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랄!’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나는 곧장 뒤를 돌아 뛰기 시작했다.
잘못 걸렸다. 반드시 피해야 할 남주랑 마주치고 말았다.
저 남자는 소설 <생존보다 중요한 것>에 등장하는 남주 5, 카이든 블레이크 로하데였다.
‘소설을 읽을 땐 가장 좋아했던 남주였지만, 제일 미친놈이라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고!’
원작에서 마거릿을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 에녹이라면 그녀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사람은 카이든이었다.
마거릿은 결국 카이든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다른 남주들도 살인에 가담했지만, 결정적으로 마거릿을 살해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역시 인생은 엿 같은 타이밍으로 이뤄져 있는 게 확실해!
나는 카이든을 피해 정신없이 수풀을 헤집고 뛰었다. 낯선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 간다.
목적지가 불분명한 상태로 달리고 있었던지라 위험했다. 자칫 야생 짐승을 만나거나, 절벽을 보지 못하고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그저 카이든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잠깐만!”
등 뒤로 카이든의 외침이 들려왔다.
우연찮게 남주들을 맞닥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역시 이렇게 갑작스러운 조우는 혼란스럽다.
나는 결국 카이든의 손에 붙잡혔고 발버둥을 치다가 그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그가 내 몸 위에 올라타고는 양손을 나를 결박했다.
“이봐, 가만히 좀 있어 봐!”
나는 격하게 발버둥을 치다가 그만 그의 로브에서 떨어진 펜던트에 광대뼈를 맞았다.
“악!”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괜찮아?”
카이든이 찬찬히 내 얼굴을 살폈다.
그제야 진정을 하고 나는 내 광대를 가격한 펜던트를 주웠다. 빛나는 태양을 오브제로 제작한 금속 펜던트였다.
무게감이 상당한 걸 보니 아무래도 이걸로 얻어맞은 내 광대뼈엔 멍이 들었을 것 같다. 얼얼한 게 무진장 아팠다.
내 얼굴을 가만히 관찰하던 카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나는 그의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손목에 힘을 줘 봤지만, 나를 붙잡고 있는 카이든의 괴물 같은 힘 때문인지 꿈쩍도 안 한다.
“분명 낯익어.”
카이든은 한참 동안 내 얼굴을 훑었다. 그의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가 섬뜩해서인지, 그는 전체적으로 무서운 분위기를 풍겼다.
불편한 정적이 계속됐다.
“아, 미안해. 힘들었지? 일어나.”
카이든은 뒤늦게 내 몸 위에서 내려와 나를 일으켜 주었다. 물론 내 팔을 꽉 잡고서 놔주지는 않은 채였다.
“이해해 줘. 이런 오지에서 갑자기 귀족처럼 보이는 여자를 만났는데 누가 봐도 수상쩍잖아.”
카이든이 웃으면서 내게 양해를 구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열이 받는 건 마찬가지였다.
일단 지금의 그는 여주를 만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딱 보기에도 동행자 없이 혼자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찰랑.
그가 고개를 움직이자 귀걸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의 오른쪽 귀에 걸린 귀걸이를 쳐다봤다. 원작에서 빈번하게 묘사되던 그 귀걸이다.
그는 어린 시절, 신전에 납치되어 실험을 당한 뒤로 귀걸이가 없으면 마력을 조절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당시 납치된 소년이 로하데 가문의 차남이라는 게 밝혀져서 세간이 떠들썩했는데, 로하데 후작이 신전과 모종의 거래를 하며 사건이 어이없게 무마되고 만다. 카이든만 억울한 희생자가 된 것이다.
아무튼 그런 과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가문과 신전을 증오했다. 신전에서 진행되는 실험과 가문에서 후원하는 실험은 모조리 판을 뒤엎고 다닐 정도로 말이다.
마거릿은 하필 그 시기에 신전에서 진행하는 ‘사랑의 묘약’ 실험을 추진하고 후원했다.
그로 인해 카이든이 플로네 공작 가문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었지만, 마거릿은 그럼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실험을 강행했다.
카이든은 그 사건을 계기로 마거릿을 혐오하게 된다.
“모르겠다, 어디서 본 얼굴인지 기억 안 나네.”
