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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0)화 (1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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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다시 에녹에게 재킷을 돌려줬다.

그리고 우리에게 조금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나의 목표와 에녹의 목표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 것이다.

나는 일 년 동안 이 섬에서 무사히 버티는 것이 목표였고 그는 당장 이 섬을 탈출하는 것이 목표였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생존하기 위해선 해변가보다는 섬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강이 흐르는 곳을 찾아야 생존 확률이 높아지죠. 피난처를 만들기도 훨씬 수월하고요.”

“구조 요청은 하지 않을 생각인가? 섬으로 들어가면 생존 확률은 높아질지언정 구조를 기대하긴 어려워져.”

에녹의 말에 나는 조금 갑갑한 마음으로 그를 봤다.

그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문’이 열리기 전엔 탈출할 수 없을 텐데, 그 사실을 설명할 수도 없고 참 답답한 일이다.

나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비장의 수를 꺼냈다.

“그럼 저희는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군요.”

“……뭐?”

그는 내가 그런 말을 꺼낼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내가 혼자서는 다니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나 보다.

언제 떠날지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차라리 잘됐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온다고 내가 영애의 말을 들어줄 거라…….”

“진심인데요?”

나는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오느라 잠시 벗어두었던 플랫 슈즈를 신으며 옷가지를 정돈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잡아 둔 물고기 두어 마리를 얇은 나무줄기에 꼬아서 어깨에 걸었다.

에녹은 정말로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마물에게서 구해 주신 건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잠시나마 전하와 함께 있어 위안이 된 것 같아요. 처음 깨어났을 때, 혼자였으면 미쳐 버렸을지도 몰라요.”

내 마지막 인사에 그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플로네 영애. 지금 장난할 기분이 아닌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게 활기찬 작별인사를 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럼 이만!”

그리고 그를 지나쳐 숲속으로 막 들어왔을 때였다. 뒤에서 다급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깐만.”

에녹이 내 뒤를 따라와 어깨를 부여잡았다. 나는 자리에 멈춰 서서 그를 향해 돌아섰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군.”

“의견이 맞질 않으니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인데요?”

“지금 이 위험한 짓이……!”

에녹이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이다가 내 얼굴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내게 다시 말했다.

“지금 이 위험한 행동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말하는 건가?”

나는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제가 걱정이 돼서 그러시는 건가요? 위험해질까 봐?”

‘아니면 수상쩍은 마거릿을 옆에 두고 지켜보려는 건가?’

아마도 후자겠지. 뭐, 사실 내가 수상쩍어 보이는 건 사실이라서 나도 할 말은 없다.

아무튼 이상하게도 에녹은 내 말에 정곡이라도 찔린 사람처럼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보기보다 생존력이 강해요. 제 걱정은 마시고, 본인 걱정이나 하세요.”

마물이 가장 큰 복병이었으나, 해가 질 무렵에 어디든 숨으면 되겠지. 그래도 숨는 건 자신 있었다.

마물이 무섭다고 해변에서만 지내다가 문이 열리는 것도 놓치고 고립될 순 없었다. 벙커든 오두막이든 나는 뭐가 됐든 찾아야겠다. 그리고 이 섬의 비밀을 알아야겠다.

그래야 내가 왜 갑자기 마거릿에게 빙의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에녹을 향해 다시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서 등을 돌리는데 그가 황급히 내 팔을 잡았다. 그 다급한 손짓이 퍽 간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엔 조금 짜증이 났다. 그래서 일부러 성가시다는 티를 잔뜩 내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가 결심이 선 얼굴로 내게 말했다.

“같이 가지.”

그건 정말로 의외의 선택이었다. 나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마거릿에 대한 경계가 옅어진 걸까?

“영애와 함께하긴 하겠지만, 난 계속해서 구조 요청을 할 방법과 섬을 탈출할 길을 찾을 거다.”

원작 속 출구를 찾지 않고도 이 섬을 탈출할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좋겠지. 그건 나도 바라는 바다.

더불어 에녹이 내게 강압적으로 굴지 않고 의견을 굽힌 건, 관계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신호 같기도 했다.

에녹은 꽤 훌륭한 전력이어서 그가 함께해 준다면 계획에 차질은 좀 있겠지만, 나쁠 건 없었다.

“좋아요.”

