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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6)화 (6/234)

“설마…… 계속 깨어 있었던 건 아니죠?”

에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정말 한숨도 자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체력을 막 쓰면 안 돼요. 언제까지 굶을지도 모르는데 열량 소비를 하면 어떡해요?”

내 현실적인 조언에도 에녹은 미동이 없었다.

“영애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직 판단이 서질 않아서.”

말투는 덤덤했지만, 나를 훑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래 놓고 내 몸 위로 재킷까지 벗어 덮어 주다니, 언행이 이렇게까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본다.

우리가 깨어난 시간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그러나 에녹은 마물이 어두울 때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그래서인지 해가 뜬 지금도 내내 긴장한 채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물론 나라고 긴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마물은 빈번하게 등장할 거고 그때마다 겁을 먹고 움츠릴 수는 없었다.

꼬르륵.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배에서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에녹이 자리를 정리하다 말고 나를 돌아봤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긴장감을 느끼니 어쩐지 배가 더 고픈 느낌이 들었다. 목이 마른 건 어찌 코코넛으로 해결을 했는데 문제는 허기였다.

“먹을 거라도 구하러 갈까요?”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았다.

“사냥을 하자는 얘긴가?”

“사냥할 시간은 없고요. 열매 채집을 하죠.”

“열매……?”

에녹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반문했다. 열매 채집을 해 본 적 없는 모양이다.

나는 우리의 임시 거처 바로 뒤에 있는 야자나무를 가리켰다.

“저 야자나무에 열려 있는 작은 열매들 보이죠? 저게 아사이 야자라는 식용 가능한 열매거든요. 저걸 채집할까 봐요.”

아사이 야자는 딱딱한 씨앗이 많고 식용 가능한 부분은 적어서 사실 필요한 열량을 채우기엔 한없이 모자란 열매다.

하지만 당장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일 년 내내 열매를 맺는 아사이 야자를 발견해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조금 더 들어가면 블랙베리나 산딸기를 채집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러기 위해선 열매가 맺는 곳을 한참 찾아다녀야 하니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정말 식용 가능한 열매인가? 영애를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군.”

“그럼 굶으세요. 전 먹을게요.”

나는 나무 탈 준비를 하며 간단히 대답했다. 이번에도 에녹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는 내가 드레스를 걷어서 묶는 걸 보고 나를 막아섰다.

“뭐 하는 거지?”

“나무를 타야죠. 열매를 따야 하니까요.”

나는 야자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에녹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따라 높이를 가늠했다.

“그냥 나무를 치면 떨어질 텐데, 굳이 올라가야 하는 건가? 위험해 보이는데.”

“야자나무가 얼마나 단단한데 이걸 그냥 쳐서 떨어뜨리자고요? 그리고 아사이 야자가 얼마나 작은 열매인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나무에 오를 준비를 했다.

“일개미도 아니고 세월아 네월아 떨어진 열매만 모으고 있을 순 없잖아요. 그냥 깔끔하게 제가 올라가겠어요! 열매 가지를 통째로 꺾어 올게요.”

에녹은 여전히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곤 나를 옆으로 슬쩍 밀어냈다. 그러곤 주먹을 가볍게 흔들어 야자나무를 내리쳤다.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나무는 물론 바닥까지 진동을 했다.

나는 열매가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넋 놓고 쳐다봤다. 에녹이 가뿐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이렇게 하면 되나?”

나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이 정도 양이라면 열매를 그냥 쓸어 담기만 해도 되겠다.

“최고예요, 인정. 일개미보다 효율적이야.”

나는 쌍 엄지를 들어 보이며 칭찬했다. 에녹이 내심 뿌듯한 얼굴을 했다.

조금 전까지 나를 못 믿겠다고 말하던 에녹은 그렇게 내 옆에 앉아 순순히 열매를 섭취했다.

그러나 열매를 씹어 보고는 그가 실망한 얼굴로 미간을 모았다.

“맛은 없군. 먹을 것도 얼마 없고.”

