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단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덜 된 상태였고, 어떤 식으로든 그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머리가 좋네. 그때 마거릿이라고 말했으면 정말 어떻게 했을지도 모르거든.”
그가 웃으며 말을 하고 있어서일까. 그 말은 장난처럼 보이기도, 진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의중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 섬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하필이면 마거릿이라니……. 좀 수상쩍잖아?”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에녹처럼 차라리 대놓고 나를 의심하고 경멸하면 좋겠는데 카이든은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상해. 분명 전과 같은 얼굴인데, 왜 전혀 다르게 느껴지지?”
나는 일단 그가 하는 양을 차분하게 지켜보기로 했다. 어쨌든 그는 결박이 된 채였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내게 위협적으로 굴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지금의 너는 좀 내 취향…… 큭!”
갑자기 카이든이 무언가에 얻어맞고 옆으로 치워졌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에녹이 서 있었다. 그가 카이든을 발로 걷어찬 모양이다.
“마거릿. 이리 와.”
에녹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에녹의 손을 잡고 일어나 그의 등 뒤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래, 카이든처럼 고삐 풀린 인간을 상대하는 건 에녹에게 미루는 게 좋겠다.
조금 전 에녹이 걷어찬 부위가 하필 카이든이 상처 입은 가슴 부근이었던 모양이다. 기껏 치료해 줬더니 붕대 밖으로 피가 배어 나온 게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치료해 주지 않을 셈이다. 괘씸해서.
카이든은 인상을 가득 구기고는 괴로운 얼굴로 신음하다가 에녹을 노려봤다.
“로드, 오랜만이군.”
에녹이 카이든을 향해 싱거운 인사를 건넸다.
‘로드’란 대마법사를 칭하는 호칭이다. 기사들에게 ‘경’을 붙이는 것과 같았다.
에녹은 등 뒤에 서 있는 나를 보호하듯 한 팔을 뻗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흘끔 뒤를 돌아 내 상태를 살핀 그가 다시금 카이든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앉아 있던 카이든이 나와 에녹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전하께선 얼굴이 참 좋아 보이십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든이 동굴 벽에 몸을 기대고 나와 에녹을 차례로 훑었다.
이윽고 그가 짜증스러운 듯이 혀를 찼다.
“에녹 황태자가 플로네 영애를 감싸고 있다니…….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네.”
카이든은 손목이 묶여 있었음에도 에녹에게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다.
“말 가려 하지? 자네의 상처를 치료해 준 게 마거릿이니까.”
에녹의 대꾸에 카이든은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마거릿이 상처를 치료했다고?”
놀랄 만도 했다. 평범한 귀족 영애가 상처를 치료했다고 해도 조금 놀랄 것 같은데 하물며 ‘마거릿’이 상처를 치료했다니.
에녹이 갑자기 카이든의 말 중, 뜬금없는 부분을 지적하고 나섰다.
“마거릿, 로드에게 그대 이름을 허락한 적 있나?”
“아니요.”
나는 에녹의 뒤에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카이든을 쳐다보며 부정했다.
“무례하기 짝이 없군.”
에녹이 불쾌하단 얼굴로 중얼거리자 카이든은 아무렴 좋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예의 차리는 게 중요한가?”
에녹은 카이든이 어떤 말을 해도 동요하지 않을 것만 같은 얼굴로 냉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당장엔 중요하지 않지. 하지만 살아서 나갔을 경우엔 다를 거야.”
그제야 카이든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나와 에녹을 다시금 번갈아 보더니 혀를 차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향해 물었다.
“상처는 어쩌다 생긴 거야?”
카이든은 걸치고 있던 로브와 셔츠를 모두 벗은 상태였는데, 붕대 아래로 보이는 몸이 마법사답지 않게 탄탄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스윽 훑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생긴 거긴……. 마물한테 공격받은 거지. 여기 마물이 가득한 섬이라는 거 알지?”
그러고는 머리를 헤집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뭐, 너는 괜찮으니 됐어.”
그리고 카이든의 그 한마디에 나는 내가 괴물과 마주쳤을 때 들렸던 ‘거대한 굉음’의 원인이 그였다는 걸 알아 버렸다.
그 덕분에 나는 무사할 수 있었는데, 설마 내가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자신을 희생한 걸까?
