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도 나는 길눈이 밝은 편이었고 어렵지 않게 에녹과 이틀 밤을 보냈던 동굴을 찾아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동굴엔 에녹이 없었다.
나는 구급 약통을 품에 안은 채 동굴 앞에 서서 망연자실했다.
그가 떠났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혹시 여주에게 간 걸까? 내가 없는 사이 여주 유안나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녀를 만났다면 나 같은 건 미련 없이 버리겠지.
물밀듯이 서운함이 밀려왔다. 조금 전까지 목숨을 위협받으며 그를 무척 그리워했기 때문인지 더욱 그랬다.
며칠 동안 그와 함께 지냈더니 정이라도 든 모양이다.
상처는 다 나은 걸까? 많이 호전된 상태로 보이긴 했는데.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에녹이 없다면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처음 계획대로 혼자 지하 벙커를 찾아야겠다. 아무튼 홀로 버텨 살아남는 거다.
‘그래. 원래 그러려고 했잖아.’
나는 결심을 굳히며 동굴을 나왔다.
그리고 그때, 동굴 앞에 선 남자와 마주쳤다.
새카만 흑발에 금안, 왼쪽 눈 아래 아련하게 찍힌 눈물점까지.
화려한 제복이 군데군데 찢겨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반듯한 차림새를 한 남자가 나를 보며 놀란 얼굴로 멈춰 서 있었다.
에녹이었다.
재킷을 입고 있어서 팔뚝에 난 상처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걸 보니 상처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아……. 떠나신 줄 알았어요. 몸은 괜찮으신가 보네요. 다행이에요.”
나는 구급약통을 품에 안은 채, 에녹을 향해 말했다. 그러곤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품안에 든 약통을 들어 보였다.
“약초를 찾으러 간다고 했잖아요. 찾았어요. 정확히는 약초가 아니라 구급약통인데. 완전 득템했죠.”
횡설수설하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그가 ‘득템’이라는 단어를 모를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녹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가 내 품 안에 들린 구급약통에 꽂혔다.
한참 동안 구급약통을 노려보던 그가 갑자기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왔다. 그러곤 이를 악물고 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그 기세가 굉장히 살벌해서 나는 그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멀어진 만큼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몸은……. 괜찮나.”
에녹은 화를 꾹꾹 눌러 담은 것 같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나는 의아해서 그를 불렀는데, 그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싸늘한 얼굴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에녹.”
“네?”
“에녹이라고 불러.”
“네……? 제가 왜요?”
당황해서 한 내 반문에 에녹이 화를 눌러 담는 얼굴로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이윽고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원망마저 어린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주저앉는 기분이 들었다.
‘와…….’
저런 얼굴은 반칙이잖아.
역시 극한의 환경에 처하면 사람은 변한다. 그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 관계도 미화가 되어서 그런 걸까?
그런 것 치곤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화만 내고 있는데.
“다치지 않을 테니까, 그런 약초 따위 찾겠다고 위험한 짓거리는 하지 마.”
에녹이 내 양 어깨를 잡았다. 이어서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기댄다. 닿은 코끝이 못내 간질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때 알았다. 내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걱정했다.”
코앞에서 들려온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순간, 그에게 홀릴 뻔했다.
아 진짜 위험했어. 뭐야, 갑자기 왜 이러지?
* * *
에녹은 정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늦은 오후의 서늘한 공기가 코끝에 맴돌고 있었다.
잠시 누운 채로 두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조심히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팔뚝에서 아릿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왼팔을 내려다봤다. 팔엔 새하얀 천이 감겨 있었는데, 딱 보아도 마거릿의 드레스 조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거릿은 어디 있지?’
그는 익숙한 동굴 안에 누워 있었고 동굴 밖으로는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이 보였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지금 시간에 밖을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는 소리였다. 그건 마거릿과 지내는 동안 관찰한 결과 파악한 패턴이다.
그와 마거릿을 공격하던 마물들은 낮 동안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꼭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에녹은 주변을 다시 꼼꼼하게 살폈다. 동굴 안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마거릿은 아무래도 동굴 밖으로 나간 것 같았다.
‘약초라도 구해 올게요. 금방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마거릿이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제기랄.”
에녹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동굴 벽에 세워 둔 나무 막대를 손에 쥐었다. 그가 무기 대용으로 만들어 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놓일 줄 알았다면 단검이라도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 낯선 섬에서 눈을 뜨기 직전까지 황궁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 무기 같은 걸 갖고 있을 리가.
일단 나무 막대를 한번 점검하고는 동굴 밖을 살폈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아우우우!
