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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은 임시 베이스캠프였다.
이곳은 오래 지낼 수 있을 만큼 쾌적한 환경이 아니라서 우리는 더 좋은 거처를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수시로 동굴 주변을 정찰했다.
에녹과 나는 수시로 정찰을 하며 구조 요청을 할 방도나 탈출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에녹 몰래 오두막과 벙커도 찾아다녔다.
카이든은 상처가 나으면 떠나겠다고 하더니, 상처가 호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동굴을 나가지 않았다.
처음엔 에녹이 말을 안 듣는 그를 동굴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그는 동굴 앞을 지키며 이틀 밤을 새우는 집요함을 보였다.
결국 에녹도 하는 수 없이 그를 안으로 들였다. 마물이 돌아다니는 밤에 사람 냄새를 풍기며 동굴 앞에 있다가 어떤 참사를 맞이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다간 자칫 에녹과 나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카이든은 정말로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그가 아직까지는 특별히 문제 될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또 언제 미친 짓을 할지 몰라서 에녹이 내 옆에 꼭 붙어 다니긴 했다.
한 며칠을 그러다가 지쳐서, 에녹도 나도 카이든이 옆에 다가와도 별다른 말 없이 내버려 두게 되었다.
“내 생각보다 더 부지런하네. 무슨 귀족이 새벽부터 일어나?”
이른 새벽부터 열심히 움직이는 나를 관찰하던 카이든이 한마디 했다.
마침 정수한 물을 코코넛 그릇에 옮겨 배분하고 있던 나는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나는 정말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계곡으로 가서 물을 정수해 두고 열매를 채집했다. 종종 사냥을 나가기도 했다.
바닷가로 나가 물고기 사냥을 해 오는 건 보통 에녹과 내가 번갈아 했는데, 불 피우기는 늘 에녹 담당이었다. 내가 불을 지피는 덴 영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열량 소비가 너무 많아서 그만큼 식량도 많이 구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베이스캠프를 옮기려면 부지런히 준비를 해 둬야 해.”
나는 에녹이 잘라 준 대나무 통에 정수된 물을 담으며 대꾸했다. 이 대나무 통은 텀블러 대용이었다.
그리고 대나무 통을 길고 단단한 덤불 줄기로 엮어 크로스백처럼 만든 뒤, 어깨에 사선으로 멨다.
“거처를 옮기려고? 왜?”
“여긴 식량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고, 환경이 쾌적하지 않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대나무 통을 든 채, 플랫 슈즈를 고쳐 신었다.
“어디 가?”
“주변 정찰하러.”
정확히는 등산이다. 마지막 등산. 이번에도 오두막이나 벙커를 발견하지 못하면 진짜로 이 근방을 뜰 생각이라서.
운이 좋아서 섬의 비밀에 대한 단서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침 에녹도 아침 사냥을 나간 참이라 혼자 등산을 다녀오기 딱이었다.
“그럼 쉬고 있어.”
“어? 자, 잠ㄲ……!”
카이든은 나를 따라 나오려다가 상처 때문에 통증이 있었는지 길게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그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가벼운 마음으로 동굴을 벗어났다.
이제는 섬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해서 나를 감싸고돌던 에녹도 노을이 지기 전까지는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에녹의 과보호가 심한 것 같지만, 그래도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벌써 이 섬에 도착한 지 3주가 다 되어 가지만 그간 우리가 건진 정보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 했다.
나는 산 중턱에 서서 심호흡을 한 뒤,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 정도만 올라왔는데도 섬 일부는 훑어볼 수 있었다. 조금 더 높이 올라가야 더 멀리 볼 수 있겠다.
에녹이랑 지내던 동굴은 이렇게 위에서 바라보니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하긴 저렇게 해변과 가까운 동굴이니 물고기 사냥도 금방 다녀올 수 있었지.
게다가 산속 깊이 있는 동굴이었으면 그건 또 그거대로 위험했을 거다. 마물과 야생 동물이 판을 치는 섬이니까.
나는 들고 있던 대나무 통의 뚜껑을 열어 보관해 둔 물을 마셨다.
근래 마거릿의 몸으로 무리를 많이 해서인지 굉장히 힘들었다. 내일부터는 체력 단련도 좀 해야지.
나중에 플로네 저택으로 돌아가면 마거릿의 어머니가 근육이 생겼다며 뒷목 잡고 기절하겠지만, 하는 수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체감상 한 시간가량 더 산을 오르니 드디어 정상에 다다랐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 내며 잠시 바닥에 누웠다. 숨이 차서 호흡 곤란이 올 것만 같았다. 가져온 대나무 통에 든 물도 한 번에 털어 마셨다.
