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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3)화 (23/234)

* * *

대체 어쩌다가 이런 상처를 입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카이든은 그 다음날에도 쉽게 깨어나질 못했다.

짐승의 발톱 자국 같았는데, 에녹을 공격한 마물처럼 독이 있었던 건가?

나는 일단 수건 대용으로 쓰고 있는 천 조각이 너덜너덜해진 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드레스를 더 찢어야겠다. 드레스가 다 찢어져서 벌써 종아리 절반까지는 맨다리가 드러났다.

처음엔 이 야생에서 드레스가 웬 말이냐고 했는데, 지금은 드레스를 입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얼른 오두막이라도 찾아야 할 텐데. 그곳에 현대 의복들이 있을 테니 바지라도 좀 주워 입고 싶었다.

우리는 카이든을 두고 동굴 근처를 다시 정찰하기로 했다. 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근처에 계곡이 흐르긴 하지만, 계곡물에서 식량을 구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물론 그런 와중에 벙커와 오두막에 대한 단서도 찾게 되면 좋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엔 분명 벙커와 오두막 모두 거대한 산 아래, 절벽과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지난번에 산 정상에 올라가서 봤을 땐, 이 섬엔 그런 거대한 산은 딱 세 개 있었다.

에녹과 함께 올랐던 산 근방을 찾아보고 그럼에도 벙커나 오두막이 없다면, 다음 두 개의 산 주변을 찾아야 했다.

“덥다.”

나는 에녹과 함께 풀숲을 걷다가 찌는 듯한 더위에 땀을 닦아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앞에 씻을 만한 곳이 있더군. 조금만 참아 보도록.”

에녹도 덥기는 더웠는지 소매의 커프스단추를 풀고 기어이 소매를 접어 팔뚝을 드러냈다.

나는 핏줄이 단단히 선 그의 두터운 팔뚝을 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소매를 걷다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할 말 있나.”

“아무것도 아니……, 앗!”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휘청했다. 더위를 먹었는지 몸에 힘이 없었다.

다행히도 에녹이 내 허리에 팔을 휘감아서 바닥에 나뒹구는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사실, 섬에서 깨어나고서 지금까지 과도하게 몸을 혹사시키며 무리를 했었다. 몸살이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아마 더위를 먹은 것도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에녹의 단단한 팔뚝을 붙잡고 심호흡을 했다.

에녹의 팔뚝엔 상처가 많았다. 전부 전쟁터에서 얻은 상처겠지.

“마거릿.”

앞서 걷던 에녹이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자꾸만 상황에 맞지 않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기어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괜찮나.”

“더워서 그래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죽을 것 같다-.’

라고 생각하던 차에 시야가 변했다. 에녹이 나를 갑작스레 안아 든 탓이다.

나는 뭐라 말을 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힘겹게 에녹의 품에 안겼다. 지친 것 같다. 더위를 먹은 게 확실해.

다행히도 얼마 가지 않아 시원한 폭포가 흐르는 계곡물이 보였다. 에녹은 물가에 다다라서야 나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지키고 있을 테니, 원하는 만큼 있다가 나오도록 해.”

그렇게 말하고 에녹은 멀지 않은 곳에 뒤를 돌아 서 있었다.

에녹의 배려에 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손을 담그기만 했는데 더위가 싹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드레스를 벗으려고 했는데 등 뒤에 달린 단추에 손이 닿질 않았다. 더위를 먹어서 그런지 힘이 없었다. 나는 혼자 낑낑거리면서 단추를 풀다가 결국 에녹을 불렀다.

“에녹, 등 뒤로 손이 안 닿아요. 좀 도와줘요.”

나를 그를 향해 등을 보여 주며 손을 뒤로 해 단추를 가리켰다.

“단추 좀 풀어주세요. 부탁드려요.”

에녹은 대답 대신 가까이 다가왔다. 이어서 등허리에 커다란 손이 닿는 느낌이 났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그의 손이 닿는 등허리에서 열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 그는 아주 느릿하게 단추를 풀어 내렸는데, 덕분에 등허리가 아주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등이 훤히 보이도록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어쩐지 기묘한 감각이 드는 것 같아서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에녹?”

나는 결국 무언가 조급한 것처럼 그를 재촉하고 말았다.

“마거릿, 그대는…….”

대답 대신, 에녹이 말문을 열었다.

“섬에서 나가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뭔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가 등 뒤에 자리하고 있던 탓에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무슨 의도를 갖고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비누로 몸을 씻고 싶어요.”

“또?”

에녹은 조금도 서두를 기미 없이 계속해서 천천히 단추를 풀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듯이 말끝을 흐리다가, 진짜 마거릿이라면 했을 법한 답을 골랐다.

