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3)화 (13/234)

“오. 힘 좋으시네요.”

아차, 나도 모르게 또 바보 같은 말을 하고 말았다. 능청스러운 감탄사는 분명 마거릿답지 않았을 거다.

“영애는 그 입 좀 다무는 게 좋겠군.”

역시나 에녹이 타박했다.

내가 입을 다물자 그제야 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아주 조심히 내 발에서 플랫 슈즈를 벗기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 생경하게 바라봤다.

생각해 보라. 나를 경멸해 마지않는 제국의 황태자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발을 벗기고 있다니 참 기묘하지 않은가.

아니, 이건 뭔가……. 굉장히 야릇하다.

드러난 맨 발목에 에녹의 손이 닿았다. 가느다란 발목이 그의 커다란 손에 헐겁게 잡혔다.

‘간지러워.’

나는 발끝을 움츠렸다. 그러다가 곧 발바닥에서부터 전해지는 쓰라림에 미간을 좁혔다.

“앗.”

“참아.”

에녹은 냉정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유리 인형을 다루듯 세심하게 내 발을 살폈다. 역시나 발바닥과 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큰일이다. 물집이 터지면 곤란해지는데.”

내 중얼거림에 에녹이 설명을 바라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물집이 터져서 상처가 곪으면 감염될 우려가 있어서요.”

나를 바라보는 에녹의 표정은 딱 그랬다. 그런 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이런 건 상식이잖아요.”

“영애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나.”

“뭐야, 나 이거 기분이 좀 그래. 지금 과거의 제가 무식했다고 욕한 거 맞죠?”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그렇게 고상하게 말하면 제가 못 알아들을 줄 알았어요? 보기보다 진짜 무례하시네요.”

“그간 영애가 내게 저지른 무례만 하겠나.”

에녹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구석이 없다. 여기서 더 물고 늘어져 봐야 나만 불리하지, 또. 하는 수 없이 말을 돌렸다.

“아무튼 이럴 땐 물집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아야 피부가 자체 보호막을 형성할 수 있거든요. 그다음 깨끗하게 닦아 주고 얼음찜질을 해 주는 게 좋을 텐데…….”

나는 말끝을 흐리다가 곤란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요.”

동굴로 돌아가는 게 최선인데, 그러려면 신발을 다시 신고 움직여야만 했다.

에녹은 고민하는 얼굴로 내 발을 가만히 쳐다봤다. 왜 남의 맨발을 빤히 쳐다보고 그러는 거야, 민망하게.

그는 한참 뒤에야 벗긴 플랫 슈즈를 내 손에 쥐여 줬다. 이건 왜?

의아해서 에녹을 바라봤는데 그가 예고 없이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공주님 안기를 하듯이 말이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 플랫 슈즈를 손에 든 채,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뭐예요?”

“영애가 말하지 않았나. 물집을 건드리는 건 좋지 않다고.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더 꽉 잡아.”

에녹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하는 수 없이 플랫 슈즈를 아랫배 위에 올려 두고 그를 더 깊게 끌어안았다.

서로의 몸이 빈틈없이 밀착됐다.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심장 박동까지 느껴질 정도로.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고 조금 민망해서 나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동굴 주변 탐사는 그렇게 내 발에 물집만 남기고 끝이 났다.

‘탐사는 내일 또 하지, 뭐.’

우리에겐 남는 게 시간 아니던가.

나는 에녹에게 안긴 채로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에녹은 묵묵히 나를 안고 이동했다. 그는 정말 든든했다. 그래서 나는 문득 그가 여주를 만나고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기만 한다면, 함께 지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전 정말 다른 사람이 됐거든요. 대충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래서 괜히 그런 쓸데없는 말을 꺼냈다.

에녹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내가 이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어서 그냥 무시하는 걸까.

고민 중이던 때, 에녹이 입을 열었다.

“그래. 적어도 그대와 대화하는 게 예전만큼 불쾌하지 않다는 건 확실해.”

에녹이 중얼거렸다.

