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로 성난 근육질의 가슴팍이 와 닿았다. 그의 몸은 마치 미술가가 깎은 조각품처럼 말랑한 곳 없이 단단했다.
“괘, 괜찮아요. 고마워요.”
괜스레 민망해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그에게 허리를 내어 준 채로 카이든을 내려다봤다. 그가 여전히 내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력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잡힌 손목이 쉽게 빠지지 않았다.
“잠시.”
그때, 양해를 구하는 에녹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에녹의 커다란 손이 내 손목 위를 한 번에 감쌌다.
그는 너무도 간단히 카이든에게 붙잡힌 내 손을 빼 주었다. 그제야 나는 그의 품에서 나와 바르게 설 수 있었다.
에녹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자국이 남았군.”
그가 붉어진 내 손목을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스치는 부위가 간질거려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죽여 줄까.”
“네.”
에녹의 중얼거림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잠깐, 뭐요? 아니요. 참아 봐요. 분노 조절은 하셔야죠.”
내가 황급히 말리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는지 그가 곧장 다른 말을 꺼냈다.
“이 남자는 대마법사 카이든인 것 같군.”
그는 카이든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했다.
하긴 에녹은 제국의 황태자인데, 대마법사의 존재를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심지어 카이든은 대륙에서 다섯 명뿐이라는 대마법사였으니까.
“일단 짐부터 옮기고 이자도 옮기도록 하지.”
에녹이 못마땅한 얼굴로 카이든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마법사의 지식은 쓸 만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한 에녹이 의견을 구하듯 나를 바라봤다.
“데리고 들어가되, 묶어 두는 걸로 하지. 묶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내다 버릴 거다.”
……의견을 구하는 건 아니었군. 그는 내가 카이든을 묶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에녹은 동굴 안으로 코코넛과 오리를 꿴 작살 등의 짐을 옮겨 넣었다.
그러곤 엊그제 붕대로 사용했던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가져와 카이든의 팔다리를 단단하게 묶었다.
동굴의 입구가 지면에서 살짝 위로 뚫려 있어서 에녹은 결국 카이든을 들쳐 업어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동굴 한쪽에 카이든을 내려놓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갔다. 나는 얌전히 카이든의 상태를 살폈다.
“다친 건가?”
로브 사이로 보이는 셔츠에 피가 배어 있었다.
나는 황급히 에녹을 돌아봤다. 다행히도 에녹은 코코넛 그릇에 열매를 나눠 담느라 바빠 보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카이든의 셔츠를 벗겼다.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지 상태는 확인해야 했으니까.
“세상에…….”
그의 가슴 부근에는 길게 상흔이 나 있었다. 짐승에 긁힌 상처였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고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마법사 로브를 걸치고 있어서 아까는 피가 난 걸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지혈부터 해야겠다.”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뒤늦게 카이든의 상처를 너무 오래 오픈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에녹은 식사 준비로 바쁘니까 못 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으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에녹이 이쪽을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처…….”
에녹은 카이든의 상처를 쳐다보고 있다가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마거릿, 나도 묶는 게 좋겠군.”
제기랄. 내가 이렇게나 부주의했다니.
나는 일단 드레스 자락을 더 찢어 그의 손발을 결박했다.
결박을 하는 도중에 폭주가 시작됐는지 그가 괴로운 얼굴로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하…….”
“에녹?”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이 그의 숨소리가 뚝 하고 멎었다.
그러나 잠시 멈춘 듯하던 에녹이 다시 이를 악문 채 그르르,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그가 손이 결박된 채로 자리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씨X, 도움이 안 되네!’
나는 재빨리 카이든을 잡아당겨 달려드는 에녹을 피했다. 이성이 사라진 상태라 그런지 그가 중심을 잃고 곧장 바닥에 넘어졌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 그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발로 지그시 밟아 바닥에 눌렀다.
“그만해, 에녹. 기다려.”
에녹이 가진 괴력이면 벌써 나를 밀어내고 빠져나왔을 법한데, 의외로 그는 내게 밟히고 나니 순순해졌다.
에녹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원망 가득한 눈을 하고 나를 노려봤다.
나는 얌전히 발을 치우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마거릿.”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거 치워, 좋은 말로 할 때.”
그러곤 그가 다시금 으르렁거리며 입질을 시작했다.
“싫어.”
나는 그가 살짝만 움직여도 그를 향해 단호하고 매섭게 손가락질을 했다.