늑대 울음소리가 수풀 사이로 울려 퍼졌다. 에녹은 나무 막대를 고쳐 쥐고는 바짝 긴장한 자세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대체 이 여자는 어딜 간 거야.”
그는 욕지거리가 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동굴 주변부터 수색했다. 그러나 마거릿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체력도 없고 연약했다. 그 몸으로는 마물이 돌아다니는 이 밤을 멀쩡히 버틸 수 없으리라.
에녹이 이를 악물고 숲 속을 헤매는 사이, 해가 저물고 어둑한 밤이 왔다.
그럼에도 그는 마거릿을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평소의 그였다면,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그녀를 찾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그녀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극한의 환경에 내몰리면 사람은 변하기도 해요.”
분명한 건, 그녀는 그가 알던 마거릿이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다.
“저에 대한 사랑이 식었나 봐요. 나쁜 새X.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리고 어딘지 이상한 구석도 있었다. 그건 사람이 변했다는 말로는 부족한 그런 기묘한 느낌이 있었다.
정말 개과천선이라도 한 걸까? 그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대로 극한의 환경에 내몰려서?
그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 냈다. 그리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주변을 훑었다.
이 숲속 어딘가에서 마거릿이 두려움에 떨며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에녹은 저를 끔찍하게 좋아하던 여자에게 너무 모질게 굴었음을 깨닫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로지 그만 바라보는 그녀를 지켜 주지는 못할망정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속이 갑갑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름 그 자신은 예의 바르고 신사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마거릿의 말대로 극한의 환경에 닥치니 사람이 변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그의 본성이 원래부터 이리 썩어 빠졌던지.
“이게 야자나무에서 열리는 코코넛 열매거든요? 이 코코넛 안에 든 수액이 수분 보충하기 좋아요.”
“저런 절벽 아래에는 동굴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가는 길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저만 한 거처도 없을 거예요.”
이 섬에서 깨어난 뒤로 마거릿은 그에게 도움을 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녀가 가진 놀라운 지식들은 그조차도 몰랐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과연 그녀가 없었어도 지금까지 그가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그가 여태 살아 있는 건 모두 그녀 덕이었다.
에녹은 새삼 한탄했다. 마거릿은 그를 위해서라면 재고 따지는 것 없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도왔는데, 대체 그는 왜 그렇게 못나게 굴었던 걸까.
그녀도 낯선 곳에서 깨어나 두려웠을 게 분명했다. 섬에는 의지할 사람 없이 오직 둘뿐이었다.
“영애도 아직 용의 선상에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제국으로 돌아가면 이 상황에 대해 제대로 추궁을 할 거다, 그러니 내 허락 없이 죽어선 안 돼.”
기댈 곳 없는 그녀에게 그는 잔뜩 날이 선 말들로 몰아세우기만 했다.
이 낯선 섬에서 그녀 없이 혼자서는 버틸 수 없다, 에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그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제길…….”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기도했다.
부디 그녀가 살아 있기를.
부디, 그녀가 무사하기를.
결국 에녹은 해가 뜰 때까지 숲을 헤치며 마거릿을 찾아 돌아다녔다.
밤새 마물과 마주치지 않은 건 정말이지 천운이었지만, 마거릿을 찾는데 별 소득은 없었다.
그녀가 만약 마물을 피해 숨어 있던 거라면, 해가 떴으니 다시 돌아올지도 몰랐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동굴로 돌아왔다.
불투명한 기대와 함께 동굴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동굴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자의 백금발은 햇살을 받아 더욱 눈부시게 반짝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 그래. 내가 드디어 미쳤다는 건 인정해야겠군.’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마물이 무리를 지어 나올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숲속에서 밤새도록 그녀만을 찾아다녔으니까.
그녀가 그를 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품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새하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아……. 떠나신 줄 알았어요. 몸은 괜찮으신가 보네요. 다행이에요.”
그녀가 자신의 품에 들린 새하얀 상자를 내어 보이며 말했다.
“약초를 찾으러 간다고 했잖아요. 찾았어요. 정확히는 구급 약통인데. 완전 득템했죠.”
아마도 그의 상처를 치료할 약초를 찾기 위해 숲속을 밤새 헤맨 모양이다.
에녹은 이를 악물었다.
마거릿은 역시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여자였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 텐데 저렇게 작은 몸으로 그를 구하겠다고 애를 쓰다니…….
이렇게 목숨을 걸 정도로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에녹은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에녹.”
“네?”
“에녹이라고 불러.”
그래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