한참 만에야 내 얼굴에서 눈을 뗀 카이든이 씨익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천만다행으로 마거릿의 얼굴을 기억 못하는 모양이다.
“근데 진짜 예쁘다, 너.”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은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지 않을까.
나라면, ‘여기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대체 넌 어떻게 여기에 있냐’, 혹은 ‘누구냐’라는 소리가 먼저 나왔을 거다. 아니면 에녹처럼 ‘네 짓이냐’라고 물을 수도 있고.
하지만 카이든은 내가 예상한 그 어느 질문도 하지 않았다.
“왜 도망갔어?”
그가 섬뜩하게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기로 결심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그의 주의를 끌거나 혹은 신경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였다.
“말을 못 해? 이상하네, 분명 조금 전에 비명은 질렀잖아.”
그는 어떻게든 내가 입을 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리는 걸 보고 긴장했다.
‘에녹처럼 폭주하는 건 아니겠지?’
기억하기로 원작에선 그의 마력 조절 귀걸이가 고장이 난다. 섬에서 깨자마자 말이다.
덕분에 그의 마력이 몸 안에서 제대로 순화하지 못하고 정체되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고열을 앓는가 하면, 때때로 감정 제어를 심각하게 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진정시킬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유안나였다. 물론 방법은 에녹의 경우와 같았다.
……사랑이지, 뭐.
아무튼 카이든에게도 에녹 때처럼 강아지 훈육법을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그가 내게로 고개를 훅 숙였다.
더운 숨결이 예민한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니면, 나랑 말하기 싫어? 말하기 싫어도 해야 할 텐데. 정 그러면 내가 입을 열게 해 줄까?”
“……원하는 게 뭐야.”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내 물음에 카이든이 그제야 곱게 눈웃음을 쳤다.
그는 무척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밝은 머리색 때문일지도 모르겠는데 날카로운 눈매만큼이나 정돈되지 않은 눈빛은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동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카이든을 좋아했던 이유도 사실 외모 때문이긴 했다.
카이든의 시선이 다시 뱀처럼 나를 훑어 내렸다.
“목소리도 예쁘다.”
“내가 원래 다 예쁘긴 해. 근데 왜 반말이야?”
내 반문에 카이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게 더 친근하잖아. 너도 반말해.”
내가 왜 너랑 친근하게 지내야 하는데!
하지만 그는 존대를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카이든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스타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린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았으니 존대를 하는 게 맞잖아.
에녹이야 서로 신분을 아는 사이여서 반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카이든은 아니었다.
뭐, 저쪽에서 먼저 반말을 했으니 나도 똑같이 해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이거 놔.”
“싫어.”
그러나 카이든은 내가 반말을 하든 안 하든 특별히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근데 아무리 봐도 넌……. 내가 아는 누구랑 좀 많이 닮은 것 같은데.”
카이든은 신기한 것을 관찰하는 시선으로 나를 꼼꼼하게 훑었다.
하긴, 카이든이 플로네 저택으로 찾아와 마거릿에게 실험 후원 중단 요청을 한 건 꽤 오래 전 일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마거릿이 카이든의 청을 단칼에 거절하고 바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실상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아주 찰나였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상한 건 아니다.
“넌 누군데?”
나는 그가 더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질문을 던졌다.
“카이든 블레이크 로하데.”
카이든이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아니.”
그가 묻기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가만히 내 얼굴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아, 잠깐만. 생각났다. 너, 란그리드 제국의 미치광이 영애랑 좀 닮은 것 같은데?”
미치광이라니, 지금 누가 누구한테!
“사람 앞에 두고 그런 말은 실례라는 거 몰라?”
“진짜 플로네 영애야?”
나는 미간을 좁히고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일단 부정하고 봤다.
그러자 카이든이 잘됐다는 듯이 웃었다.
얼굴을 알아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카이든의 말에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그래? 다행이네. 그 여자를 내가 좀 많이 싫어하거든.”
카이든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듣는 나는 피가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에녹이 날 위협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카이든은 진짜로 날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위협을 느끼고 바짝 긴장하고 있던 중이었다.
“어라? 근데…….”
그가 대뜸 고개를 기울이고는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네 몸에서 단내가 나, 이상하네.”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거렸다. 너무 바짝 밀착해서 입술이 닿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