결국 우리는 함께 새로운 거처를 찾기로 했다.

그리고 반나절 정도 숲속을 헤매다가 가파른 절벽을 발견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에녹을 향해 가시거리 안에 있는 높다란 절벽을 가리켰다.

“저런 절벽 아래에는 동굴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가는 길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저만한 거처도 없을 거예요.”

“대체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지?”

에녹이 세상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플로네 공작 가문에서 배운 건가?”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여기서 적당히 에둘러 대답하지 못하면 의심을 살 거다.

나는 대충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네. 가문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았죠. 알면 다쳐요.”

그렇게 말을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에녹은 ‘플로네 공작을 다시 봤다’며 어떻게 영애에게 그런 험한 교육을 시킬 수 있냐고 화를 냈다.

아니, 왜 저가 화를 내고 난리람? 나는 외려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덕분에 지금 큰 도움이 되고 있잖아요?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말에 에녹은 할 말이 없었는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무사히 동굴에 도착했다.

에녹이 동굴 안에 혹시 모를 짐승이 있는지 수색했다. 동굴이 안전하다고 판단이 된 뒤에 우린 무거운 돌들을 옮겨 입구에 쌓았다. 그리고 커다란 나뭇잎을 덮어 대충 자연스럽게 위장도 했다.

축축하고 서늘한 동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맑았던 하늘을 뚫고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거센 빗줄기에 에녹과 나는 동굴 안으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야만 했다.

다행히 동굴은 지면보다 살짝 높은 위치에 뚫려 있었다. 때문에 동굴 안으로 물이 들어차진 않았다.

“아! 이럴 게 아니라 빗물을 모아야겠어요.”

나는 들고 온 코코넛을 에녹에게 내밀었다.

에녹이 의아한 얼굴로 내게서 코코넛을 받더니 맨손으로 쪼개어 건넸다. 이제는 이유도 묻지 않고 자동으로 시키는 일을 해 준다.

‘조금은 신뢰가 쌓인 건가?’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에녹과 코코넛 수액을 나눠 마셨다.

그리고 물고기 손질에 쓰던 날카로운 나무칼로 빈 코코넛 통의 안쪽을 긁어냈다. 진짜 칼보다는 무뎌서 완벽하게 손질되진 않았지만, 그럴듯한 그릇이 만들어졌다.

그런 식으로 코코넛 그릇을 네 개 만들고 지면에서 살짝 올라온 동굴 입구에 올려놨다.

빗물을 받아 놓은 그릇에 흙탕물이 튀거나 바람에 휩쓸리면 안 되니까 최대한 안쪽으로 올렸다.

대체 뭘 하는 건지 궁금하단 얼굴로 에녹이 나를 쳐다봤다. 이제는 소리 내어 묻진 않고 눈으로 말한다.

“빗물을 모으면 냇물 같은 걸 증류하지 않아도 되죠. 수고를 덜잖아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라면 그냥 마셔도 된다. 그 자체가 증류한 물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군.”

에녹은 조금 싱겁게 답했다.

나는 피곤한 얼굴로 동굴 벽에 기대앉았다.

동굴의 울퉁불퉁한 벽과 바닥은 불편했고 오래 앉아 있기 힘들었다. 또 동굴답게 넓고 스산했으며 습기가 가득했다.

별다른 지형물은 없었지만 썩 유쾌한 공간은 아니었다.

비가 와서 마른 부싯깃을 찾기 어려울 테니, 불을 피울 수도 없을 거다. 조금 추웠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제는 이런 말도 지겹겠지만, 인정해야겠군. 영애는 변했어.”

에녹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나는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뜨고 그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빛이라곤 동굴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전부였다. 어둠 속에서 소량의 달빛을 받은 에녹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반듯한 얼굴은 동요하는 기색 하나 없이 차분했다.

마물을 한 손으로 해치울 때도 그랬지만, 그런 태도는 동행자에게 커다란 안도감을 주었다.

에녹은 아직 나를 싫어하는 듯했지만, 그가 듬직한 건 사실이다.

“거봐요. 저 변했다니까요.”

조금 우쭐거리며 대답했는데, 에녹은 나를 흘끔 보기만 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서 혼자 무척 민망해졌다.

아무튼, 이렇게 천천히 신뢰를 쌓다 보면 내 미래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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