나는 마거릿의 과거 기억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과거의 에녹과 마거릿은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는 아니었지.

“하지만 내가 영애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벼락처럼 떨어지는 에녹의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폭풍 전야처럼 고요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신사 된 도리로 영애를 배려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헛된 기대를 품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그럼 피차 성가셔지니까.”

에녹은 갑자기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한다.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에녹을 좋아하는 것치고 마거릿이 그에게 했던 말들은 상당히 모진 구석이 많았다.

“솔직히 전하께서 왜 저와 결혼도, 약혼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전하께서 가지지 못한 걸 가졌잖아요. 순수 귀족 혈통이요.”

마거릿은 에녹을 좋아한다면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사람이었다.

그래. 원래의 마거릿이 지은 죄를 생각하면 에녹이 내게 어느 정도 호의적인 감정을 갖게 될지언정, 나를 좋아하게 될 일은 영원히 없을 것 같다.

‘역시 혼자 벙커로 도망치는 게 답이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잠깐만요, 전하. 지금 저 바위가…… 움직인 것 같지 않아요?”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에녹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낮은 높이의 언덕이 있었는데, 언덕의 가파른 절벽 끝에 동그랗고 거대한 바위가 얌전히 올라가 있었다.

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절벽 위에 저렇게 단단하고 큰 바위가 놓여 있는지 모르겠다.

“글쎄, 바위가 움직였다니……. 헛것을 본 건 아닌가?”

신기루 현상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에녹의 대답에 나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아니, 헛것을 보려면 따끈한 쌀밥에 김치찌개 정도는 봐 줘야지, 왜 바위가 움직이는 것 따위를 본단 말이람?”

이상하다. 분명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그러나 에녹의 말대로 잘못 본 게 맞는지 빤히 바라보고 있어도 바위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결국 나는 에녹을 따라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성가신 여자랑 대화하는 게 더 이상 불쾌하지 않다니 그건 참 다행이네요.”

“다행일 것도 많군.”

반어법 모르나? 아니면 일부러 비꼰 건가?

황당해서 에녹의 옆얼굴을 쳐다봤는데 그는 아무 표정 변화도 없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원.

그런 실없는 얘기를 몇 번 더 주고받고 있던 와중이었다.

쿠웅-.

갑자기 어디선가 둔중한 소음이 울리더니 땅이 옅게 진동했다.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쿵. 쿵.

타닥타닥.

흙바닥으로 둔탁한 무언가가 연속으로 착지했다. 이어서 짐승의 발자국 소리가 뒤따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절벽 위에 있던 바위를 돌아봤다.

그러나 참담하게도 절벽 위에는 조금 전까지 의아하게 여겼던 그 바위가 없었다.

하늘을 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고 울창한 숲은 다소 어둑해져 있었다.

그래도 지난번처럼 아주 어두운 건 아닌데……?

“뭐, 뭐야.”

나는 에녹의 옷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나를 안고서 에녹이 뒤로 한 걸음씩 천천히 물러났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쿵-. 타닥타닥타닥.

이번엔 반대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봤지만, 시야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타다다다다닥!

타다다다다닥!

지금 건 뒤에서 들린 소리다. 그리고 그것은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왔다.

발자국 소리는 한두 군데에서 들리는 게 아니었다. 그건 즉, 여러 마리의 짐승이 모여들었다는 얘기다.

“전하! 도망ㅊ……!”

에녹을 부름과 동시에 수풀 사이로 여러 마리의 늑대가 허공을 도약했다. 그 장면이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이대로라면 우리 둘 다 위험하다. 나는 결심을 하자마자 에녹을 있는 힘껏 밀쳐 냈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바닥 위를 거칠게 나뒹굴었다.

“영애!”

우리가 서 있던 자리 위로 세 마리의 늑대가 착지했다. 늑대를 중심으로 반대편에 서 있던 에녹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봤다.

그때, 늑대가 바닥에 넘어진 나를 향해 거대한 입을 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