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관계는 변하기 마련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쓰러진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난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우려했던 바와 달리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더욱 다행스럽게도 카이든 또한 기절한 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때 나는 내가 손에 뭔가를 꽉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가락을 펴 보니 카이든의 펜던트가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이것 때문에 날 쫓아왔던 건가?’
그때, 발바닥과 발뒤꿈치에서 아릿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나는 펜던트를 드레스 주머니에 넣고 플랫 슈즈를 살짝 벗어 보았다. 피가 묻어 있었다. 물집이 또 터진 모양이다.
나는 손에 힘을 주고 드레스 자락을 찢었다. 피가 묻은 천을 버리고 새 천을 발에 감쌌다. 소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이렇게라도 상처를 보호해야 했다.
처치를 마친 나는 다시 플랫 슈즈를 고쳐 신었다. 그리고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이 옅은 보랏빛이었다.
“내가 카이든에게 쫓기고 있을 때가 오후 무렵이었으니까……. 지금은 저녁인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만약 지금이 아침이 아니라 밤이 되는 중이라면, 바로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마물들이 활동할 시간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다친 몸으로 에녹 혼자 동굴에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에녹이 아니라 내 걱정을 먼저 해야 했다. 나는 차분하게 주변을 살피며 숨을 곳을 찾았다.
이곳에 한참을 쓰러져 있었던 것 같은데 상태가 멀쩡한 것을 보아, 천만다행으로 근처에 마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불안했기에 나는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커다란 바위 밑에서 숨을 공간을 찾았다.
바위 아래로 몸을 구겨 넣고 있는데 발밑에 단단한 물체가 걸렸다.
“……뭐지?”
나는 바위 밑에서 기어 나와 고개를 숙이고 안을 살폈다. 흰 상자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손을 뻗어 힘겹게 물건을 꺼내어 살폈다. 직사각형 모양의 상자 뚜껑엔 빨간 십자가 모양의 적십자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정글에는 어울리지 않는 낯선 물건이다. 나는 잠시 얼떨떨한 얼굴로 상자를 쳐다만 봤다.
“어라, 잠깐. 적십자 로고? 이거 설마……?”
마거릿과 기억이 동화된 탓에 한동안은 란그리드 제국에 대한 기억만 가득해서 구급약통을 빠르게 인식하지 못했다.
상자를 열어 안에 가득 든 약품을 발견하고서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살았다.”
소설 속에서 유안나가 찾았던 구급약통과 동일한 물건으로 보였다.
나는 차분히 약품들을 훑었다. 역시나 전부 한글로 적혀 있었다. 이래서 한글을 모르는 등장인물들은 약통에 든 약품들을 절반도 사용하지 못했었지.
아우우우!
기쁨도 잠시, 멀리서 들려온 늑대 울음 소리에 나는 황급히 약통을 품에 안고 바위 아래로 들어갔다. 다리에 쥐가 났지만 차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입을 틀어막고 한참을 바위 아래에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수만 가지 생각들이 스쳐 갔다. 에녹과 함께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두려움이 나를 잠식했다.
바스락.
그리고 그때, 어디선가 풀잎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바짝 얼었다. 심장이 이대로 멎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숨을 죽였다.
터벅. 터벅.
지척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는 부드러운 흙바닥 위로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이내 우뚝,
그리고 다시 터벅터벅,
다시금 우뚝.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한 걸음이었다.
혹시 카이든인가?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거세게 요동쳐서 고통스러웠다. 두려움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이러다간 자칫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아서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터벅.
시야에 한 쌍의 다리가 멈춰 섰다.
바위틈으로 보인 다리는 검은 털로 가득 덮여 있었다.
짐승의 것으로 추정되는 그 다리는 다리 하나가 성인 남성 다리의 두 배는 될 정도로 굵직했다.
스윽.
옆을 보고 서 있던 발이 흙바닥을 쓸고 천천히 돌아섰다. 반 시계 방향으로 움직인 발은 어느 순간 우뚝 멈췄다. 발끝이 나를 보고 있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정체 모를 짐승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천천히 앉았다.
이어서 바위틈으로 털이 복슬복슬한 손가락이 들어왔다. 몸도 따라 느릿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아, 안 돼.’
차마 눈을 감지도 못하고 뜬 눈으로 달달 떨었다. 이대로 죽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콰앙!
갑자기 숲속 가득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몸을 숙이던 짐승의 동작이 멈췄다. 놈의 상체가 돌아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던 짐승이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바위틈까지 들어왔던 손이 멀어지더니 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쿵.
쿵.
쿵.
쿵.
커다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짐승이 완전히 사라지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떨기만 했다.
다행히도 내가 기절했다가 깨어난 시점은 저녁이 아니라 아침이었던 모양이다. 사위가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나는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서야 바위 아래에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대체 그건 뭐였지?”
일반적인 야생 동물의 형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럼 역시 마물밖에 없는데. 소설 속에서도 보지 못한 형태의 마물이었다. 그러나 저런 형태의 마물은 소설 속에서도 보지 못했다.
소설 <생존보다 중요한 것>에 등장하는 마물들은 기본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체를 표본으로 하고 있어서 저토록 이질적으로 생긴 마물은 없었다.
그것들이 끊임없이 몸을 변형시키고 진화한다는 묘사를 언뜻 본 것도 같은데 정확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늑대형 마물들도 분명 몸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읽은 소설 내용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가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조금 전의 충격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과연 내가 이 섬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구급약통을 들고 바위 앞에 쪼그려 앉아 주변을 살폈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혹시나 마물이 남아 있을까 봐 망설였다.
해가 쨍쨍한 한낮이 되어서야 나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에녹이 기다리는 동굴을 찾을 수 있을까.
처음으로 나는 에녹이 몹시도 보고 싶어졌다. 그를 봐야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