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4)화 (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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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해는 금방 저문다.

마물까지 마주친 마당에 더 이상 숲속을 헤맬 순 없었다.

놀란 가슴은 여전히 진정이 되질 않았지만, 여기서 그 감각을 더듬고 있어 봐야 도움 되는 건 없었다.

우리는 결국 해변으로 다시 돌아와 잠자리를 물색했다.

그리고 우연히 야자수 아래 놓인 거대한 통나무를 발견했다.

통나무는 해변 모래사장 쪽으로 쓰러져 있었는데, 그 옆으로 적당히 몸을 숨기기 좋을 것 같았다. 해변이었지만 숲의 경계선과 더 가까워서 모래바람으로부터도 안전해 보였다.

우리는 하룻밤 지낼 피난처를 이곳에 만들기로 결정했다.

나는 일단 통나무 옆으로 자리를 잡고 사람이 누울 수 있는 크기만큼 모래 지면을 파냈다.

그리고 자갈을 주워 와 파낸 지면 위에 깔았다. 자다가 모래가 무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다.

“나뭇가지가 필요해요. 이 위에 깔 거예요.”

내가 만들어 둔 걸 보던 에녹은 할 말이 많은데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전하, 나뭇가지요.”

재차 말하자 에녹이 찜찜한 얼굴로 나를 흘끗거리며 나뭇가지를 구하러 갔다.

나는 에녹이 주워 온 나뭇가지를 자갈 위에 촘촘히 올렸다. 그다음 숲속에서 구해 온 이끼들을 나뭇가지 위에 넓게 펴서 올렸다.

이끼 뭉텅이는 수분이 많고 폭신해서 이런 야생에서 볼일 보고 휴지 대용으로 사용하기 적합한데, 이렇게 잠잘 곳 아래에 깔기에도 좋았다.

“이 위에 깔 넓은 이파리도 필요…….”

푹신한 이끼 위에 올릴 이파리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에녹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넓은 이파리를 구해 와 내가 만든 잠자리 위에 깔았다.

이어서 그가 쓰러져 있는 통나무를 받침대 삼아 길고 두꺼운 나무 기둥을 비스듬히 세웠다. 간이침대 위로 사선 지붕이 만들어졌다.

얼추 그럴듯한 잠자리가 마련이 된 것 같다. 예상외로 나와 에녹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옆에 바짝 붙지 말고 떨어져 있도록. 영애와 함께 자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에녹의 말에 나는 그를 흘겨봤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당신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러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쏘아봤다.

“당신?”

“아니 그러니까, 전하께서요.”

나는 뻔뻔하게 호칭을 정정했다.

에녹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으나 더는 몰아붙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변한 내게 영 적응을 못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런 변화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고 들기엔 우리 앞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아무튼 에녹은 통나무 옆자리를 내게 내어주고 자신은 바깥쪽에 자리를 잡았다.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호의를 베풀다니. 역시 매너는 만점이다.

간이 침상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에녹을 돌아봤다.

“전하.”

에녹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목마르지 않아요?”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지 김빠진 얼굴을 한 에녹이 나를 노려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어 봐요. 제가 코코넛이라도 구해 올게요.”

바로 뒤가 야자나무였다.

‘내가 나무는 또 잘 타지.’

난 진짜 고수들만 할 수 있다는 나무 타고 바나나 따기도 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바닥에 떨어진 썩지 않은 코코넛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러나 에녹이 불신 가득한 얼굴로 나를 막아섰다.

“어딜 가려고. 얌전히 있어.”

“아니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바로 뒤예요. 진짜 목이 말라서 그래요.”

“못 믿어. 틈만 나면 도망갈 생각부터 하고 있지 않나.”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말했을 텐데. 영애가 용의 선상에서 완전히 배제된 게 아니라고. 그러니 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목숨 잘 부지하며 내 옆에 붙어 있어.”

……뭔가 말이 이상했지만, 아무튼 도망칠 생각 같은 건 하지 말라는 거다.

그가 저런 반응인 것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라 나는 피곤한 한숨만 내쉬었다.

“어떻게 생긴 열매인지만 설명해라. 내가 다녀오지.”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보던 에녹이 말했다. 나를 숲에 보내는 것보단 해변에 두는 게 도망가도 잡기 쉽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것도 맞기는 하지.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코코넛 열매의 생김새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얌전히 설명을 듣고 사라진 그는 한참 뒤에 코코넛 열매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나무에 올라가서 따 온 거예요?”

“아니, 영애 말대로 바닥에 떨어진 것도 많더군.”

