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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1)화 (1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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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잠은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나는 돌바닥 위에 비렁뱅이처럼 누워 있었는데, 바닥이 차서 간밤 내내 추위에 떨어야 했다. 무척 피곤했던지라 그렇게 잠들면 입이 돌아간다는 생각도 못 했다.

비가 오고 있던 데다가 동굴엔 한기가 돌았고 일교차가 심해서 어찌나 추운지…….

나는 꿈속에서조차 추위에 떨었다.

‘진짜 추워.’

그간 쌓여 있던 피로가 몰려와서 그런지, 정신마저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감각이 선명한 꿈이라니.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한참을 떨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어렴풋한 시야에 에녹의 재킷이 아른거렸다.

나는 간절하게 손을 뻗어 에녹의 재킷을 부여잡았다. 손 안에 닿는 따뜻한 감촉에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다.

“왜 그러지?”

꿈속의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나는 재킷을 보며 괴로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야속해서요.”

“……야속?”

나는 에녹의 재킷을 재차 당기며 대답했다.

“이놈 말이에요. 재키. 제가 추워할 때 제 어깨를 덮어 줬던 놈이거든요.”

그래. 원래는 그랬는데……. 나는 갑자기 밀려오는 서러움에 눈물이 북받쳤다.

“바보 같은 놈. 어쩌자고 다른 쓸모없는 몸뚱이 위에 걸쳐져 있는 건지……. 나 지금 너무 추운데.”

“…….”

“저에 대한 사랑이 식었나 봐요. 나쁜 새X.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나는 눈물을 훌쩍이며 쥐고 있던 재킷을 아련하게 놓아주었다. 내가 너무 꽉 움켜쥐고 있었는지 재킷이 모양 빠지게 구겨져 있었다.

그 초라한 모습마저 내 심금을 울렸다. 나는 다시 가슴이 아파 와 구겨진 재킷을 외면하며 잠이 들었다.

분명 대화를 나누던 누군가가 헛웃음 짓는 소리까지 들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나는 눈만 뜬 채로 멍하니 누워 있었다. 추위에 떨면서 잠든 것 같은데 생각보다 몸이 개운했다.

‘현실 같지 않고 기억이 흐릿한 게……. 역시 꿈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쩐지 포근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내렸다.

예상대로 내 어깨를 고급스러운 원단의 재킷이 감싸고 있었다. 에녹의 것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동굴 입구를 바라보니, 허리춤까지 쌓아 둔 돌벽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비가 완전히 그친 모양이다.

동굴 입구에는 에녹이 있었다. 그는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리고는 열심히 커다란 돌덩이들을 옮기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지내던 세월 때문인지, 에녹은 황태자로서의 위엄보다는 이런 식으로 실리를 더 추구하는 편이었다.

나는 덮어 준 재킷을 마다하지 않고 주섬주섬 입으며 에녹에게 다가갔다.

그가 흘끗 나를 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돌을 치우기 시작했다.

분명 꿈에서 에녹의 재킷을 보고 ‘어쩌자고 다른 쓸모없는 몸뚱이 위에 걸쳐져 있는 거냐’고 말했던 것 같은데.

설마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나, 돌았니? 술 마신 것도 아니고 왜 그랬지? 앞뒤 맥락도 없는 그런 개소리를 하다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황족 모독죄가 걱정되는 건 둘째 치고 쪽팔리잖아!

하지만 다행히도 에녹은 평소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별말 없는 거 보니까 꿈이었겠지?’

그제야 조금 안심하고 힘을 내서 그를 도와 돌을 치웠다.

그런데,

“사랑은 잘 이뤄진 것 같군.”

“……네?”

갑작스러운 질문이 고막을 훅 치고 들어왔다.

에녹은 돌을 전부 치워 내고 손을 털며 나를 돌아봤다. 한 손을 허리에 척 얹은 그가 내가 입은 재킷을 가리키며 웃었다.

“쓸모없는 몸뚱이인 내가 입고 있는 것보단 재킷의 사랑을 이뤄 주는 편이 좋지 않겠나.”

‘제기랄, 꿈이 아니었다니!’

나는 당황해서 눈을 굴려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쁜 새X,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내가 내뱉었던 마지막 대사마저 떠올랐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도 말을 예쁘게 해야 하는 거다.

“그……. 무슨 말씀인지.”

“모른 척하시겠다?”

에녹답지 않은 익살스러운 질문이 귓가에 파고든다. 나는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리다가 결국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 잠결에 그냥 헛소리한…….”

“재키라고 귀여운 이름까지 지어 줘 놓고 그렇게 발뺌하면 재키 새X가 서운해하겠군.”

젠장할, 욕하는 것까지 들었니.

나는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고자 눈을 굴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욕하는 게 굉장히 어색하시네요.”

“이런 노골적인 욕을 입에 담아 보는 게 처음이라서 그래. 하지만 영애는 무척 자연스럽더군. 마치 일상처럼.”

XX. 일상 맞아서 또 할 말이 없었다.

“아, 아닌데요? 그거 저 아니에요. 전하께서 꿈꾸셨나 봐요. 저는 욕 같은 거 못 해요. 귀족이잖아요.”

에녹이 나른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부끄럽다면 모른 척해 주지.”

그가 선심을 쓰듯 말했다.

느긋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에녹이 손가락으로 내가 입고 있는 재킷의 어깨 금장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시선이 어깨에서 목을 타고 천천히 올라왔다. 이윽고 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뭐, 영애는 워낙 괴짜가 아니었나. 그래서 이상하진 않았다.”

‘차라리 그냥 이상하다고 해. 잔인한 XX.’

이미지 개선하려면 아직도 먼 것 같다. 어쩐지 슬퍼져서 나는 괜스레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닦았다.

“영애의 사랑, 응원하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내가 결국 짜증스럽게 외치자 그가 즐겁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소년처럼 맑게 웃는 것은 처음 봤다. 나는 짜증을 내던 것도 잊고 넋을 놓은 채 그를 보았다.

물론 그 웃음은 길게 가지 않았다. 차분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어느새 표정을 지운 채 나를 쳐다봤다.

너무 정색을 해서 이젠 진중한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재킷은 입고 있어라, 또 쓸모없는 몸뚱이라고 욕먹을까 무서우니까.”

끝까지 나를 놀려 먹는다, 제기랄.

아니 에녹이 원래 저런 인간이었나? 원작에서도, 마거릿의 기억 속에 있는 황태자 에녹도, 분명 저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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