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김새도 평범한 늑대처럼 보이지는 않았어요.”
나는 에녹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마물이 확실해 보였지만, 그걸 아는 체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검기가 발동이 안 되더군.”
‘검기를 사용했으면 굳이 완력을 쓰지 않아도 됐을 텐데.’라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 말을 듣고서야 생각이 났다.
‘맞아. 이 섬에서는 마력과 신력이 통하질 않았지.’
검기도, 마법도, 신력도 여기서는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오로지 맨몸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도 남주들답게 모두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서 사냥을 잘 했기에 식량만큼은 걱정 없었던 것 같다. 아까 마물을 물리치던 에녹의 무자비한 괴력을 생각하면 검기가 없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영애가 뭘 안다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에녹은 끝내 나를 무시하는 발언으로 끝을 맺었다.
‘기껏 칭찬하고 있었더니, 저 인간 말본새 좀 보게?’
참자. 참자.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다.
“대체 누가, 왜, 우리 두 사람을 여기에 버려둔 건지 모르겠다.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애와 나였는지, 그 점도 의심스러워…….”
에녹이 말끝을 흐렸다. 또다시 나를 의심하는 모양이다.
“제가 전하를 납치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위험천만한 야생이 아니라, 어느 한적한 저택에 가뒀겠죠.”
최대한 내가 무해하다는 걸 어필하려고 했던 건데, 이건 마치 진짜로 그를 납치할 생각을 했던 것처럼 들렸다.
에녹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 어색한 침묵에 나는 당황해서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어요. 실행에 옮길 생각도 당연히 한 적 없고요.”
구질구질 말이 길어졌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어서 에녹이 그 말을 믿었는지는 모르겠다.
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니 에녹은 누워서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옆얼굴조차 환상적으로 잘생긴 사람이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지. 나는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그러모아 쥐었다.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백금발…….’
사실 마거릿도 예쁜 편이었다. 외모로만 따지자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괴상한 성격 때문에 아름다운 외모가 가려진 케이스였지.
한참 머리카락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에녹에게 물었다.
“여기 정말 사람이 없는 것 같죠?”
“그건 아직 모르지. 하지만 있을 거라 믿는다. 이곳이 섬이 아니라면.”
에녹은 마치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이 섬이 아닐 거라고.
하지만 내가 아는 소설 속이 맞다면 여긴 섬이었다. 그것도 무인도. 그러나 에녹에게 그 사실을 말해 줄 수 없어서 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나는 몸을 일으켜 에녹을 향해 돌아앉았다.
“납치를 당한 것 같진 않잖아요. 목적이 있어서 납치를 했다면 이렇게 해변에 버려둘 리가 없어요.”
에녹이 나를 따라 찬찬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드반 폐태자를 떠올리는 걸까. 에녹은 이 일이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의 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섬에 헤스티아 왕국의 왕세자와 제국의 근위대장, 대성녀, 대주교, 대마법사까지 있는 걸 안다.
‘제국의 거물들은 다 모였네.’
단순히 에녹 하나만 노린 건 아닌 것 같았다. 가장 이상한 건 그 사이에 고작 귀족 영애인 마거릿이 끼어 있다는 거지만.
나는 팔짱을 끼고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뭐 짐작 가는 거 없으세요? 전하께선 여기 오기 전까지 뭐 하고 계셨어요?”
에녹의 미간이 좁아졌다. 짐작 가는 게 없는 모양인지, 잠시 고민하던 그가 찜찜하단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요?”
“황궁의 집무실에서.”
“일하기 전에는요?”
“전이라니……. 계속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니,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뭐 하고 계셨냐는 얘기였어요. 밥도 먹고 사람도 만나고 했을 거 아니에요.”
내 물음에 에녹은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를 만난 이래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식사는 하지 않았다. 서류가 밀려 있어서 집무실에서 간단히 과일을 들었지.”
“그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밥도 안 먹고 줄곧 집무실에서 일만 하다가, 눈 떠 보니 여기였다는 소리인가요?”
내 물음에 에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민망했는지 그가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그럼 그 전날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집무실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국무 회의가 있어서 회의에 참석한 뒤, 집무실에서 계속 일을 했다.”
