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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4)화 (24/234)

짧게 자른 짙은 밤색 머리카락, 녹색 눈동자. 에녹은 남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았다.

디에고 바스티안 빌터하임.

란그리드 제국의 검이라는 칭호가 붙은 근위대 단장이었다.

카이든이 나타났을 때만 해도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국의 황태자와 공작 가문의 영애, 그리고 근위대장과 대마법사. 모두 란그리드 제국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디에고가 당황한 얼굴로 에녹을 바라봤다.

“그건 내가 해야 할 소리 같은데, 디에고 경.”

디에고 경. 공적인 호칭이 언급되자 디에고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바른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주먹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에녹은 찬찬히 디에고의 차림을 훑었다. 그는 란그리드 제국의 근위대 제복을 입은 채였다.

에녹도 업무 중이라 황태자 제복을 갖춰 입은 상태로 섬에서 깨어났지만, 디에고도 불편한 차림이긴 매한가지인 듯했다.

“경은 어떻게 이 섬에 있는 거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훈련 중에 갑자기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강가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한 치 거짓도 없어 보이는 진실한 얼굴로 디에고가 답했다.

“전하께서는 어쩌다가 이곳에 계신 겁니까.”

“나도 경과 마찬가지야. 황궁에서 업무를 보다가 눈을 뜨니 이곳이었어.”

에녹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위로 쓸어 넘기며 디에고를 쳐다봤다.

“뭔가 알아낸 건, 있나? 구조 요청은?”

에녹의 조용한 물음에 디에고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저도 답답하다는 듯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여기 어떻게 오게 된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저와 함께 있는 일행 둘이 있는데, 그들도 마찬가지였더군요.”

디에고 역시 에녹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에녹은 란그리드 제국에서의 디에고는 믿었지만, 이 섬에 있는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이 섬에 그들을 데려온 범인이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 일행이 있나?”

“아, 전하께서도 아는 자들입니다. 아스달 왕세자와 루제프 주교도 이 섬에서 눈을 뜬 모양이더군요.”

디에고의 대답에 에녹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루제프 대주교?”

“네, 맞습니다. 교황청의 루제프 대주교요.”

디에고의 담담한 대답에 에녹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성직자도 이 재앙을 피해 갈 수 없었나 보다. 역시 신은 없어.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웃고 말았다.

에녹은 제 앞에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우직하게 앉아 있는 디에고를 내려다봤다.

지금은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 디에고에게도 섣부르게 호의를 베풀 순 없었다.

하물며 아스달 왕세자와 루제프 주교라니…….

에녹은 그중에서도 아스달 왕세자를 특히 싫어했다. 성정이 매우 오만하고 거칠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에녹과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악연이었다.

“황태자와 왕세자, 대주교에 근위대장까지……. 우연치고는 란그리드 제국과 헤스티아 왕국의 주요 인사들뿐인 것 같군.”

에녹의 일행 중엔 대마법사 카이든과 플로네 공작 가문의 금지옥엽 마거릿도 있었다.

처음엔 그를 노린 로드반 세력의 계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모인 인물들을 보니 그건 아닌 듯싶었다. 대체 누구의 짓일까.

“경의 일행에게선 수상쩍은 느낌은 없었나.”

“네, 저희 일행 중엔 없습니다.”

디에고의 단호한 대답에 에녹은 의구심이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확신할 수가 있지?

에녹은 조용히 디에고를 관찰했다. 그러다가 그의 손에 들린 마거릿의 드레스를 노려봤다. 그는 마거릿의 드레스는 물론 슈미즈까지 훔쳐 가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힐난하는 듯한 에녹의 시선에 디에고가 주저리 변명을 늘어놨다.

“거기 있는 분이 전하신 줄 알았다면, 훔치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이 섬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고 놀라긴 했지만, 일단 상황이 급했습니다.”

디에고는 원래 말이 많은 남자가 아니다. 길어지는 그의 변명에 에녹은 기어코 미간을 좁혔다. 거기다가 대답도 모호했다.

“의도한 거지만, 의도한 게 아니다?”

“제 일행 중에도 이런 옷이 필요한 이가 있습니다.”

“물속에 있는 여자에겐 그 옷이 필요 없을 것 같아 보였나?”

에녹의 물음에 디에고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에녹은 디에고답지 않은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의 디에고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다가,

“원래 극한 환경에 닥치면 변하게 되어 있어요.”

다시금 마거릿의 말을 떠올렸다.

극한의 환경이 우직하고 기사도 정신으로 똘똘 뭉친 디에고마저 변화시킨 모양이다.

“전하와 함께 있던 여인이 누군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에녹은 작살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디에고를 마뜩지 않게 내려다봤다.

“그건 그대가 알 거 없어.”

과거의 에녹만큼은 아니었지만, 디에고 또한 마거릿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평소에 에녹에게 치대며 패악을 부려 온 마거릿을 강직한 디에고가 얼마나 경멸해 왔는지 에녹도 잘 알았다.