그는 말로는 나를 경멸한다 하면서도 착실히 내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줬다.

“그런데, 목마른 것과 이 열매가 무슨 상관이지?”

“이게 야자나무에서 열리는 코코넛 열매거든요? 이 코코넛 안에 든 수액이 수분 보충하기 좋아요.”

나는 코코넛을 통통 두드려 보며 말을 이었다.

“이건 괜찮네요. 너무 익은 열매를 먹으면 설사를 할 수도 있거든요. 수분을 보충하려다가 수분을 빼앗기기 십상이죠.”

나는 코코넛을 쪼갤 수 있는 돌을 찾았다.

그리고 열심히 코코넛의 껍질을 돌로 내려치고 있는데 옆에서 에녹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내게서 코코넛을 빼앗아 들더니, 손으로 쩍 하고 단번에 코코넛을 쪼갰다.

역시 완력이 엄청나다. 아니, 이건 그냥 괴력인가? 칼도 잘 안 드는 저 단단한 코코넛 껍질을 맨손으로 쪼개는 사람은 처음 본다.

“잠깐만요! 그냥 마시지 마세요!”

나는 에녹이 코코넛을 그대로 마시려는 걸 가까스로 막아 냈다. 그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땅에 떨어진 건 썩었을 수도 있어서요. 곤충이 갉아 먹었을 수도 있고.”

나는 코코넛 안쪽을 살피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수액을 찍어서 혀로 살짝 맛을 보았다. 옛날에 먹어 본 적 있는 맛이었다.

“확인했으니 이제 마셔도 돼요.”

내 말에 에녹도 들고 있는 코코넛을 들어 수액을 마셨다. 나도 일단 목이 말랐으므로 쪼개진 틈 사이로 쏟아지는 수액을 삼켰다.

“살 것 같다.”

나는 코코넛을 내려놓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아는 게 많군.”

에녹이 수분 보충을 하고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말했다.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마거릿과 에녹은 여주를 만나기 전까지 빗물을 받아 마시거나 몇 날 며칠 이슬을 모아 마시는 등, 수분 보충 때문에 고생깨나 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원작과 달리 지금은 내 덕에 에녹도 수월하게 적응을 하고 있었고 나는 에녹 덕에 마물로부터 목숨을 부지했다.

‘이런 게 바로 상부상조라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하늘은 옅은 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살아 있긴 한 건지. 여기가 진짜 소설 속인지.

“영애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고요한 얼굴로 나를 살피던 에녹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 맞아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에녹은 믿지 않았다. 아니, 왜지? 저가 먼저 다른 사람 같다고 해 놓고.

“확실히 지금 영애의 상황 판단이나 대처 방식을 보고 있으면, 내가 알던 그 플로네 영애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어.”

에녹은 설명이 필요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딱히 설명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도 반응이 달라. 이런 상황에 닥쳤을 때 보통은 영애처럼 침착하지 않거든.”

에녹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역시 해명할 도리가 없었다.

원래의 마거릿 로즈 플로네는 귀족 우월주의에 빠진 공작 가문 영애였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능숙하게 행동할 리가 없지. 그녀라면 이런 인적 없는 바닷가에 와 본 적도 없을 거고.

하지만 빙의 전의 나는 마거릿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산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드코어 캠핑이 취미인 걸스카우트 대장 강사였는걸.

강사 이후엔 캠핑 용품을 판매하는 회사에 취직도 했었다. 야외 스포츠도 종류를 가리지 않고 즐겼고, 열대 지역으로 여행을 갔다가 오지 체험을 하게 된 적도 있었다.

그때는 인생 참 스펙터클하게 산다며 한탄했었는데, 이제 보니 무인도에 낙오되기 나쁘지 않은 스펙이다.

물론 무인도에 낙오되기 괜찮은 스펙 따위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내가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그런 경험들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전에도 말했다시피 전투력은 제로라서 마물이나 야생 짐승이 나오면 바로 즉사하고 말겠지만 말이다.

“극한의 환경에 내몰리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죠.”

나는 변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변명했다.

마거릿이 아닌 것처럼 구는 건 결코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수상쩍은 티를 내는 셈이니까.

자칫 에녹을 납치하거나 혹은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정말 나일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에녹은 내 말에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글쎄, 그런 경우는 드물더군.”

이윽고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야 나는 온갖 전장을 구르던 그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단 생각을 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나는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협소한 간이 침구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던 중에 에녹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그건 동물이 아니었다. 꼭 마물과 흡사한 기운을 풍기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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