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5)화 (25/234)

7. 알레아(Alea)

나는 동굴 안에서 눈을 떴다.

내가 깨어났을 때는 오밤중이었다. 몸을 뒤척이고 보니 누군가의 단단한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켰는데, 동굴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에녹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아. 깼나.”

에녹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어찌나 섹시……. 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내 물음에 에녹은 음울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동굴 안으로 달빛이 스며들고 있어서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미안하다.”

“뭐가요?”

나는 영문을 모르고 두 눈을 깜빡이며 에녹의 얼굴을 바라봤다.

“열이 올랐었다. 감기 같아서 약을 먹이고 싶었는데, 저 약통에 있는 약 중에 어느 걸 먹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더군.”

나는 그제야 에녹의 옆에 놓인 구급약통을 쳐다봤다. 열린 뚜껑 안으로 약품들이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다.

“내 평생 이렇게 무력해 본 적이 없었어.”

잘 빚어진 얼굴이 괴로움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게 에녹 탓은 아니죠. 드레스가 없어진 게……. 아, 그러고 보니 드레스는 어디 있었어요?”

내 물음에 에녹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얼굴을 보며 예감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아무래도 누군가를 만난 모양이다. 남주 중 한 명이거나 아니면 여주거나, 그 모두이거나.

‘평화가 끝난 건가?’

지금도 때때로 마물에게 공격을 받곤 하니 썩 평화롭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내 머리 위로 다정한 손길이 닿았다. 놀랍게도 에녹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는 에녹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정말 사심 하나 담기지 않은 얼굴로 강아지 쓰다듬듯이 내 머리를 쓰담쓰담 하고 있었다.

‘뭐야, 저 눈빛은. 내가 진짜 강아지인 줄 아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에녹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디에고 경을 만났다. 경이 그대의 옷을 훔쳤더군.”

제기랄, 역시나.

‘아니 근데 근위대장이 목욕하는 여자의 옷을 훔쳤다고? 기사도 정신 어디 갔어?’

“그 새ㄲ, 아니 디에고 경은 어디 있어요?”

에녹은 차분한 얼굴로 내게 사과했다.

“내 사람이었던 자이니, 경의 만행에 대해서는 내가 사과하겠다.”

“그걸 왜 에녹이 사과해요.”

“경에게 직접 사과를 받아야겠다면 말해. 끌고 올 테니까.”

에녹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당장에 디에고를 끌고 들어올 기세였다.

나는 괜히 김이 빠져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쳤다고 내 발로 다른 남주를 만나러 가겠어? 그건 지옥불로 직접 걸어 들어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에녹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지금은 카이든까지 주워 버린 상황이다. 두 사람만 상대하기도 내겐 벅찼다.

“됐어요. 나중에 직접 복수할게요.”

내 대답에 에녹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줄 알았다. 복수를 안 하겠다는 말은 안 하는군.”

“당연히 해야죠. 저는 받은 만큼 되갚아 주는 사람이라. 디에고 경더러 뒤통수 조심하라고 해요. 내가 언제 그놈……, 아니 경의 옷을 훔치러 갈지 모르니까.”

물론 지금 할 건 아니지만, 내가 섬을 탈출하기 전엔 꼭 훔친다.

“다른 사람은 없대요?”

나는 슬그머니 에녹을 떠봤다. 원작대로라면 디에고는 다른 주인공들과 함께 있을 게 분명했다.

“그건…… 모르겠군.”

에녹은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모를 애매한 대답을 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녹의 표정을 열심히 살펴봤지만, 그의 속내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섬을 탈출하려면 같이 움직이는 게 좋은 거 아니에요? 정보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에녹은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그만두고 턱을 괴더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내게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굳이 같이 다닐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열흘에 한 번씩 디에고 경과 정보 교환을 하기로 했다.”

에녹의 말대로 디에고는 란그리드 제국의 근위대장이었으니 에녹의 사람이 맞다. 그래서 당연히 디에고와 함께 다니자고 할 줄 알았는데, 에녹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래요……?”