나는 말 안 듣는 아이를 혼내는 엄마처럼 최대한 단호하고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 에녹. 당장.”
에녹의 눈에서 점차 광기가 사라졌다. 나는 안심하여 고단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진짜로 효과가 있네.”
힘이 빠진 에녹은 그대로 기절했다. 나는 그를 동굴 벽 쪽으로 옮겨 그의 손목과 발목을 천으로 꽁꽁 묶었다.
“후우……. 됐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고 나는 평온하게 잠든 에녹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문득 회의감이 들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인간들은 대체 나 없이 원작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거람?”
원작에서 유안나가 에녹을 이렇게 거칠게 통제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나는 머리를 헤집으며 짜증스럽게 신음했다.
“XX, 힘들어!”
하지만 우선 카이든부터 치료하고 보자.
나는 상념을 접고 카이든의 상처 치료를 시작했다.
수건 대용으로 쓰던 드레스 천을 동굴에 흐르는 물로 적셔 상처 주변을 깨끗하게 닦아 냈다. 그러곤 다시 천을 깨끗하게 씻은 뒤, 상처 부위에 살짝 눌러 지혈을 시도했다.
기절해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고통은 느껴지는지 카이든이 옅은 신음을 뱉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며칠 전에 카이든에게 쫓기다가 마주쳤던 마물을 떠올렸다.
숲속에 울려 퍼진 굉음. 당시 나를 목전에 둔 마물은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급히 사라졌었다.
그때 그 굉음의 원인이 카이든인가?
‘설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상념을 치웠다. 그건 나중에 카이든이 깨어나면 물어보자.
소독약을 찾아 상처 위에 부으며 소독해 준 뒤, 붕대를 찾았다.
가슴 부위라서 생각보다 붕대를 많이 사용해야 했는데, 남은 붕대가 많지 않았다. 앞으로 또 누군가 다친다면 붕대가 꼭 필요할 텐데 큰일이다.
나는 혹시 몰라 붕대 포장지를 다시 살폈다. 붕대의 투명 포장지 겉면엔 ‘Roselastic’(탄력밴드)라고 적혀 있었다. 이 붕대는 여러 번 세탁하여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에녹이 쓰던 것도 재활용하면 되겠네. 다행이다.”
어쩐지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그래, 역시 정글에선 남주들보단 구급약통이지.”
나는 살색 빛을 띠는 의료용 접착테이프를 잘라 붕대 마감 부분에 붙여 고정했다. 그리고 카이든의 뺨과 목을 만져 보며 열을 체크한 뒤에야 시름을 덜었다.
“윽…….”
기절했던 에녹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벽에 몸을 기대고 앉은 자세로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괜찮아요?”
내 물음에 에녹이 잠시 멍한 얼굴로 묶여 있는 제 손발을 살폈다.
그의 얼굴이 차차 자괴감으로 젖어 가는 걸 보고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손목, 풀어 줄게요.”
내 말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깊은 금안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격정적으로 휘몰아치고 있는 듯했다.
그가 천천히 나를 향해 손목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목을 묶은 매듭을 풀어 주고는 고단한 얼굴로 약통을 닫았다.
“마거릿, 그댄 괜찮은가.”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안 괜찮아요. 피곤해 죽겠어요.”
“미안하군.”
“당신 잘못 아닌 거 아니까. 미안해하진 않아도 돼요.”
내 말에 에녹이 다시금 무거운 얼굴로 입을 닫았다.
내가 약통을 치우고 카이든을 옮기려고 하자 에녹이 와서 도왔다. 그는 카이든을 한쪽 구석으로 옮긴 뒤, 뒤늦게 치료가 끝난 카이든을 살폈다.
나는 구급약통을 품에 안은 채,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마거릿.”
나는 바닥에 누우려다 말고 에녹을 쳐다봤다. 그가 내게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처는 괜찮나? 저 마법사 말고, 그대 상처.”
에녹이 내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멍이 많이 가라앉았는지 이젠 그 정도 만지는 걸로 아프지는 않았다.
그는 은밀한 비밀을 속삭이듯이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말했다.
“혹시 저놈을 치워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말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아니, 카이든을 치우는 건 좀 어려울걸요?
“그러다가 또 발작하려고요?”
내 물음에 에녹이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일이 더 쉬워지겠지.”
어쩐지 섬뜩해지는 말이다. 그의 내면에 잠재된 잔학성이 조금씩 깨어나는 느낌이라 불길했다.
정말 소설처럼 미쳐 버리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