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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8)화 (28/234)

자칫하면 발을 잘못 디뎌 낙상사할 수도 있겠으나,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와서 도저히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니까 사위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우우우!

어디선가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에 식은땀이 났다.

“미쳤어, 미쳤어!”

등 뒤로 무언가 빠르게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풀이 길을 내듯 기울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서 나는 울고만 싶었다.

한참을 달려 내려왔지만, 아직도 산 중턱이었다. 가엾은 발바닥에 또 물집이 터진 것 같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우! 아우! 아우우우!

그리고 등 뒤로 쫓아오는 마물들이 갑자기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설마 다른 마물들을 더 모으는 건가? 대체 얼마나 많은 마물이 쫓아오는지 궁금했지만 뒤를 돌아볼 시간 따위는 없었다.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참으면 돼!

나는 코너가 꺾이는 구간에서 미끄러지듯 발에 브레이크를 건 뒤, 옆으로 꺾어 거대한 바위를 기점으로 한 바퀴 돌아 아래로 내려갔다.

돌아보지 않아도 따라붙는 짐승들의 기척이 어마무시했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 내려가는데, 이 와중에 여유작작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내 시야에 포착됐다.

잠깐, 사람이라고?

“비켜! 비켜! 비켜요!!”

난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남자가 아주 느릿하게 나를 돌아봤는데, 나는 그의 옆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그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함께 달렸다.

“무, 뭡니까?!”

남자가 내 손에 이끌려 함께 산 아래로 달리며 내게 소리쳐 물었다. 등 뒤로 쫓아오는 마물들을 본 건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대체 마물들이, 왜 저렇게 모인 거죠? 혹시 아까 하늘에서 터진 이상한 마법 때문일까요?”

나는 남자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말을 골랐다.

“우선 이 섬에서는, 헉,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 아시죠?”

내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까 보신 건 마법이 아닐 거라고요!”

등 뒤로 난리가 난 짐승들의 울음소리에 나도 함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조명탄이 터지는 바람에 마물들이 이렇게까지 몰려든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일반적인 조명탄이라면 불꽃놀이 폭죽처럼 그렇게 화려하게 터지지 않는다고.

‘대체 조명탄을 어떻게 개조하면 이렇게 되는 거지?’

하산 코스의 끝에 달함에 따라 경사가 점차 완만해졌지만, 그럼에도 비탈에서 뛰는 게 쉽지는 않았다.

남자와 나는 묘기를 부리다시피 달렸는데 넘어지지 않는 것이 정말로 용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대로는 금방 따라잡힐 것 같은데……!

거칠게 뛰고 있으려니 드레스 주머니에 넣었던 조명탄이 허벅지에 걸리적거리며 부딪혔다.

앞길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쳐내면서 허벅지에 느껴지는 감각을 신경쓰다가, 나는 문득 이 상황을 타개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좋은 생각이 났어요! 제가 신호하면 엎드리세요!”

나는 주머니에서 방금 주워 온 조명탄을 꺼냈다. 그러고는 멈춰 설 곳을 가늠했다.

다행히도 50m쯤 앞에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저 앞에 기대면 되겠다.

“네?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말에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지만, 나는 그의 질문에 답해 줄 시간이 없었다.

곧장 조명탄을 장전하고 해머를 당겨 내렸다. 그리고 가까워진 바위에 등을 기대고 돌아서서 남자를 향해 말했다.

“엎드려요!”

남자가 황급히 엎드린 사이 나는 달려드는 마물 떼를 향해 조명탄을 쐈다.

못해도 열 마리가 넘는 늑대형 마물들 사이로 붉은 연기가 파고들더니, 찰나 후에 커다란 불꽃이 터졌다.

그러자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근방에 있던 마물들이 튕겨 나갔다.

나는 남자 옆에 함께 엎드려 불꽃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불꽃이 잦아들고 마물들의 기척도 들리지 않자 나는 남자와 함께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마물들이 전멸했다. 원샷원킬인가.