더불어 마거릿이 제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디에고를 두려워한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과거의 에녹은 그 점을 개의치 않아 했다. 마거릿의 자업자득이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마거릿은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그래서 에녹은 그녀가 그런 취급을 받는 걸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역시 지금은 상황 파악이 될 때까지 디에고 일행과 마거릿이 마주치지 않게 하는 편이 좋겠다. 그래야 돌발 상황에서도 그가 마거릿을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그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그 무리에서 마거릿을 싫어하는 사람이 비단 디에고 뿐은 아닐 테니까.

마거릿에게 약속했던 대로 그는 섬을 탈출할 때까지 그녀를 데리고 있으며 보호할 예정이다.

그녀가 그를 많이 의지하고 있으니까, 신사 된 도리로 그는 그래야만 했다.

“일행 중에 여자의 옷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니, 의문스럽군. 아스달 왕세자와 루제프 주교의 것으로 보이지는 않은데.”

에녹의 말에 디에고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묻는 말에 대답.”

에녹이 작살 끝을 조금 더 세우자 디에고가 당황한 눈초리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전하, 저는 란그리드 제국의 기사입니다. 적이 아니라.”

디에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했으나, 에녹에게 통하진 않았다.

“적이 아니다? 내 일행의 옷을 훔치기 전에 그런 변명을 하지 그랬나.”

그러자 디에고가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참 뒤에야 면구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일행 중에 유안나 루시도 있습니다. 성녀님이요.”

유안나 루시.

이 또한 대륙의 유명 인사였다. 백 년 만에 나온 고유 신력을 보유한 성녀였으니까.

디에고가 불안한 얼굴로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왜 디에고는 일행에 관해 언급할 때 성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까.

그 점이 에녹은 의아했다.

그리고 지금의 그는 마치 에녹이 성녀를 만나고 싶다고 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마치 아주 소중하게 지켜야할 사람처럼 말이다.

“그 여자는 옷이 없나.”

“네?!”

뭘 어떻게 오해한 건지는 몰라도 디에고가 에녹의 말에 기겁을 했다. 에녹은 짜증스레 혀를 찼다.

“그 드레스는 내 일행의 하나뿐인 옷이야. 그런 걸 훔쳐 갈 정도라면, 성녀가 벌거벗고 있기라도 해야 적당한 변명이라도 되지 않겠나.”

“그, 그건…….”

디에고가 말을 더듬었다. 에녹은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성녀 따위가 뭐라고 감히 마거릿의 옷을 훔쳐 입힌단 말인가. 에녹은 성녀에 대한 반감이 치솟는 걸 느끼며 화를 삼켰다.

“말을 못하는 걸 보니, 성녀는 옷을 입고 있긴 하단 소리군. 내 일행은 지금 물속에서 드레스 없이 떨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제법 시간이 흘렀다. 어서 옷을 받아 돌아가야 했다.

“뭘 꾸물거리는 거지? 당장 가져와.”

에녹의 살벌한 읊조림에 디에고가 움찔했다. 그는 결국 들고 있던 드레스를 얌전히 에녹에게 건넸다.

“섬을 탈출할 방법을 찾게 되면, 연락해라. 수시로 정보를 교환했으면 한다. 물론 자네 일행은 모르게.”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디에고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저와 함께 가지 않으실 겁니까?”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했을 텐데, 디에고 경.”

에녹의 강압적인 말투에 디에고는 할 말이 많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끝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열흘에 한 번씩은 여기서 보는 걸로 하지. 먼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면 미리 언질을 주게.”

에녹은 덤덤한 얼굴로 계속해서 요구 사항을 던졌다.

“그리고 내 일행의 눈에는 띄지 말고. 거슬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디에고는 떨떠름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나는 에녹을 기다리다가 하늘에 노을이 지는 걸 바라보며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어두워지는 것도 어두워지는 거지만, 이제는 추워 죽을 것 같았다. 오들오들 몸이 떨렸다.

대체 에녹은 어디까지 간 걸까. 그리고 드레스를 훔친 변태 새끼는 또 누굴까. 아무래도 <생존보다 중요한 것>의 남주 중 한 명인 것 같은데.

카이든은 우리 거처인 동굴에 쓰러져 있을 테니 그는 아닐 테고. 남주 2, 3, 4 중 한 명이라는 건데. 그중에 드레스를 훔칠 만한 남자가 있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상념을 접었다. 춥다. 추워.

물에 젖은 채로 슈미즈를 입었더니, 슈미즈가 홀딱 젖어 마르지 않았다.

해가 지면서부터 온도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데 물에 젖은 채로 몸을 밖에 내놓고 있으려니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다.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손발이 차서 참을 수 없었고 몸이 부쩍 무거워졌다. 나는 슬그머니 몸을 바위에 기대었다.

너무 힘들어.

“마거릿! 괜찮은가. 늦어서 미안하군.”

그리고 그제야 에녹이 돌아왔다. 나는 바위에 엎드린 채로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손에 들린 드레스를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만 현기증이 나서 휘청했다.

뭐지. 머리가 어지럽다. 현기증이 나는 것도 같은데…….

나는 에녹이 다급하게 내게로 달려오는 걸 보며 물속에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 체력이 이렇게 개복치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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