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은 신부님 앞에서 고해 성사를 하는 죄인처럼 제 속마음을 늘어놓았다.
“어린 시절, 형제들과 치열하게 경쟁을 했을 때에도, 전쟁터에서 동료를 잃었을 때에도. ‘그만하면 됐다. 그러니 멈춰라.’ 그렇게 말해 주는 이가 없었다. 어쩌면 내겐 그 말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군.”
나는 조용히 그의 고백을 들었다.
그가 황태자의 자리까지 얼마나 힘겹게 올라갔는지는 마거릿의 기억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에녹에겐 브레이크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힘들지 않느냐며 그만하면 괜찮다고 위로 한마디를 건네는 이도 없었다.
게다가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것도 트라우마의 일종이었는데, 그걸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사람도 없었을 거다.
“앞서 말했다시피, 종전 이후에 생긴 후유증이다. 로말리잔 전투에서 수많은 전우를 잃었던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에 피를 보면 폭주를 하는 건데, 경미한 상처까지는 괜찮아.”
작은 상처 정도로 그의 발작 버튼이 눌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건 정말 다행이다.
“추측하건대, 만약 내 발작을 통제할 수 있는 통제어가 있다면 그대가 그때 말한 단어들이 아닐까 싶군.”
어쩐지 봐서는 안 될 걸 들춘 기분이었다.
‘아무도 이렇게 완벽한 남자가 누군가에게 통제받고 싶어 한다는 걸 모르겠지.’
원작에서 유안나는 육체적 사랑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근본적인 트라우마 해결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그에게 당부했다.
“통제어가 있다는 건 다행이에요. 제가 도와 드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피를 볼 것 같은 상황이 되면, 무조건 피해요. 알겠죠?”
내 말에 에녹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군.”
“미안하단 말은 그만 해요. 당신 잘못 아닌 거 아니까.”
내 말에 에녹이 다시금 무거운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가 부러진 나무 막대기를 옆으로 치우고 괜스레 내 옆에 놓인 구급약통을 뒤적거렸다.
“상처에 바르는 약이 어떤 거지?”
상처에 바르는 약? 다친 곳이 더 있었나?
나는 황급히 약통을 뒤적이고는 연고를 꺼냈다. 내가 발라 주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에녹이 내 손에서 연고를 쏙 빼 갔다.
“다시 봐도 신기하게 생긴 약이군.”
에녹이 후X딘을 보며 중얼거리더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뚜껑을 열어 손에 연고를 짜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내가 놀라서 뒤로 몸을 뺐더니 에녹이 미간을 좁히고는 나를 쳐다봤다.
“왜, 왜요?”
“일단 여기도 약을 발라야 할 것 아닌가.”
에녹이 내 광대뼈에 연고를 발랐다.
에녹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거칠게 다가온 것과 다르게 상처 위를 문지르는 손길은 무척 조심스럽고, 사무치게 부드러웠다.
사실 후X딘은 멍든 부위에 바르는 연고가 아니었지만, 나는 굳이 그 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에녹이 이 행위에 무척 집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왠지 이 분위기를 깨면 안 될 것 같았다.
사실 사심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이 앞에 있는데 어떻게 조용히 감상을 안 하고 배겨.
“아앗.”
그의 손가락이 조금 깊은 상처 위를 스치자 쓰라림이 밀려와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 남자가 또 무슨 짓을 했지?”
에녹은 정말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마치 눈앞에 카이든이 있었다면 정말로 죽이기라도 했을 듯이 말이다. 왜 이렇게 새삼스레 오버를 한담?
“그게 다예요. 발로 걷어차고 도망쳤거든요.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고 기절했죠. 깨어나 보니 아침이었어요.”
에녹은 내 말이 계속될수록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끝내 뱉은 말은,
“이 섬을 탈출하기 전까진 혼자 움직일 생각은 하지 마.”
그뿐이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요.”
물론 거짓말이다.
카이든을 만나게 된 이상, 에녹의 곁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얼른 벙커의 위치에 대한 단서라도 찾아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