지독한 일벌레였다. 과로 민족인 한국인보다 더한 것 같다.
스물일곱 살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이진주, 반성한다. 저렇게 일해야 성공하고 황태자도 되고 하는가 보다.
“외출은 안 하셨나요? 외부인은 안 만났어요? 최근에 수상쩍은 사람을 마주친 적은?”
에녹이 그제야 내 질문 공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취조당하는 것 같군.”
“취조 맞아요.”
에녹이 못마땅하단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나를 쏘아봤다.
“그 취조, 이번엔 영애가 당할 차례인 것 같은데.”
“제 질문에 대답 아직 안 하셨어요.”
어디서 발을 빼려고. 내가 물러섬 없이 단호히 맞서자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수상쩍은 외부인은 만난 적 없다. 근 한 달간은 연말 결산으로 바쁜 시즌이라 황궁 밖으로 나간 기억이 없어.”
그렇게 말하는 에녹은 착잡한 얼굴이었다.
인생 참 재미없게 산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과거의 나도 딱히 인생을 보람차게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직장인들이 다 그렇지 뭐.
“그러는 영애는 무얼 하고 있었지?”
“저는…….”
나는 마거릿의 기억을 살피다가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어렵게 공수한 그의 초상화를 가지고 저택에서 혼자 덕질을 하고 있었다고는 절대로 말 못 한다. 구태여 사실을 고백해서 불쾌한 시선을 받고 싶진 않았다.
“플로네 저택의 살롱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중이었어요. 제 차림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계속 실내에 있었거든요.”
실제로 나는 실내 드레스에 플랫 슈즈를 신고 있었다.
드레스의 네크라인에는 화려한 피슈가 달려 있었고 소매나 드레스 자락에도 레이스가 많았다. 거기다 네크라인에 장식된 큼지막한 보석 장식도 제법 요란했다.
이런 야생에 어울리는 차림은 결단코 아니었다.
“최근에 만났던 사람 중에 수상쩍은 사람은……. 모르겠군요. 제가 사교성이 좋아서 만나는 사람이 많아요. 그 많은 사람 중에 누가 수상쩍은 사람이었는지, 판별하기 어렵네요.”
사실 사교성이라기보단 플로네 공작 가문의 힘이었지만.
마거릿은 성격이 까다로워서 인기가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에녹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지만, 그는 굳이 그 점을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내 말을 끝으로 다시금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가르고 일정한 간격으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완전히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렸다. 섬뜩하도록 검은 바다 위로 떠오른 달이 참 밝았다.
에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은 무엇이든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것 같군.”
그 말이 맞다. 우선 내일 높은 곳에 올라가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파악을 해야 할 것이다.
“일단 오늘은 체력을 비축하고 이만 잘까 봐요. 내일은 이곳이 어딘지 알아봐야 하니까요.”
내 말에 에녹도 동의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곧 서로를 등지고 누웠다.
나는 그가 자는 틈에 도망쳐 볼까 고민했지만 그것도 잠시, 오후에 마주쳤던 마물을 떠올리고는 빠르게 생각을 접었다.
우선 내일 에녹과 함께 산에 오르고 상황 파악을 한 뒤에 철저히 계획을 세워 도망쳐야겠다.
‘그리고 혹시 알아? 어쩌면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내 방 침대일지도 몰라. 나는 그저 긴 꿈을 꾼 것뿐이고.’
그렇게 희망적인 기대를 품고 잠을 청했다. 불길한 상념들은 애써 가슴 한구석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그렇게 알 수 없는 바닷가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 * *
안타깝게도 이 모든 건 꿈이 아니었다. 나는 어제 잠든 해변에서 눈을 떴다.
일교차가 심한지 간밤에 너무 추워서 저체온증으로 죽는 건 아닌가 싶었다. 불이 없었던 탓이다.
하룻밤이야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는 절대 못 지낸다. 불 피울 라이터도 없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오들오들 떨며 몸을 일으켰는데 내 어깨를 덮고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화려한 어깨 금장이 달린 재킷이었다.
“깨어났나 보군.”
고개를 돌리니 에녹이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밤새 감시라도 하고 있었던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