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남주들을 피해 숨어 있겠다는 내 계획은 전부 망했다. 벌써 남주 후보를 세 명이나 만나고 말았다.
그래, 어차피 초장부터 망한 계획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에녹을 만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이 섬에서 눈을 떴을 때, 정신 차리자마자 에녹을 걷어차고 곧장 도망쳤어야 했어!
물론 혼자 숨었다고 해도 과연 마물들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뭐, 이젠 그것도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그런데 루제프는 대체 해가 저무는 시간에 산 중턱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마거릿!”
조명탄을 잘 챙겨서 동굴까지 내려왔는데, 동굴 앞에서 무기를 들고 서 있던 에녹이 내게로 달려와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할 즈음에 그가 나를 놔줬다.
“하늘에서 이상한 마법진을 봤다. 그래서 네가……! 나는 네가……! 후…….”
에녹의 목소리는 몹시 격앙되어 있었다.
때문에 나는 루제프 주교 얘기를 할 타이밍을 놓쳤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내 사과에도 에녹은 화가 잔뜩 났는지 대답이 없었다.
되도 않는 변명이라도 주절주절 읊고 싶은데 정말 힘이 없었다.
‘나 죽다 살아났어.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말아 줘요.’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은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럴 줄 알았다. 내일은 정말로 일어나지 못하고 근육통으로 고생할 것 같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에녹이 나를 번쩍 안아 든다.
이 섬에 와서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에게 이렇게 안기는 것이. 단단하고 따뜻한 가슴팍에 감싸이자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란그리드 제국이었다면 정말 상상도 못 했을 일이긴 했다.
“……그런데 동굴 상태가 왜 이래요?”
동굴이 엉망이었다. 애초에 살림도 별로 없긴 했지만, 그래도 그간 힘들게 만들어 뒀던 작살이며 코코넛 그릇 등등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꼭 동굴 안으로 폭풍이 휘몰아친 것만 같았다. 아니면 도둑이라도 들었나?
“그건…….”
에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동굴을 훑다가 간략히 대답했다.
“그냥 그렇게 됐다.”
그게 뭔 말이지.
동굴에서 유일하게 멀쩡하게 남아 있는 건 내 잠자리뿐이었다.
에녹은 내 몫의 간이침구인 커다란 나뭇잎 위에 나를 내려놨다. 그러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카이든은 어디 갔어요?”
“그댈 찾으러.”
에녹이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카이든까지 위험한 밤중에 나를 찾으러 갔다니 미안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내가 폐를 끼치다니.
“등산을 했어요. 금방 다녀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랜만의 산행이라서 제가 시간 감각을 잃었나 봐요.”
나는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놨다. 하지만 사실이다. 진짜로 해가 지기 전엔 돌아오려고 했었으니까.
“다친 곳은 없나.”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발바닥이 쓰라려서 미간을 좁혔다. 물집이 다시 터진 모양이다.
가만히 나를 보던 에녹이 내 발목을 잡았다. 커다란 손이 내 발목을 한 번에 감쌌다. 나는 조금 긴장했다.
그가 내 발에서 플랫 슈즈를 조심히 벗겼다.
물집이 생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게다가 발이 까지고 찢어져서 상처가 난 곳도 적지 않았다. 역시 플랫 슈즈는 야생에 적합한 신발이 아니다.
에녹은 엉망이 되어 버린 내 발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나는 맨발을 한참 동안 내보이다가 너무 민망해서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에녹이 이 정도 상처는 볼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저 동굴 뒤에 있는 산을 한 번에 뛰어 내려왔거든요. 마물들이 쫓아왔어요. 살아 있는 게 참 다행이죠. 하, 하, 하하…….”
말을 계속할수록 에녹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말끝을 흐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에녹은 약통을 들고 와서는 내게 소독약이 어느 건지 물었고, 나는 그에게 자주 쓰는 약들을 설명해 줬다.
설명이 끝나자 또다시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죽을 것 같다. 제발 차라리 화를 내 줘.
에녹은 얌전히 내 발에 소독약을 바르고는 연고를 덧발라 상처를 치료했다.
“아앗. 아파요.”
“참아.”
그리고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내게 단호한 말로 대답했다. 화난 거 맞네.