나는 방금 쏜 물건을 다시 봤다. 생긴 건 꼭 권총처럼 생긴 게, 조명탄이라니. 그것도 화려한 불꽃 조명탄!

“하, 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당신 뭡니까?”

남자가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굉장히 까칠하고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물빛처럼 연한 하늘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장발이었는데, 무척이나 곱고 아름다워서 꼬질꼬질한 모습의 나보다 몇 배는 더 예쁜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장발을 보자마자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최근에 교황 후보에 오른 교황청의 열두 사제 중 한 명인, 루제프 대주교였다.

루제프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내게 재차 따져 물었다.

“마녀입니까?”

“마녀겠어요?”

물론 그는 조명탄이나 불꽃놀이를 본 적이 없을 테니 요상한 마법을 부렸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 소설 속에서는 여주가 아무리 이상한 물건을 사용해도 마녀라는 소리 안 했잖아……!

“그럼 뭡니까, 정체가?”

“우리 통성명부터 할까요? 기껏 구해 드렸더니 말을 참 예쁘게 하시네요? 다시 마물 밥이 되고 싶으신가 봐요?”

내가 들고 있던 조명탄을 하늘을 향해 쏘는 시늉을 하자 루제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뒤늦게 내가 그를 구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모양인지, 전보다 차분해진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특유의 까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구해 주신 건 일단 감사드립니다.”

‘일단’ 감사한 건 대체 뭘까.

황당했지만, 나는 일단 어깨끈을 돌려 대나무 통 안에 탄알 주머니가 무사히 들어 있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때 루제프가 갑자기 내 어깨를 잡았다.

“잠깐…….”

그러고는 내 얼굴을 찬찬히 훑더니, 갑자기 삿대질을 했다.

“혹시 플로네 영애?”

그러고는 내가 긍정을 하지도 않았는데 불쾌하다는 얼굴로 와락 인상을 구겼다.

“설마 여기까지 절 쫓아오셨습니까?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 달라고?”

사랑의 묘약이라니. 뭔 개소리…….

그때 마거릿의 과거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거릿은 에녹이 자신에게 반할 수 있게 성수로 사랑의 묘약 같은 걸 만들어 달라고 루제프의 뒤꽁무니를 엄청나게 쫓아다녔다.

그러나 루제프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자, 별의별 수로 그를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러다 기어코 다른 신관을 부추겨서 ‘사랑의 묘약’ 실험을 추진하고 후원까지 했지.

그가 마거릿을 싫어할 만도 했다.

마거릿, 대체 왜 그렇게 살았던 거야! 적이 너무 많잖아!

나는 안면몰수하고 일단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 보았다.

“그런 거 아닌데요. 그리고 저 플로네 영애 아니에요.”

그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으나, 루제프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이 나를 노려봤다.

“플로네 영애. 혹시 이 섬에 저를 납치해 온 것도 영애의 짓입니까?”

이제는 누명까지 씌운다. 자칫 그의 말에 휘둘리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내가 정말로 누명을 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저 플로네 영애 아니라고요! 사람이 왜 이렇게 무례하세요? 그리고 저도 죽을 뻔했거든요?”

내 비명 같은 외침에 그가 당황해서는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영애.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난리……!”

“영애는 누가 영애야! 아니라고 했잖아! 이보세요, 당신! 내 덕분에 목숨 건졌잖아! 맞아, 아니야?”

“그, 그야 그렇지만……!”

이럴 땐 일단 목소리가 크면 이긴댔다.

“그럼 넙죽 절하면서 감사합니다, 은혜를 백배로 갚겠습니다, 해도 모자랄 판에! 어!”

나는 주눅 들지 않고 끝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갈 때까지 감사합니다~ 하며 절하고 있어! 알아들었어?”

그리고 해결책이 없어 보일 땐, 튀어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구 지껄이고는 일단 튀었다.

괜찮아, 괜찮아. 앞으로 안 만날 거니까.

제발 그렇다고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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