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9)화 (19/234)

“네……? 제가 왜요?”

에녹은 지그시 마거릿을 응시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는 마거릿의 눈빛은 지금까지 어떻게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다치지 않을 테니까, 그런 약초 따위 찾겠다고 위험한 짓거리는 하지 마.”

에녹은 그녀의 양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손안에 닿는 맨살의 감촉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녀와 조금 더 많이 닿고 싶다. 그 미칠 것만 같은 욕망을 가까스로 누르며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기댔다. 코끝이 간질거리게 닿았다.

그녀를 향한 이 격렬한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걱정했다.”

그녀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밤새 그녀를 찾아 돌아다니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그녀는 알기나 할까.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는 꼴을 보아하니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러다가 에녹은 그녀의 광대뼈에 크게 피멍이 든 것을 발견했다.

얼굴에 여기저기 흙이 묻어 있던 데다가 조금 전까지 그가 제정신은 아니었기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상흔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광대뼈 부분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녹은 그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기분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이건……. 뭐지?”

왜 이렇게까지 격한 감정이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마거릿.”

그녀가 예쁜 눈망울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말랑한 피부의 감촉이 손가락에 적시듯 감겼다.

쓰라렸는지 그녀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 모습마저 지나칠 정도로 어여뻐서 또다시 갈증이 일었다.

“다쳤잖아.”

“……혹시 멍들었어요?”

“피멍이 든 것 같은데.”

“아 네, 그냥 좀 다쳤어요.”

마거릿은 당황한 얼굴을 한 채, 뺨을 손으로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게 더 사람을 미치게 하는 행동인 줄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의 대답에 마거릿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정말 새삼스럽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하께서 그런 말을 하다니, 아직 열이 덜 내렸나 봐요.”

그녀가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를 흘겨봤다.

“아무튼 성. 가. 실. 텐. 데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더니 웃으며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신사된 도리로 영애를 배려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헛된 기대를 품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그럼 피차 성가셔지니까.’

어쩐지 과거에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답이다.

에녹은 지나온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었다. 그간 그녀에게 내뱉은 수많은 악담과 무례를 지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마거릿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정말 배고파서 아사하기 직전이거든요.”

그녀는 정말로 배가 고픈지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한 손으로 배를 감싸고 있었다.

“사냥이라도 하러 가면 안 되나요? 물론 당신 상처부터 치료하고요.”

에녹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녀가 배가 고프다니, 뭐라도 먹여야겠다.

* * *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에녹이 밤새 나를 찾아 숲속을 헤맸다는 사실이 그랬고, 내게 자신을 에녹이라고 부르라고 한 것도 이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이상한 건, 그가 나를 플로네 영애가 아닌 ‘마거릿’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내가 없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에녹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 구급약통을 뒤적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약통에 빼곡하게 들어 있는 약품들을 열심히 살폈다.

제법 큰 사이즈의 약통이라 안에 든 약품 종류가 다양했다. 처음 보는 약품들도 많았는데 대충 사용법이나 설명이 적혀 있어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소설을 보면서도 생각한 거지만, 이런 게 여기 왜 있는 걸까?’

저자가 대체 무슨 의도로 ‘한국산 생존 키트’라는 쓸데없는 장치를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에녹이 나를 따라 약품을 살피다가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도무지 못 알아보겠군.”

당연히 그는 알아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온통 한글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에녹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답을 회피할 수 있으면 회피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약통에 무슨 약이 들었는지 살피면서 정리를 하던 난 소독약을 찾아냈다.

그것으로 우선 에녹의 상처를 깨끗하게 소독한 뒤, 제대로 된 붕대를 잘라 그의 팔에 감았다.

에녹은 내가 능숙하게 약통을 찾아 상처를 치료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구급약통에서 내가 사용한 약품을 꺼내어 살피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대는 이게 소독약이라는 걸 어떻게 안 거지?”

에녹의 질문에 나는 또다시 곤란해졌다. 이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나는 일단 마거릿의 기억을 뒤적이며 최대한 이상하지 않은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바다 건너 동대륙 아시죠? 거기서 쓰는 언어인 것 같아요. 제가 그쪽 말을 잠깐 배운 적 있거든요.”

에녹이 그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꼬투리를 잡지는 않았다.

“얼굴의 상처에 대해선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인가?”

그리고 다시금 얼굴에 난 멍에 대해 물었다. 그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넘어졌어요.”

“정말로 그뿐인가.”

뭔가 알고서 묻는 걸까?

에녹은 여전히 나를 뚫어질 정도로 직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고민했다.

생각해 보면 카이든을 만났다는 얘기를 에녹에게 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처음엔 이 섬에 우리 둘뿐이라고 어떻게든 우기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의 계획도 전부 틀어진 지금에 와선 그런 거짓말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나는 발바닥에 꼼꼼히 붕대를 감고는 플랫 슈즈를 고쳐 신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상한 남자를 만났어요.”

카이든은 좀 맛이 간 눈을 하고 있었으니 이상한 남자였던 건 맞지 않나. 사실 좀 미친 것 같기는 했다. 소설에서 묘사되기로도 미친놈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려나?

“그 남자가 입고 있던 로브에서 펜던트가 떨어졌는데, 하필 그때 제가 그 남자 아래에 깔려 있는 상태였어서 광대뼈에 직격탄이었죠.”

콰직.

나는 갑자기 에녹의 손에 들린 나무 막대기가 두 동강이 난 걸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누군지는 여전히 모르고?”

스산한 목소리로 묻는 에녹의 얼굴은 태연했지만, 그에게선 이미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드레스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그때 주운 펜던트를 꺼냈다.

“마탑의 문양이군.”

에녹의 중얼거림에 나는 다시금 펜던트의 문양을 살폈다.

태양 문양으로 세공된 펜던트 중앙에 눈물방울 모양의 자수정이 박혀 있었다. 에녹의 말대로 마탑의 상징이었다.

“그러게요. 그 남자 건데요, 마법사인가 봐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다른 화젯거리를 꺼냈다.

“참. 그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내가 의미심장하게 운을 떼자 에녹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혹시 전하께서는 피를 보면 발작하시는 건가요?”

내 물음에 에녹이 답지 않게 당황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나는 그가 피를 보면 발작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마거릿이라면 몰랐을 테니까.

“실례되는 질문인 거 알지만, 이건 저도 알아야 하는 문제잖아요.”

모른 척 넘어가기엔 내가 감수해야 할 게 너무도 많았다.

에녹은 자책하는 얼굴로 내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곤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한참 뒤에야 한숨짓듯 대답했다.

“억제 가능한 발작이었다. 실제로 제국에선 잘 억제해 왔고…….”

말끝을 흐리던 그가 괴로운 얼굴로 신음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군. 그대에겐 미안하다.”

그러고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내게 잘못을 빌었다.

“그게 에녹 탓은 아니잖아요. 괜찮아요. 제가 궁금한 건 통제 방법이에요.”

내 물음에 에녹은 곤란한 낯을 했다. 나는 자꾸만 내 눈치를 보는 그를 보며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물었다.

“설마……, 통제할 방법도 모르시는 건가요?”

“그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잘 모르겠군. 발작 증세가 생긴 건 전쟁터에서 돌아오고 난 이후부터였으니까. 약물 치료를 받기도 했고 황궁에선 피를 볼 일이 많지 않았다.”

에녹은 죄인이라도 된 듯 괴로워하다가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윽고 그가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거릿, 그대가…… 그만하라고 말해 주는 건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