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외딴섬의 드레스 도둑
코코넛만으로 수분 보충을 하다가 기어코 탈이 난 나는 며칠간을 앓아누웠다.
그리고 기껏 힘들게 보충한 수분을 아래로 전부 배출하며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에녹이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가며 나를 간호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고작 배탈이다. 특별히 간호씩이나 필요하진 않았다는 얘기다.
시간이 흐르고 상태가 호전되고서야 정신이 든 나는 반드시 정수한 물을 마시기로 결심했다.
다행히도 동굴 옆으로 100m 정도 덤불을 헤치고 들어가면 작은 계곡이 있다.
나는 에녹이 사냥을 나간 사이, 속을 비운 코코넛 두 통을 들고 계곡으로 향했다.
에녹이 자리에 없을 때 움직이는 이유는 그가 이 모습을 보면 난리를 칠 게 눈에 선해서였다.
그는 내가 중증 환자라도 된 것처럼 굴며 과보호를 했다.
“그래도 에녹이 나를 신뢰하기 시작한 건 다행이지.”
그만큼 내가 죽을 가능성이 줄어든 거니까.
원작 불변의 법칙이 적용되지만 않는다면 그래도 해 볼 만했다. 원작과 다르게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잠깐, 근데 내가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나중에 여주를 만났다고 에녹이 원작대로 변하거나 하진 않겠지?”
제기랄. 씁쓸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고려는 하고 있어야겠다. 만약 정말 그렇게 변해 버린다면 바로 벙커로 도망쳐야지.
“부디 그전까지 벙커 위치를 찾아야 할 텐데.”
나는 에녹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코코넛 그릇 안에 계곡물을 담아 왔다.
그리고 계곡물이 담긴 그릇은 높은 곳에, 비어 있는 그릇은 낮은 곳에. 높이를 다르게 하여 바닥에 고정했다. 이어 돌돌 만 긴 천을 높이가 다른 두 코코넛 통에 반씩 걸쳐 연결했다.
계곡물의 부유물은 시간이 지나면 그릇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수분은 천을 타고 중력에 의해 아래 있는 빈 그릇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이렇게 반나절 정도 두면 빈 그릇에 정수된 물이 모일 거다. 그렇게 모인 물을 한번 끓여 주면 깨끗한 식수를 마실 수 있었다.
드레스 안에 입은 슈미즈가 면 재질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비록 드레스는 엉망이 되었지만, 생존에 큰 도움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에녹과 내가 세운 당장의 목표는 체력을 회복하고 생존 스킬을 올리는 것이었다.
벙커를 찾겠다는 목표도 아주 잠시 미뤄 뒀다. 일단 몸이 건강해야 뭐든 할 수 있으니까.
정수 과정을 마무리한 난 깨끗한 물이 가득 담긴 코코넛 그릇을 들고 동굴로 돌아왔다.
마침 에녹이 사냥한 물고기를 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좀 쉬라고 하지 않았나.”
그는 내 손에 들린 코코넛 그릇을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요.”
에녹은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여간에 너무 유난이다. 에녹은 숫제 임신한 아내를 챙기듯 과보호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에녹과 함께 동굴에 들어가려다가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동굴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나는 쓰러진 남자의 은발을 보고 반사적으로 멍이 든 광대뼈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에녹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저 새끼군.”
에녹의 입에서 그런 저속한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쓰러진 남자를 노려보는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에녹의 눈치를 살피며 바닥에 엎어져 있는 남자의 몸을 뒤집었다. 오른쪽 귀에 달린 귀걸이가 흔들렸다.
역시나 카이든이었다.
“마거릿.”
에녹이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정수된 물이 담긴 소중한 코코넛 통을 품에 안은 채, 카이든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에녹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이내 내 뺨에 닿았다.
“그대 상처, 이놈 짓인가. 펜던트의 주인.”
언뜻 보면 에녹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이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옅은 분노가 서려 있어서 도무지 그가 어떤 상태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맞아요.”
나는 에녹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긍정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계가 없어서 매번 이렇게 하늘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태양의 붉은 그림자가 잔상처럼 번지며 하늘을 황혼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보단 곧 어두워질 것 같아요. 빨리 움직여야겠어요. 그리고 이 남자는…….”
‘두고 가죠. 아니면 묶어 버리던가.’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묶어 버리는 게 좋겠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에녹이 대신했다.
“위험한 자일지도 모르는데 경계를 해야 하지 않겠나.”
에녹이 뒷말을 덧붙였다.
“윽.”
그러던 중에 카이든이 갑자기 고통에 찬 신음을 뱉었다. 놀라서 그를 쳐다봤는데,
쓰러져 있던 그가 갑자기 잠꼬대를 하듯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억센 손이 내 팔목을 잡아챘다.
“악!”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에녹이 가뿐히 내 허리를 휘어 감지만 않았어도 나는 바닥을 처참하게 굴렀을 거다.
“괜찮나.”
머리 위에서 걱정 가득한 에녹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단단한 팔뚝이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