에녹은 까진 상처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물집이 터진 곳에는 거즈를 붙였다. 내가 하는 걸 몇 번 보더니 이제는 능숙하게 도구를 사용할 줄 알았다.
“차라리 화를 내요.”
나는 결국 참다못해 그에게 말했다.
에녹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의 무릎 위에 내 발을 올려놓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화난 거 아니다.”
그가 다시금 고개를 내리고는 내 발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무의식중에 그런 행동을 한 것 같으나 살갗에 닿는 감촉이 정말 기묘했다.
“그럼 왜 그러는 건데요?”
“미안하다. 그대한테 화난 거 아니야. 나한테 화가 난 거지.”
나는 에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래.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지낼 수 있게끔 해 줬어야 하는데, 내 능력이 미흡해 그대를 자꾸 다치게 하는 것 같…….”
“아니 잠깐만요, 에녹.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황급히 에녹의 말을 잘랐다.
그가 덤덤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는데, 그 눈빛이 왠지 애달파서 보는 나마저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분명 이 섬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주 신랄하게 나를 비난하고 싫어하던 사람이었는데.
“제가 바보 같아서 다친 거지, 그게 왜 에녹 탓인가요?”
나는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와서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에녹은 얌전히 내 말을 경청했다.
“이번 건…… 제 실수예요. 애초에 에녹이 절 책임질 의무는 없어요.”
혹시 그것 때문인가? 제국으로 돌아가면 이 상황에 대해 제대로 추궁을 해야 해서?
‘그건 좀 일리 있다.’
“걱정해 준 건 고마워요. 하지만 전 이 야생에서 편하게 지낼 생각 없어요.”
편안하게 지내는 건, 섬을 탈출하고 해도 좋다. 여기선 그렇게 안일하게 지내다간 비명횡사하기 십상이다.
두 번이나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지.
“그리고 절 지킬 생각하지 마시고 본인 걱정부터 하세요. 저 없으면 이 섬에서 하루도 못 버티실 거잖아요.”
물론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만, 나는 일부러 과장해서 말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에녹이 내 말에 수긍했다.
“그건 그렇지. 그대 없이 혼자서는 이 섬에서 버틸 수 없어.”
응?
나는 당황해서 그를 바라본 채 눈만 깜빡였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면 오늘 에녹이 뭘 잘 못 먹었나?
내 표정을 본 에녹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군.”
에녹의 무릎 위에는 여전히 내 맨발이 올라가 있었다. 민망해서 빼내려고 했는데 그가 내 발을 잡고 있어서 타이밍이 애매해졌다.
“신경이 쓰여 미칠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녹의 말에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네?”
에녹의 금안이 고요하게 나를 향했다. 거짓이라곤 한 줌 없는 눈빛이다.
“마거릿, 나도 그대가 신경 쓰인다고.”
에녹의 중저음은 듣기가 좋았다. 동굴 안이라서 그의 목소리가 더 기분 좋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잠깐……. 나도, 라니?’
그건 마치 내가 그를 신경 쓰고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전제잖아. 아무래도 에녹은 내가 아직도 저를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에녹의 말뜻을 파악한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본인도 이성적으로 나를 신경 쓴다는 얘기겠지. 아니, 갑자기 왜. 대체 왜 나를…….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함께 생활하며 그에게 정이 생기긴 했다.
다소 스킨십이 잦긴 했으나, 생사를 넘나들며 불가피하게 이뤄졌던 거라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았고.
아직은 그뿐이다. 나는 무엇보다 살고 싶었다. 내겐 그 생각뿐이었다.
“이해해요. 함께 지내다 보면 당연히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죠.”
결국 나는 일부러 눈치 없는 사람처럼 동문서답을 했다.
물론 마거릿이 그를 좋아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는 그것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과거니까.
에녹이 난감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거릿, 그런 의미가 아니…….”
“하지만 에녹, 그런 사소한 감정을 신경 쓰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면 생존에 지장이 생길 텐데, 좀…… 자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름 이성적인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꽤 훌륭한 대답이었겠지?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에녹의 낯빛은 썩 좋지 않았다. 한참 동안 이어진 불편한 침묵 끝에 에녹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마음대로 됐으면.”
그가 조용히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