“그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인 것 같더군.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여전히 턱을 괴고 있던 그가 눈을 굴려 흘끗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조용히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뭐야. 피차 성가시게 하지 말자더니 왜 이래?’

하지만 그 손길이 불편하진 않았다. 사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누군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이진주 시절엔 한 번도 이런 다정한 손길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세상에 잘못 끼워진 퍼즐처럼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니까.

“쓸 만한 정보를 얻게 된다면 공유할 테니 너무 걱정 마라.”

내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던 걸까. 에녹이 안심하라는 듯이 내게 말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참, 그런데 나 분명, 슈미즈만 입은 채로 기절하지 않았었나?’

내 표정에 담긴 의미를 읽었는지 에녹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대의 옷은 내가 직접 갈아입혔어.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니, 걱정 마.”

“보긴 봤다는 거네요?”

내 물음에 에녹이 다시금 침묵했다.

세상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느낌이 어떤 건지 너무도 잘 알 것 같다.

슈미즈 드레스는 굉장히 얇은 면 재질의 속옷이었고 당시 나는 젖은 상태였으니, 몸이 다 비쳤을 거다.

내가 이 섬에서 죽는다면, 사인은 수치사일 거야.

“맙소사, 시집 다 갔어.”

내가 푸념하자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에녹이 폭탄 같은 발언을 던졌다.

“그런 게 걱정인 건가? 그럼 나와 결혼하면 깔끔하게 문제가 해결되겠군.”

“진심이세요?”

“농담 같은가?”

아니. 너무 진담 같았다. 왜 저러지.

“제가 결혼하자고 할 땐 그렇게 싫다고 거절 하시더니?”

“그때와 지금은 상황도 그대도, 모두 변하지 않았나.”

‘그대도’라니. 변한 나를 지칭하는 단어다. 어차피 마거릿이 나고, 내가 마거릿이라서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대체 왜 저렇게 구는지 알 수가 없다. 뭘 잘 못 먹기라도 했나?

나는 불편한 화제를 피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손뼉을 마주쳤다.

“아, 카이든!”

내 노력을 눈치챘는지 에녹이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도 간밤에 열이 끓어 오르는가 싶더니, 지금은 괜찮은 모양이더군.”

에녹의 얼굴은 무척 고단해 보였다.

명색이 황태자란 사람이 혼자서 환자를 두 명이나 돌보다가 회의감이 든 건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무척 힘들었을 거다.

“고생하셨어요. 저 이제 열 다 내린 것 같아요.”

그가 조용히 내 뺨에 손을 올리더니 열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쉬세요. 저도 저쪽에서 잘게요.”

“아니…….”

에녹이 할 말이 있는 얼굴로 나를 잡는가 싶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잘 자라는 말을 전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웃으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에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굿 나이트 인사를 한 뒤, 그와 카이든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자리를 정리하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다시금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이 들었다.

* * *

부스럭.

몸이 조금 무거운 느낌에 뒤척이던 나는 불편함이 가시지 않아 눈을 떴다.

그리곤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뭐……!”

소리를 치려고 했는데 카이든이 결박되어 있는 채로 손목을 들더니, 검지를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쉿.”

나는 그 말에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붉은 눈이 나를 내려다보며 예쁘게 눈웃음을 짓는다. 에녹도 그렇지만, 얘도 잘생기기는 더럽게 잘생겼다.

손목이 묶여 있는 채로도 그는 잘만 움직였다. 그가 내게로 고개를 바짝 기울이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소리 지르지 마, 황태자가 깨잖아.”

나는 고개를 돌려 에녹이 자고 있을 방향을 바라봤다. 에녹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였다.

“에녹 황태자와 함께 있는 백금발의 여자라…….”

카이든은 에녹이 황태자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그렇다는 건-

“왜 거짓말 했어, 마거릿.”

내가 플로네 영애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는 거다.

“내가 플로네 영애는 싫다고 말해서 그래?”

카이든이 재미있다는 듯이 내 얼굴을 훑었다.

“그래도 거짓말은 나쁜 거야.”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나를 빤히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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