‘에이, 아니겠지. 카이든도 나를 싫어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주머니에서 카이든의 펜던트를 꺼냈다.
“이거 네 거지?”
“어……. 그러네.”
카이든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더니, 내 앞으로 결박된 자신의 손을 뻗었다.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 펜던트를 올려놓았다.
카이든은 그 펜던트를 빤히 노려보더니 내게 싱거운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중요한 거긴 한데, 별로 좋아하진 않는 거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 카이든은 쉽게 이유를 설명해 줬다.
“이거, 역대 마탑주들의 마력함이거든. 비유를 하자면 유골함 같은 거지. 마탑주가 죽으면 그의 마력을 이 펜던트에 봉인해. 듣기로 란그리드 제국이 건국되기 이전, 잉그람 왕조 시절 마탑주의 마력도 봉인되어 있다고 들었어.”
“특이한 걸 가지고 다니네.”
내가 당황하자 카이든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종의 관습? 마탑에 전해져 오는 괴담 중 하나인데, 여기 담긴 마탑주들의 마력이 나라 하나를 날려 버릴 정도의 파괴력을 가졌다더라?”
카이든이 펜던트를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마력이 담겼다 한들 무용지물이야. 이걸 만든 마법사만이 마력의 봉인을 풀 수가 있는데, 그는 이미 천 년 전에 죽었어.”
괴담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다. 문헌으로만 전해질 뿐, 사실 확인을 할 수가 없는 능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얘는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우리한테 해 주는 거지?’
“그래서 지금은 그냥 마탑의 상징과 관습으로만 전해지는 물건일 뿐이야. 나도 죽으면 내 마력이 여기 봉인되겠지. 내가 가진 마력이 허무하게 흩어져 사라지는 것보단 여기 봉인되는 게 의미 있을 수도 있고.”
카이든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고는 에녹과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쩌다가 이곳에 있는 겁니까?”
“그러는 로드, 자네는?”
에녹의 물음에 카이든이 생각을 더듬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분명 신전에 쳐들어가던 중이었는데…….”
카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신전에 깽판 치러 가는 중이었다니.
“뭐, 아무래도 좋아. 일단 상처만 나으면 떠날 거라서.”
그렇게 대답한 카이든이 나를 향해 윙크를 했다.
“치료해 준 건 고마워, 마거릿. 네가 치료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봤더라면 더 좋았을 건데.”
카이든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마거릿’이라는 이름을 부른 듯했다. 에녹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인다.
그는 에녹의 반응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나를 보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인도에 있다지만, 그래도 에녹은 제국의 황태자인데 카이든도 참 대책이 없다.
“근데 떠난다니, 어디로 떠나게?”
그가 마탑주라는 걸 밝혀서 존댓말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나는 그냥 처음 그대로 편하게 반말을 하기로 했다.
역시나 카이든은 내가 반말을 하든 존댓말을 하든 개의치 않는지 머리를 헤집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섬 어딘가……?”
그게 뭐야. 뭔가 아는 거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벙커나 오두막, 혹은 문이라든가.
내 실망한 얼굴을 보고는 카이든이 말을 덧붙였다.
“갑자기 이런 곳에서 눈을 뜬 것도 의심쩍고……. 워프를 한 것 같은데, 아니라면 탈출 게이트 같은 게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섬을 다 뒤져 볼 생각이야.”
탈출 게이트라니? 나는 두 눈을 번쩍 뜨고 그를 쳐다봤다.
일 년 뒤에 열릴 ‘문’을 찾는 걸까? 제법 생산적인 일을 계획하고 있네.
역시 마법사라서 그런지 이런 쪽으로도 사고가 가능하다는 점은 매우 훌륭했다.
에녹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탈출 게이트가 있을 거란 개념은 생각 못 해 봤군.”
에녹의 말에 아무렴 좋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카이든이 나를 보며 물었다.
“마거릿, 같이 갈래?”
카이든이 그 말을 꺼냄과 동시에 시야가 가려졌다. 에녹이 다시금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마거릿에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당장 쫓아내기 전에 헛소리 집어치워.”
그렇게 말해 주는 에녹은 제법 듬직했다.
솔직히 말해서 카이든이 가자고 재차 물었어도 그를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언제 잡아먹힐 줄 알고 카이든을 따라가겠어, 겁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