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2)화 (12/234)

4. 카이든 블레이크 로하데

재킷 사건은 결국 내가 재키를 사랑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결론이 뭐 이리 X 같아.’

늘 말하지만, 인생은 원래 엿 같은 타이밍으로 이뤄져 있는 법이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어쩌겠는가.

이른 아침, 우리는 코코넛 그릇에 모아 둔 물을 마시며 수분 충전을 하고는 아사이 야자로 허기를 채웠다.

빗물을 그릇 가득 받기는 했지만 코코넛 그릇이 워낙 작아서 둘이 마시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물이라도 마음껏 마시고 싶은데…….’

아무래도 오후엔 식수를 만들 여과기를 제작하거나 물을 증류할 방도를 찾아봐야겠다.

동굴을 임시 베이스캠프로 지정한 우린 일단 예정대로 정찰을 나가기로 했다.

며칠은 이곳에서 지내며 체력을 회복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베이스캠프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파악해야 했다.

나는 에녹과 함께 근처 숲을 탐색하다가 혹여 다른 남주들과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나는 수풀을 헤치며 에녹의 뒤를 따라 걷다가 나뭇가지에 드레스 자락이 걸려 걸음을 멈췄다.

“이 망할 드레스가……!”

제기랄, 하루빨리 오두막을 찾아야겠다. 오두막엔 현대식 옷들이 꽤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도 바지 입고 싶어!’

그렇게 나뭇가지에 걸린 드레스를 빼내려고 한참을 낑낑거리고 있을 때였다.

등 뒤로부터 커다란 손이 뻗어져 나왔다.

에녹이었다. 그는 나뭇가지에 걸린 내 드레스 자락을 아주 손쉽게 빼 주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감정 한 조각 없는 단단한 얼굴선이 눈에 들어온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

“네? 왜요?”

조건 반사적인 반문이었다. 그러자 에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세상에, 찡그린 얼굴마저 소름 돋게 잘생겼네.

“자꾸 뒤처지지 않나. 그러다가 다치지 말고. 잡아.”

그는 내가 성가셔 죽겠다는 듯이 굴었는데, 늘 먼저 나서서 나를 챙겼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는 건 이럴 때 쓰는 거다.

나는 굳이 에녹의 도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무척 컸다. 키도 컸는데 손도 크고, 발도 나보다 크고 모든 게 나보다 다 커서 무척 기대고 싶어지는 몸이었다.

근육으로 짜인 다부진 육체와 내가 맥없이 매달려도 흔들림 없이 버티는 억센 힘. 그는 정말로 강인하고 듬직했다.

이래서 여주가 그에게 가장 크게 의지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에녹이 왜 소설 속 메인 남주였는지 알겠다.

이젠 그의 손을 잡는 게 낯설거나 어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불편한가.”

에녹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손아귀 힘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누군가와 손을 잡아 본 게 처음이라서 힘 조절이 어려워. 그대가 이해해 주길 바란다. 불편하면 얘기해.”

무뚝뚝하지만 퍽 다정한 말투였다.

누군가와 손을 잡아 본 게 처음이라고?

“왜?”

“아, 아니에요. 전하께서 손잡는 게 처음이라니 의외여서요.”

“잡을 일이 없었다. 그럴 만한 사람도 없었고.”

생각해 보면 에녹도 철저하게 혼자인 사람이었다. 원작에선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지만, 마거릿의 과거 기억을 통해 본 에녹 황태자란 인물은 그랬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내내 외롭게 지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불운한 출생 때문에도 늘 고독했지만, 추측하기로 종전 후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사람을 더 멀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이번엔 발바닥에서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얏.”

아무래도 발에 물집이 잡힌 것 같다. 그럴 만도 했다. 보기에만 예쁜 플랫 슈즈는 이런 숲속을 헤집고 다니기에 적합한 신발은 아니었다.

내 신음 소리를 들은 에녹이 다시금 나를 돌아봤다.

“앉아 봐.”

그가 근처에 쓰러진 나무 기둥을 가리키며 말했다.

통증 때문에 자리에서 미적거리고 있자 에녹이 한숨을 내쉬었다. 곧장 내 허리춤으로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들어왔다.

에녹이 나를 가뿐하게 들더니 나무 기둥 위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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