에녹의 입에는 뭐든 안 맞지 않을까? 과즙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먹을 부분이 적어서 그렇지.

“당장에 구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인데 어쩌겠어요.”

반찬 투정하지 말란 듯이 말했더니, 에녹이 민망했는지 뺨을 붉히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산에 다녀와서는 물고기 사냥이라도 해야겠다.

우리는 열매를 섭취한 뒤, 자리를 정리하고 높은 산에 올라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산이 무척 높고 험준해 보여서 단단히 채비를 해야 했다.

사실 준비라고 해 봐야 고작 옷가지 정돈과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단단한 나뭇가지를 구하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하필이면 치렁치렁한 드레스와 플랫 슈즈를 신고 이런 정글 숲을 헤쳐 나가야 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된다.

에녹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성가시단 얼굴로 나를 봤다.

“영애는 그냥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의 말대로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가 전하를 어떻게 믿고요? 상황이 정반대였어도 전하께선 함께 가셨을 거잖아요.”

내 말에 할 말을 잃은 에녹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사실 나도 판단이 잘 서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전장을 누비던 에녹이라 할지라도 조난은 처음일 것이다.

게다가 평민 소생이라고 해도 태생이 고상한 황족이었으니 이런 오지 탐험은 해 본 적도 없을 거다.

생존 전문가라고까지는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에녹보다는 내가 이런 상황에 더 익숙하지 않을까?

“좋다. 하지만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내가 영애를 반드시 구해 줄 거라곤 장담 못 해.”

“알고 있어요.”

에녹은 말없이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렸다.

일단 에녹이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나는 에녹의 등을 보며 걸었다.

치렁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그러모아 최대한 맨다리가 드러나지 않게 애쓰느라고 조금 힘겨웠다.

괜히 따라간다고 했나?

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판단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에녹은 마거릿을 용의 선상에 두고 있으니, 알고 있는 정보를 다 공유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가 정말로 내 목숨을 보장해 줄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고.

‘그래. 참고 따라가자. 할 수 있다!’

숲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그곳은 초목이 왕성하게 자란 밀림이었다.

거기다가 온갖 수풀과 덤불로 가득해 길을 뚫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에녹이 들고 온 나무 막대를 이용해 풀을 헤치면서 걸었지만, 아무래도 움직임이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나.”

에녹이 다소 지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을 만해요.”

나도 마찬가지지만, 에녹도 땀을 그리 많이 흘리진 않았다. 거기다가 꿉꿉한 땀 냄새나 젖은 옷 냄새도 나지 않았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섬이라는 특성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마력도 신력도 사용 불가능한 섬이라서 그런 걸까.

뭐가 됐든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건 참 다행이다.

“좋은 자세군.”

에녹이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성인 남성도 이런 상황에 놓이면 살아남기 어려울 거다. 거기다가 내가 빙의한 인물은 마거릿이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 본 고상한 귀족 영애. 에녹이 충분히 걱정할 만했지.

그는 마거릿이 달라졌다는 건 확신하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이란 의심은 못 하는 듯했다.

“이 드레스랑 플랫 슈즈만 아니었어도 제 몫 이상은 했을 거예요.”

에녹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이윽고 우리는 드디어 산의 초입 등산길에 올랐다. 해가 뜬 방향을 보니 아직은 아침 시간대인 것 같다.

산의 높이를 보니 북한산 정도는 되어 보였다. 점심 즈음에는 정상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북한산도 이런 차림으로는 올라 본 적이 없는데.

에녹은 불평도 없이 묵묵히 따라오는 내가 신기했는지 연신 뒤를 돌아다보며 나를 확인했다.

꼭 반려견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주인의 모습과도 흡사해서 좋은 반응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정말 다행인 건 아직 산짐승이나 마물처럼 생명을 위협할 만한 무언가와 마주친 적이 없다는 거다. 그래, 조난 둘째 날에도 생명을 위협받으면 너무 힘들잖아.

아무튼 우리는 무사히 산의 정상에 도착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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