“음, 정찬 요리를 먹고 싶어요. 플로네 저택에서 먹었던 마지막 정찬이 정말 끝내줬거든요.”

물론 내가 먹은 건 아니고 마거릿이 먹었지만, 그녀의 기억이 곧 내 기억이니까.

사실 나는 한국이 더 그리웠다. 천애 고아에 친구도 없어서 나를 반길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나고 자란 곳이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에서의 나는 떨어진 간판에 머리를 맞고 죽었으니, 어쩌면 평생 마거릿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던 와중에 어쩐지 에녹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내 단추를 다시 채우는 건지 풀어 주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느릿하게 움직였다.

“에녹?”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예의상 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럼 에녹은 여기서 나가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예요?”

“……글쎄.”

“뭐예요. 잘 생각해 봐요. 저는 성실하게 대답했는데, 그렇게 성의 없이 굴 거예요?”

내 물음에 그가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마거릿.”

고개를 숙인 모양인지 귓가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내가 제대로 말하면, 그대가 곤란해질 텐데.”

그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더운 숨이 목덜미를 감질나게 스쳤다.

곤란해지다니, 대체 뭘?

때마침 그가 단추를 다 풀었는지 내 뒷목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서 소스라치며 그를 돌아봤다.

“단추를 푼 지 꽤 됐는데, 그대가 가만히 있기에.”

“그럼 말을 해 줘야죠!”

나는 너무 놀라서 가슴 위에 손을 얹고 그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미안하다고 재차 사과를 했다.

아니, 왜 이렇게 사람이 능글맞아졌지? 에녹답지 않다. 진짜 사람이 변했어.

나는 에녹이 얌전히 뒤돌아 서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드레스를 벗었다. 이어서 드레스 안에 입은 슈미즈까지 벗은 다음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와…….”

너무 시원하고 개운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자 내 감탄사를 들었는지 에녹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마세요.”

내가 한 번 더 당부하자 에녹이 성의 없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물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잠수도 하고 수영도 하면서 신나게 물장구를 쳤다.

“아주 신이 났군.”

요란한 물소리를 들었는지 에녹의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다음에 에녹이 씻을 때 나도 실컷 놀려 먹어야지. 왠지 에녹은 절대로 물장구 따위는 치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물속에 있고 싶을 정도로 너무 기분이 좋았지만, 해가 저물기 전에 정찰을 끝내고 동굴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나는 적당히 씻는 것을 마쳤다.

드레스를 벗어 둔 방향으로 나가려는데, 어디에도 드레스가 보이질 않았다.

바닥에 덩그러니 슈미즈만 남겨져 있었다. 굉장히 당혹스럽다.

“에녹? 제 드레스 어디다 뒀어요?”

“그대가 벗어 둔 드레스의 행방을 왜 내게 묻는지 모르겠는데.”

에녹은 처음 있던 그 자리에서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선 상태였다. 정말 아까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 에녹의 말이 맞다. 그가 장난을 쳤을 리도 없고…….

“젠장, 타이밍이 뭐 이래? 선녀와 나무꾼이야, 뭐야.”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내 드레스가 없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에녹을 불렀다.

“에녹, 제 드레스가 사라진 것 같아요.”

“뭐?”

그가 놀라서 등을 돌렸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다시 돌아섰다. 나는 아직 물속에 있었는데 왜 나보다 에녹이 더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다.

“드레스 좀 찾아 주실래요? 부탁해요.”

에녹이 그제야 다시금 나를 돌아봤다. 나는 일단 목 끝까지 몸을 물에 담그고 에녹을 바라봤다.

대체 그 누더기 같은 드레스를 왜 가져갔는지 알 수가 없다.

“누가 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다른 사람이 있었던 걸까요?”

“사람이라니…….”

에녹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괴고는 주변을 훑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올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네? 빨리 오셔야 해요!”

알몸으로 혼자 있다가 산짐승이라도 나오면 어떡해. 불안해서 그렇게 외치자 에녹이 잠시 나를 보다가 미안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금방 오겠다.”

그런 말을 남긴 채, 에녹은 사라졌다.

나는 물속에서 얌전히 에녹을 기다렸다. 그러나 빨리 오겠다던 에녹은 도통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일단 물 밖으로 나온 다음 슈미즈를 챙겨 입었다.

몸이 으슬으슬 추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몸살 기운이 있어서 조금 걱정됐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큰일이다. 곧 해가 기울 것 같은데 에녹이 오질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 * *

에녹은 마거릿이 있는 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 입이 틀어 막힌 장정 하나가 함께 끌려왔다.

에녹은 바닥에 집어던지듯 남자를 무릎 꿇렸다.

“이 섬에 참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많군.”

남자의 목에 날카로운 작살 끝이 드리워졌다. 에녹은 작살을 쥔 채, 섬뜩한 낯으로 남자를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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