이대로 죽는 건 아닌가 쓸데없는 걱정도 들었지만, 성취감은 대단했다.
“아니, 내가 왜 자꾸 이 외딴섬에서 성취감을 찾고 난리인지 모르겠네.”
해가 점점 기울고 있었다. 하산하다가 해가 질 것 같아 불안해져서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다시 본 섬은 역시나 상당히 크고 넓었다. 이 정도면 정말 서울 크기라고 봐도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젠장, 이 넓은 곳에서 오두막과 벙커를 어떻게 찾는담.”
아무리 둘러봐도 오두막처럼 생긴 건물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오두막이 있을 것 같은 위치는 어느 정도 감이 왔다. 분명 소설 속 묘사에서 오두막이 절벽과 가까운 산속에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소설에 묘사된 바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절벽들이 꽤 있었다.
나는 다음 산으로 가는 길을 눈으로 잘 훑어 두었다. 그리고 강의 위치와 절벽들을 다시금 기억 속에 꾸역꾸역 저장하고는 하산 준비를 했다.
스트레칭을 해 준 뒤, 막 출발하려는데 발밑에 웬 붉은색 막대가 걸렸다.
“뭐지?”
자세히 보니 막대가 아니라 꼭 총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흙이 가득 묻어 있었는데, 언뜻 붉은 빛을 띠는 것이 신기하게 생겨서 난 그것을 주워들었다.
“아무리 봐도 총처럼 생겼는데.”
그러다가 나는 옆면에 적힌 글자를 발견했다. 흙을 손으로 대충 닦아 내고 글자를 읽었다.
Alea
“알레아? 이게 무슨 뜻이지?”
이 의문의 총을 제작한 업체 이름인가.
그러나 다시 보니 칼로 긁어 글자를 새긴 것처럼 각인이 되어 있어서 누군가의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김새는 꼭 리볼버 권총처럼 생겼는데, 디자인은 그것보다 더 단순하고 작았다.
‘붉은색 권총은 처음 보는데…….’
“근데 대체 이게 왜 여기 있지?”
이 섬에 현대 물건이 있다는 건 안다. 그런데 원작에서도 물건들이 이렇게 아무 데나 막 떨어져 있었던가?
나는 내친김에 붉은 권총의 탄창을 확인했다. 여섯 개의 탄창 안에는 총알처럼 생긴 물건이 모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권총의 이음새 부분들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메꿔져 있었다. 이건 개조한 정도가 아니라 분해해서 새로운 무기를 만든 수준인 것 같은데.
“알레아란 사람이 개조한 건가?”
나는 의아한 얼굴로 권총을 살피다가 발밑에 채는 주머니가 하나 더 있음을 발견했다. 탄알이 두둑하게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아마 이 붉은 권총에 쓰는 탄알인 것 같았다.
“세상에, 완전 유레카.”
난 탄알 주머니를 드레스 주머니 안에 소중히 챙겨 넣었다.
“근데 이거, 작동은 하는 건가?”
굉장히 오래돼 보여서 조금 의심스럽긴 했다. 작동이 안 되는 권총이라면 그냥 멋진 쓰레기밖에 안 되는 건데.
‘하지만 진짜 총일 수도 있고……. 총이라면 내가 사격 경험이 많지 않아서 좀 곤란한데.’
사격장에 가 본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소음 방지를 위해 드레스 자락을 작게 찢어냈다. 그리고 대나무 통에 남아 있던 물을 조금 따라 적신 뒤, 양쪽 귀에 쑤셔 넣었다.
그런 다음 자세를 잡고 탄창을 확인해 장전한 뒤, 해머를 당겨 내렸다.
“설마 이게 될까.”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먼 곳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권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역시 오래돼서 망가진 건가?
“어쩐지 낡았더라.”
나는 마구잡이로 방아쇠를 당기다가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그 순간 조명탄에서 붉은 연기가 나오더니 하늘로 쏘아졌다.
………?
아니, 이게 왜 갑자기 발사되고 난리야?
붉은 연기를 보니까 총이 아니라 조명탄인 모양이었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은 연기는 이내 불꽃처럼 성대하게 터지며 하늘을 장식했다.
………??????
잠깐, 조명탄도 아니고 불꽃놀이용이었어? 대체 이거 정체가 뭐야?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마침 노을이 지기 시작했는데, 불꽃을 보고 마물들이 몰려올 것 같다.
“X발!”
사태를 파악한 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