뚝 떼며 대답했다. 나는 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봐. 너랑 나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너는 대놓고 나를 싫어한다고 경멸하듯이 말했잖아. 그런데 너한테 내가 어떻게 호감을 가질 수가 있겠어?”

내 말에 카이든이 아차 싶은 얼굴로 움찔했다. 그러고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는다.

나는 그의 오른쪽 귀에 걸려 있는 귀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감정 조절 잘 못 하는 거 알아. 그 귀걸이가 감정을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지금 고장 났잖아.”

내 말에 카이든의 눈동자가 커진다. 정말 놀란 얼굴이었다.

“너…… 그걸 어떻게……!”

“그 귀걸이를 만든 사람을 알거든. 아무튼 중요한 건, 귀걸이의 힘을 빌리지 않고 여기서 네가 감정 조절을 제대로 해야만 한다는 거지.”

물론 귀걸이를 만든 사람을 직접적으로 아는 건 아니다. 원작에서 카이든이 유안나에게 해주던 말이 기억났을 뿐이지.

내 말에 카이든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좋아하지도 않을 상대에게 그런 이상한 말 하는 거 이해해. 귀걸이 때문이잖아.”

에녹에게 냉정하게 구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카이든은 아니었다. 그는 에녹과 달리 나와 함께한 시간이 짧았으니까.

“하지만 이 이상은 안 돼. 나중에 후회할 소리 하지 마.”

나는 그대로 그의 손을 놓고 돌아섰다. 그러나 카이든이 다급하게 내 손목을 다시 잡아당겼다.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은 그의 얼굴이 코앞에 닿았다.

“그래, 너도 어이없겠지.”

그는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 지었다.

“하지만 마거릿, 네게 관심이 생기는 건 이유가 뭐든 내 감정이잖아. 그러니까 그건 내가 결정해. 방금 그 훈계는 조금 건방졌어.”

그는 보조개가 움푹 들어가는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내 손등에 길게 입을 맞췄다.

란그리드 제국 방식의 인사였지만, 카이든이 내게 하는 건 느낌이 조금 달랐다. 부드럽고 눅진한 감촉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다.

나는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빼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건방져. 아주 제멋대로야. 알지?”

“알아.”

카이든이 조금 음울한 얼굴을 하고는 대답했다.

나는 가만히 그런 그를 쳐다보다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동굴 입구에 서 있던 에녹과 마주치고 말았다.

……카이든과의 대화를 들은 건가?

하지만 지금 나는 너무 쉬고 싶었다. 그래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얌전히 내 자리로 돌아가 자리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마거릿, 네게 관심이 생기는 건 이유가 뭐든 내 감정이잖아. 그러니까 그건 내가 결정해. 방금 그 훈계는 조금 건방졌어.”

카이든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나는 한 번은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인걸.

부디 이들이 여주를 만나고서 오늘 했던 말을 후회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 * *

역시나 나는 다음 날 앓아누웠다. 감기 같은 열병이 아니라, 근육통으로.

눈을 뜨면 에녹과 카이든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싶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내가 하도 고통스러워하자 에녹이 안절부절 못 하고 내 주변을 맴돌며 수발을 들었다.

나는 굳이 그의 도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정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거릿의 몸은 정말 약했다. 조금 괜찮아지면, 바로 체력 단련부터 시작해야겠어. 이래가지고 이 살벌한 무인도에서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결국 나는 나흘 꼬박 근육통에 시달리고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동굴 밖으로 나오니, 입구에 모닥불을 만들고 있는 에녹이 보였다. 그 옆에는 카이든이 나무껍질을 아주 얇게 잘라 꼬아서 끈처럼 묶는 중이었다.

소설에서도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도 카이든은 별 신기한 재주가 많았다.

“몸은 괜찮나.”

어느새 에녹이 다가와서 내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뒤로 카이든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안색을 살폈다.

“더 쉬지.”

카이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리고 에녹을 보면서도 강조해 말했다.

“정말이에요.”

에녹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내 뺨을 한 번 더 매만지다가 아쉬운 듯 내게서 떨어졌다.

피곤한 얼굴로 모닥불 앞에 모여 앉은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걸 지켜보았다.

“섬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군.”

에녹이 답지 않게 막막하단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든, 섬에 다른 사람은 못 봤어?”

나는 은근슬쩍 떠보듯이 카이든을 향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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