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랄!”
에녹이 산 아래를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기어코 욕설을 뱉었다.
날이 무척 맑았다. 그만큼 가시거리가 좋아서 아주 멀리 있는 수평선이 눈에 더 확고히 들어왔다.
우리가 올라온 산과 비슷한 높이의 산봉우리가 두 개 더 있었는데, 그 너머로도 언뜻 수평선이 보였다.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섬이었다.
하……! 하하하하!
“제기랄, 여기가 섬이라니.”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허탈감과 함께 쓰라린 눈물을 삼켰다.
이로써 내 가설이 더욱 확실해졌다. 이곳이 소설 속이이라는 것. 애초에 가설도 아니었던 것 같지만.
나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섬의 지형을 눈에 담았다.
중간 즈음에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게 꼭 서울의 한강 같아 보이기도 했다.
편의상 저쪽을 북섬, 이쪽을 남섬이라고 칭하자면, 남섬에는 우리가 오른 산과 비슷한 높이의 산이 하나 더 있었다.
남섬에는 총 두 개의 산이, 그리고 북섬에는 하나의 산이 있는 셈이다.
“진짜 섬이잖아…….”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
멀리까지 나가 주변을 둘러보던 에녹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도 허탈한 얼굴로 내 옆에 따라 앉았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앉아 각자 생각에 잠겼다.
“여긴 대체 어디일까요. 란그리드 제국 근방에 있는 섬일까요? 아니면…….”
설마 한국인가……? 현대 한국식 물건이 나오는 섬이라면, 그 가능성을 충분히 의심해 볼 법하지 않나?
사실 마거릿에게 빙의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여주 유안나가 1년 만에 생겨난 그 ‘문’을 통해 섬을 탈출하게 됐다는 부분까지만 읽었던 것 같다. 1권의 마무리가 그랬다.
- 1년마다 섬 밖으로 연결된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문’이 열리기 전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섬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소설은 1인칭 시점이었지만, 도입부에는 분명 그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손 글씨로 적힌 누군가의 습작용 소설이었는데, 그 글귀만 다른 글씨체여서 이상하긴 했지.
요즘 시대에 책 한 권을 누가 손으로 쓰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했고, 묘사도 굉장히 담백하고 사실적인 게 마치 실제 기록처럼 느껴져서 더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이게 다 길에서 주운 남의 소설을 몰래 훔쳐본 탓에 벌어진 일이다. 제기랄.’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에녹도 만만찮게 고단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제법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추측이 안 돼.”
에녹은 무력한 얼굴로 괴로운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욕설을 지껄이고는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격렬한 감정을 내비치는 건 처음 봤다. 하지만 이 상황이 절망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거지 같은 섬에 버려지다니.”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삼켰다.
신은 없다. 떨어지는 간판에 맞고 죽은 것도 억울한데 누군가의 습작 소설 속에서 진짜 생존물을 찍고 있어야 한다니,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나는 우울한 얼굴로 양 뺨에 손을 얹었다.
어쩔 수 없지. 처음 계획했던 대로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최대한 많이 모으고, 여주인공이 발견했던 ‘벙커’를 찾아야겠다.
‘그건 그렇고. 다른 등장인물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내 기억에 등장인물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깨어난다. 강가에서 깨어난 사람도 있었고 숲 한가운데서 깨어난 사람도 있었다.
에녹은 해변가에서 마거릿과 다투다가 여주와 마주쳤었지, 아마?
이미 시작부터 소설 전개가 다 틀어졌지만, 알게 뭔가. 나는 일단 살아야겠는걸.
꼬르르륵.
그때 허기진 배에서 처량한 소리가 울렸다. 에녹이 나를 쳐다봤다. 내 배에서 난 소리였기 때문이다.
‘아니, 또 나야?’
에녹의 배는 얌전한데 왜 자꾸 내 배만 배고프다고 항의하는 건지 모르겠다. 주인 따라가는 건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린 고작 아사이 야자만 먹고 모든 에너지를 산을 오르는 데 쏟아부었다. 에녹은 잠도 자지 않았으니 열량을 더 많이 소모한 상태일 거다.
‘그래. 이건 문제가 있는 게 맞아. 뭔가 조치가 필요해.’
나는 일단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선 내려가죠. 섬인 거 알았으니까, 내려가서 대책을 세웁시다. 그리고 살아야죠.”
나는 앉아 있는 에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물론 여전히 내 앞으로의 계획에 에녹의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를 피해 도망칠 힘이 없었다.
에녹은 내밀어진 내 손을 보다가 생각을 읽기 어려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제야 그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거릿이 내민 손을 그가 잡아 줄 리가…….’
하는 수 없이 손을 거두려고 하는데 그가 뒤늦게 내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감겨 왔다.
“고맙군.”
여전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지독히 낮은 음색은 지나칠 정도로 감미로워 심장에 해로웠다.
아니 이 남자는 대체 왜 초췌해야 할 상황에서도 혼자 산뜻하고 달콤하고 그런 거야?
나는 등을 돌려 가슴 앞섶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하며 요란을 떤 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에녹을 바라봤다.
“가시죠.”
일단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하산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